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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에 묻습니다... 일본 식민지배 합법입니까, 불법입니까

'3.6 강제동원 해법안' 정당성 좌우할 무거운 질문.... 역사 갈등의 핵심

등록 2023.03.29 17:10수정 2023.03.2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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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5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한 당시 선물한 탁상 명패가 놓여있다. 명패는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책상에 뒀던 것과 동일한 형태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뜻의 '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새겨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예측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게 확실해 보입니다.

윤 대통령께서는 3월 16일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만나러 일본에 가기 직전, 제3자 변제를 핵심으로 하는 정부의 '3.6 강제 동원 해법'의 당위성을 자신만만하게 설파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아이디어이며, 그와 관련한 책임은 다 내게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강제동원 문제는 정권이 바뀌어도 다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피해자들에게 돈이 지급되면 더 이상 논란이 일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모두 일본 언론 매체를 상대로 한 호언장담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내 상황은 전혀 딴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생존 피해자 세 분 모두 정부의 해법을 단호하게 거부했고, 대다수 시민은 일본의 사과와 배상이 없는 해법에 굴종·굴욕·매국 외교라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정상회담 이후엔 하루가 멀다고 교수, 종교인, 법률가, 학생, 학술단체, 시민단체 등 각계에서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항의 성명과 행동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장황한 20분간의 일방적 대국민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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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1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대통령실에서 생중계로 진행되고 있다. ⓒ 연합뉴스

 
급기야 윤 대통령은 직접 대국민 설득에 나섰습니다. 3월 21일 국무회의 모두발언 형식을 빌려 무려 5792자나 되는 긴 원고를 20여 분간 읽었고, 이를 생중계까지 했습니다. 국무회의보다 수천 배나 중요한 3.1절 기념사를 겨우 1300자 남짓으로 소화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파격입니다. 그만큼 여론 동향에 큰 위기를 느꼈다는 방증이겠죠.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듯, 윤 대통령이 아무리 길게 연설했다고 해서 성난 시민의 마음을 녹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말은 장황하게 했지만, 인식의 변화는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내용의 빈약함을 가리기 위한 경우가 많은데, 이날 국무회의 모두발언이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황한 모두발언에서 거슬리는 대목이 한두 곳이 아니었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세 부분이 특히 눈에 거슬렸습니다. 중요한 순서대로 말하면, 우선 "우리 정부는 국교 정상화 당시의 합의와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동시에 충족하는 절충안으로 제3자 변제안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는 대목입니다. 둘째는 "일본은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우리에게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표한 바" 있다는 부분이고, 셋째는 "이번 한일 회담에서 일본 정부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비롯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정부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는 언급입니다.

일본 역대 내각의 공통 역사인식은 바로 '식민 지배는 합법'


마지막 역사 인식 계승 부분부터 차례로 짚어보겠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16일 정상회담이 끝난 뒤 열린 합동 기자회견에서 정확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한국 정부의 3.6 해법 발표 때) 일본 정부는 1998년 10월에 발표한 일한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두 정상의 발언만 보면, '현재형이냐 과거형이냐' 하는 시제만 빼고는 내용이 대동소이한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맥락과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릅니다.

윤 대통령은 이 발언을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표시한 역대 내각의 인식을 계승하는 것인 양 설명하고 있지만, 역사 인식에 관한 일본 역대 내각의 인식에서 공통점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는 합법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든, 가장 긍정적이라고 평가 받는 2010년의 간 나오토 담화든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일본 역대 내각의 인식 중에는 노골적으로 '후세에게 더 이상 사과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밝힌 2015년의 아베 담화도 들어있습니다. 그나마 인도적 차원에서 진전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담았다는 무라야마 담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간 나오토 담화를 꼭 집어 계승한다고 약속해도 성에 차지 않을 판인데, 아베 담화까지 포함한 역대 내각의 인식을 계승한다는 이야기를 마치 일본 정부가 반성과 사과를 한 것처럼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상대에 속았거나 속은 걸 알면서도 국민에게 사기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사과의 횟수'가 아니라 '사과 뒤 번복'이 진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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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공동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윤 대통령을 보고 있다. ⓒ AFP=연합뉴스

 
둘째, 일본이 이제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사과와 반성을 표명한 바 있다는 것과 관련한 반론입니다. 윤 대통령은 수십 차례라고 했지만,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18일 YTN에 출연해 "우리 외교부가 집계한 일본의 우리에 대한 공식 사과가 20차례가 넘습니다"라고 말했더군요. 외교부가 조사했다니 그 숫자가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주장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일본이 반성과 사과를 20차례 이상 한 것이 아니라, 반성과 사과를 한 뒤 번번이 이를 뒤집곤 했다는 점입니다.

