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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족'이라는 병을 앓는다

드라마 <일타스캔들>로 보는 새로운 가족의 의미

23.03.30 14:38최종업데이트23.03.3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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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볼 국가대표 출신 남행선(전도연)은 엄마다. 17살의 고2가 된 딸아이를 노심초사 양육하는 보호자다. 남행선은 엄마지만 결혼한 적이 없는 사실상 미혼모다. 미혼모라는 소문이 염려스러워 자신이 하는 '국가대표 반찬가게'의 손님들에게는 아이의 아빠가 해외에서 사업 중이라 같이 살지 않는다고 둘러대기 바쁘다.

한국의 어느 도시의 모습이 다 비슷하겠지만, 언제나 아이들은 입시라는 성공, 아니 생존의 통과의례를 힘겹게 보내고 있다. 요즘 세대가 더 힘들다, 이전 세대가 더 힘들다는 상대 평가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겠지만, 지금의 입시 지옥은 그야말로 '연좌제'다. '편모슬하'라는 딱지를 딸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아 남행선도 그 입시 지옥의 열차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그 첫 번째 관문이 인근에서 '일타 강사'로 알려진 수학 강사 최치열(정경호)의 수업을 등록하는 일이다. 새벽에 알람을 맞추고 선착순 등록을 위해 국대의 근성으로 달리기를 시작한다. 남행선은 선착순 안에 들어 스스로 목표하는 '열혈 수험생 맘'이 될 수 있을까.
 

▲ tvN 드라마 일타스캔들 입시 지옥이 아닌 가족이라는 굴레를 말하는 드라마 ⓒ tvN

 
드라마 <일타 스캔들>의 장르는 예고편이 나올 때만 해도 로맨틱 코미디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단편적인 웃음과 사랑 코드만 존재하지 않았다. 입체적인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최근 드라마 제작과 시장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드라마의 소비 경향만 바뀐 것이 아니다. 제작의 시스템이 변하고 그 시스템의 영향으로 장르마저 '세계화'되고 있다. '미드'라는 장르가 한국에 본격 상륙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불법 다운로드'라는 P2P 사이트의 창궐 덕이었다. 그곳에서 온갖 미국산 드라마를 다운받아 드라마의 신세계를 접하며, 한국 드라마의 후진성을 경험하였다. 제작의 환경이야 경제 규모의 격차라 이해가 가는 부분이지만, 가장 큰 차이는 '장르의 다양함'에 있었다.

당시 미드의 충격은 하이브리드 된 장르의 융합에서 크게 다가왔다. 한국 케이블 방송에서도 방영하게 된 <위기의 주부들>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유머의 코드가 있고 시트콤적인 인물 관계도 있지만, 무엇보다 살인사건이 숨어든 미스터리 스릴러가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 반면 한국의 20세기 드라마들은 전형적이었다. 주로 신데렐라 스토리, 캔디 스토리 같은 온갖 격변을 견디어 내는 여주의 이야기이거나, 배신과 야합으로 점철된 로맨스도 아닌 복수극이 만연하였다. 다행인지 역사의 이야기인 사극과 시대극이 이따금 그 틈을 메울 뿐이었다. 그런 중에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홍수는 드라마 콘텐츠도 결국 '글로벌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지금의 'K-드라마'라는 추세가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
 

▲ 미국abc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 포스터 여러 장르가 혼합된 위기의 주부들은 '재미있는 드라마'의 전형이다. ⓒ ABC

 
<일타 스캔들>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조류의 드라마로 잘 만들어진 구성이다. 주된 이야기는 미혼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싱글도 아닌 남행선과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오로지 일과 성공만 좇았던 일타 강사 최치열의 로맨스다. '스캔들'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도 이 둘의 사랑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순수 무결하다. 그런 의미에서 '스캔들'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사랑을 바라보는 관찰자들의 확증된 편향에 대한 반어적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드라마의 주요한 이야기 전개는 '살인 사건'과 그 해결에 있다. 거듭되는 쇠구슬로 인한 의문사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안 드라마의 작화는 입시에 실패한 은둔형 외톨이 이희재(김태정)를 범인으로 몰고 가지만, 결국 그 추론에 쫓아가던 시청자들은 반전의 결말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단지 장르적인 구성이 전부는 아니다. 이야기의 중심이 된 배경은 '입시'라는 대한민국 청소년과 그 가족들의 아픈 현실이 담겨 있다. 한편에서 너무 낭만적으로 입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런저런 거대 담론이 오고 가는 콘텐츠 속에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사실적으로 언급하였다는 것으로 유의미하다. 그리고 자잘한 사회와 시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행선의 남동생 재우(오의식)의 이야기, 행선은 사연이라도 있지만, 덩달아 미혼도 아닌 비혼도 아닌 삶을 살고 있는 행선의 절친 영주(이봉련)의 분투기, 그리고 딸아이 남해이(노윤서)의 주변에 있는 예비 수험생들의 가족의 나름 나름한 불행들. 모두가 자잘하고 보잘것없는 이야기 같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사건과 사고가 연속된다. 그중 드라마가 완결되고 나서 남는 이야기는 '가족'이 아닐까 싶다.

