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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주와 10.29 이태원, 동병상련의 시간과 장소

[수산봉수 제주살이] 잊히는 게 두려운 이태원 유가족들 그리고 제주 4.3

등록 2023.03.31 04:49수정 2023.04.05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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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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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5일 제주도 성산읍 키아오라리조트 뒤에서 찍은 동백 울타리. ⓒ 이봉수

 
우리 부부를 홀린 200m 동백 울타리

제주의 겨울 풍경을 대표하는 꽃은 동백이다. 동백을 보러 겨울마다 제주에 오는 이도 많다. 5년 전부터 미디어리터러시스쿨을 설립하려고 우리 부부가 서울에서 2시간 안쪽 거리의 폐교와 펜션을 50군데쯤 보고 다녔는데 딱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결국 2020년 겨울 제주 출신 제자의 소개로 성산읍의 키아오라리조트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데는 동백이 큰 구실을 했다. 200m쯤 되는 동백 울타리의 장관에 반한 것이다. 일단 리조트를 공동경영하다가 서울 집 등을 처분하는 대로 필요한 만큼 땅을 사서 스쿨을 짓기로 했다. 

화성(수원) 신도시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다산 정약용도 후손들을 훈계하는 글에서 '우리나라는 도성(한양)과 시골의 수준 차이가 크다'며 '벼슬길이 끊어지더라도 도성에서 멀리 벗어나 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현대의 '시간 거리'로는 서울에서 역시 2시간이니 스쿨을 제주에 설립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화려하긴 한데 다산초당에서 본 동백은 아니네?

그러나 우리가 반한 제주의 동백은 화려하기 그지없는데도 어딘가 이상했다. 동백꽃이 이처럼 지저분하게 지는 꽃이었나? 22년 전 강진 다산초당 올라가는 길에서 나에게 선명하게 각인된 토종 동백꽃의 인상과는 달랐다. 꽃은 대개 벚꽃처럼 꽃잎이 바람에 날리며 지거나 무궁화처럼 지저분하게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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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2일 카아오라리조트 안쪽에서 찍은 동백 울타리. 위부터 겨울 꽃 동백, 여름 꽃 수국, 봄 꽃 연산홍으로 이뤄진 3단 생울타리에 꽃이 필 때는 더없이 아름답지만 토종이 아닌 동백은 질 때 지저분하다. ⓒ 이봉수

 
그런데 다산초당의 동백은 자기 의지로 자기 목을 뎅겅 자른 것처럼 도도해 보였다. 꽃잎이 다 벌어지기도 전 한창 때 통꽃 그대로 땅이나 물 위에 떨어져 꽃방석을 이뤘다. 수많은 종류의 꽃 가운데 땅이나 물 위에 떨어진 꽃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동백이 유일하지 않을까?

나만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당시 나 자신이 '낙화유수'(落花流水) 같은 처지였으니까. 삼성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불법증여와 자동차산업 진출 등을 줄기차게 비판하다가 <한겨레> 경제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사표를 던지고 실업자가 됐다. 가계를 책임진 사람의 '소신'은 가족의 고난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연봉이 줄어드는 곳으로 계속 직장을 옮겨 다니는 남편에게 아내는 "당신의 연봉에는 반감기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때는 아예 '0원'이 됐다. 


유학을 가려고 교보문고에서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사서 20년도 넘게 놓아버린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마흔일곱 중년의 듣기-말하기 실력은 좀처럼 오르지 않아 일곱 차례나 어학시험을 봐야 했다. 이 무렵 강진에 간 목적이 18년이나 유배생활을 한 다산의 생애에서 용기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니 떨어진 동백꽃이 예사롭게 보일 리가 없었다. 

제주에 흔한 동백은 일본산 애기동백... '4.3 상징' 토종 동백은 왜 외면당할까?

제주에 흔한 동백이 토종 동백이 아니라 일본에서 건너온 애기동백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자생식물 연구가인 이새별씨가 1월에 쓴 <오마이뉴스> 기사 '동백꽃 명소라고 해서 가보니… 솔직히 부끄럽습니다'를 보고 나서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에 들어온 애기동백은 제주와 남해안 일대를 거의 점령해버렸는데 일제는 물러갔지만 애기동백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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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찍은 키아오라리조트의 토종 동백(맨 왼쪽)과 일본산 애기동백(오른쪽 두 그루). 애기동백은 꽃잎이 거의 다 떨어져 바닥에 쌓였는데 토종은 한 송이가 피기 시작했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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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근접촬영한 첫 토종 동백꽃. 토종 동백은 한꺼번에 피고지는 일본산 애기동백만큼 요란하지는 않지만 저마다의 자태는 훨씬 더 곱다. ⓒ 이봉수

 
동백이 4.3항쟁을 상징하는 꽃이 된 것은 그럴 듯하다. 토종 동백이 바람에 낙화하는 모습을 보면 억울하게 죽은 숱한 민중들, 특히 한창 때 스러진 청장년들의 이른 죽음을 생각나게 한다. 극우 광풍에 목이 떨어졌지만 단아한 자태를 유지한 채 눈을 감지 못하고 가해자를 원망하듯 쳐다본다. 