단적인 예로, 2015년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 때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말이 들어간 경위를 되돌아봅시다. 이 표현은, 결과적으로 전체 합의를 규정하는 말로 일본에 역이용당했지만, 애초 일본이 사죄한 뒤 번복하는 얄팍한 행위를 막는 방안으로 한국이 먼저 제안해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사과의 횟수'가 아니라 '사과의 불변성'이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일부 우파 정치인들은 일본이 사과할 게 아니라, 잘못된 사실을 주장해온 한국에게 오히려 사과받아야 한다는 얘기까지 들먹이고 있지 않습니까.

역사 갈등의 핵심 : 식민지배의 불법-합법을 둘러싼 인식 차

이제 세 가지 중 가장 중요한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윤 대통령은 3.6 해법을 1965년 국교 정상화 합의와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동시에 충족하는 절충안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중요한 얘기를 자세한 설명이나 논리도 제시하지 않고 달랑 한 문장 속에 욱여넣어 넘어가려는 태도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3.6 해법이 대법원 판결을 무시한 반민주적이고 반헌법적인 방안이라는 비판이 거세니까, 화들짝 놀라 대법원 판결도 고려했다면서 덤으로 급하게 꿰맞춘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윤 대통령의 '대법원 판결 충족' 발언은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 처음 등장한 표현입니다. 3월 6일, 박진 외교부장관이 정부 해법을 발표한 뒤 이 문제를 좌지우지했다는 안보실의 핵심 관계자가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에게 한 설명과 완전히 배치되는 말이어서 더욱 눈에 띄었습니다.

눈치 빠른 사람이면 누군지 다 아는 그 관계자는 "우리가 대법원 판결을 부정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만, 어쨌든 국제법적으로 그리고 한일 양국정부의 약속에 비춰보면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합의를 어긴 것이다'라는 결론이 된 것"이라고 당당하게 설명했었습니다.

쉽게 말해 대법원 판결은 일본 주장처럼 국교 정상화 합의와 양립할 수 없는 국제법 위반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국제법에 맞는 해법, 즉 제3자 변제 방안을 찾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 요지입니다.

이쯤 되면 윤 대통령의 인식이 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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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통령인지 외국 대통령인지" 지난 3월 21일 오전 광주시청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규탄' 기자회견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다. 양 할머니는 "나는 솔직히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통령인지 외국 대통령인지 감을 못 잡겠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그런데 느닷없이 윤 대통령이 대법원 판결을 인정하는 듯한 얘기를 하고 나섰으니, 과연 대통령의 진짜 인식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대통령의 인식과 다른 얘기를 핵심 참모가 떠벌인 것이었다면, 그를 파직하고도 남을 사안입니다.

강제 노동과 관련한 한일 갈등의 핵심은 '식민 지배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둘러싼 양국 사이의 인식 차이입니다. 1965년 한일 협정과 2018년 대법원 판결과 관계없이, 역대 한국 정부는 불법이라고, 역대 일본 정부는 합법이라고 줄곧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한국 정부의 3.6 해법은 누가 봐도 한국 정부가 그동안의 주장을 철회하고 일본 정부의 '식민 지배 합법론'에 굴복했다는 해석을 낳기에 족합니다.

여기서 저는 윤 대통령께 더도 말고 딱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윤 대통령께서는 일제의 조선 식민 지배가 불법으로 이뤄진 조치였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합법으로 이뤄진 것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이번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지만, 어느 기자도 묻지 않고 넘어가기에 제가 대신 질문합니다. 피하지 마시고 꼭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민 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3.6 강제 동원 해법 #윤석열 대통령 #한일관계 #식민 지배 #기시다 일본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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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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