제주에서 애기동백은 1~2월에 다 졌지만 토종 동백은 4.3항쟁 추모기간까지 버틴다. 그럼에도 애기동백을 많이 심은 이유는 한꺼번에 피어나기 때문에 화려함을 좇는 관광객의 취향에 영합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오래 피고지는 토종 동백 한두 그루쯤은 집 울타리 안에 키우며 두고두고 감상한다. 

이태원 희생자 이름 공개가 '패륜'?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을 때 시민언론 <민들레>가 희생자들의 이름을 공개하자,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고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명단을 감추려 했기에 피해자의 이름만이라도 밝힌 것이었지만, 과거에 가해자 가족의 신상까지 다 까발리던 기성언론이 적반하장으로 시비를 건 셈이다. 늦게나마 <오마이뉴스>와 <한겨레>가 개별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과 유가족의 처절한 삶을 조명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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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희 총기난사사건 당시 <워싱턴포스트>는 ‘이방인 세계에서 고립된 소년’이란 제목을 달아 사고의 원인을 근원적인 것에서 찾았다. ⓒ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2007년 발생한 조승희씨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을 예로 들면, 우리 보수언론은 외국 언론과 완전히 상반되는 보도 태도를 보였다. <조선일보>는 조씨 누나의 명문대 학력과 이력까지 공개하며 조씨와 비교했고, <중앙일보>는 "자신만의 내부적 악마 키웠다"면서 개인 문제로 몰고갔다. 이에 견주어 미국에서는 보수신문으로 불리는 <워싱턴포스트>도 '이방인 세계에서 고립된 소년'이라며 미국 사회의 문제로 부각했다. 

당시 이태식 주미대사는 "조승희에게 죽은 사람을 위해 금식기도를 하자"고 말한 반면, 버지니아공대는 조씨를 포함해 33개 추모석을 설치했다. 학생들은 조승희 추모석에 '너를 미워하지 않아, 오히려 가슴이 미어진다' '네가 그렇게도 절실히 필요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슬펐단다' 같은 연민과 반성의 글을 남겼다. 

추모는 그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데 이태원 희생자만은 예외다. 집에서 지내는 제사에도 지방을 써 붙이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닷새 연속 들른 서울광장 합동분향소에는 영정조차 없었다. 이태원 참사 명단은 쉬쉬하면서 24일 '서해 수호의 날' 행사에서 윤 대통령은 55용사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강제동원 제3자 변제와 독도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제대로 이름도 불리지 못한 채 잊히고 있다. 그게 안타까운 나머지 유가족들은 27일부터 '10.29 진실버스'를 타고 '사회적 재난'의 진상을 알리려 나섰다. 오는 4월 3일에는 제주시청 앞에서 열리는 '4.3민중항쟁 75주년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한다. 4.3 제주와 10.29 이태원은 동병상련의 시간과 장소다.  

혐오에 기반한 정치는 파시즘의 전조

지금 제주도에는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라는 내용이 적힌 현수막들이 나부끼고 있다. 이름에 주로 '자유'가 들어간 정당과 단체가 내건 것들이다. 최고 득표로 당선된 여당 최고위원과 정부 산하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등도 4.3과 5.18 혐오 발언을 수시로 했다. 집권정당과 정부 당국자가 혐오 표현을 공공연히 하거나 방조하는 일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거의 사라졌던 현상이다. 

이들은 제주의 남로당 관련자가 4.3사건 촉발에 기여한 적은 있지만 북한이나 남로당 지도부의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물론 4.3사건 과잉 진압의 참혹함은 애써 외면한다. 4.3사건을 <순이삼촌> 등 소설로 맨 먼저 고발했다가 고초를 치른 현기영 작가는 <해룡 이야기>에서 이렇게 썼다. 

"통틀어 이백도 안 되는 무장폭도를 진압한다고 온 섬을 불지르다니. 그야말로 모기를 향해 칼을 빼어든 격이었다. 그래서 이백을 훨씬 넘어 삼만이 죽었다."

예나 지금이나 혐오에 기반한 정치는 파시즘의 전조다. 핏빛 동백꽃은 지고 노란 유채꽃이 비극의 현장을 뒤덮고 있는 이 계절에 제주를 자기 정치에 이용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동백꽃이 진다 하여 꽃다운 이름마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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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리스쿨을 지을 땅에 유채꽃을 심어 유채나물도 채취하고 꽃도 즐기지만, 아름다운 제주 땅 곳곳에는 4.3의 한이 서려 있다. ⓒ 이봉수

 
덧붙이는 글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렸습니다.
#이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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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 키아오라리조트 공동대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 원장,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칼럼니스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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