'가족'이라는 굴레

가족은 개념적으로나 마음먹음으로나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다. 실제 사이가 좋든 좋지 않든 가족은 서로 마음의 거리가 가까울 수밖에 없다. 가족은 대체로 혈연으로 이어져 있고, 나를 닮은 존재이며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나를 도와줄 최우선이자 최후의 존재라고 여기기 마련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족이라는 존재는 늘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는 이유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고민스럽고 괴로운 일도 따지고 보면 가족 때문일 때가 많다. 하다못해 정신의학과나 심리 상담소에 찾는 사람들의 고민 중 가장 많은 사례가 바로 '가족' 때문이라고 한다.

이유는 한 가지다. 바로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다시 해서 '거기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AI가 나타나 모든 것을 바꾸는 날이 온다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모두 죽게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든 싫든 누구나 가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이나 영화, 드라마 등의 소재로 '가족'은 끊임없이 등장하는지도 모른다. 문학은 인간의 삶과 일상에서 본질이 무엇인지, 불변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라는 종(種)의 근원적 조건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과 희극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일종의 운명을 다시 작화하는 것이 문학이고 영화가 된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가족이 운명과도 같다면 그것은 안식처일까 굴레일까.

'가족 신화(Family Myth)'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가족 간의 유대와 사랑을 절대시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이는 가족 전체가 서로 믿을 것이라고 여기는 허구의 신화다. 어릴 때부터 가족은 소중한 것이고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를 위해 조건 없이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배운다.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는지 형제들이 얼마나 조건 없이 서로를 위해 양보 배려하는지를 주입식으로 학습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상은 이상이다. 이상은 현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행하게도 이상적인 가족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각자가 불완전한 존재다. 그 불완전한 인간이 모인 일차적인 집단인 가족이 불완전한 것은 당연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건은 차고 넘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부지기수다. 형제간에 유산과 이권 때문에 칼부림을 하기도 한다. 100만 개의 가족이 있다면, 그 가족의 불완전한 불행은 100만 가지는 무조건 넘는 일이다. 굳이 그 흔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서설을 거들지 않아도 행복한 가족의 이유는 단순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그 이유가 다 나름 나름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학습으로 배운 이상과 우리가 처한 현실의 격차는 늘 문제를 만든다.

사람이 모여 생활한다면 무조건 누군가는 주도하는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그 역할이 '가장'의 역할이었다. 반드시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그 상황에 맞추어 따라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가족이 현실에서 존재하는 실체의 모습이다. 현실에서 서열이나 기타 권력관계가 높은 사람이 의견과 상황을 주도하고, 그 외의 가족들은 그저 희생하고 따라가는 경우가 있다. 이는 가족의 기능이 역행하는 일이다. 이를 '역기능 가족'이라고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이런 역기능 가족의 모습이 많다.

역기능 가족 중에서도 특히 밀착되어도 너무 밀착된 역기능 가족이 많다. 가족 전체의 욕구와 바람을 해소하고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가족 일부의 욕구를 위하는 가족의 관계가 역기능 가족의 흔한 모습이다. 이런 가족의 더 큰 문제는 '가족에 대한 충성심'의 한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각 구성원 개인 각자의 삶이 가족의 삶과는 구분되고 다르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관성을 지닌다. 이런 역기능 가족의 문제는 가족 간의 '거리'가 확보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 거리가 확보되지 않은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해결은 '권력 서열'에 의해 결정되어 합리적인 결과가 도출되기 어렵게 된다.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하는 데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매번 따르지 않게 되면 희생하는 가족의 구성원은 오히려 '죄책감'을 갖게 되는데, 이를 Scapegoat-희생양이라고 말한다. 가족의 결정은 무조건 적이고 절대적으로 옳은 일인데, 내가 이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죄책감에 빠지게 된다. 가족의 역동 관계 속에서 무언가 희생하고 노력함에도 늘 죄인이 된다. 모든 부분에서 양보하지만 결국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받는다. 스스로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이 죄책감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일이다. 가족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자해를 유발하는 굴레가 된다.
   
가족은 서로의 거리를 유지할 때 유지된다.

드라마 <일타 스캔들>에서 '입시 지옥', '성공 주의의 폐해' 같은 거대 담론을 찾는다면 말리는 마음이다. 사회적인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그냥 <더 글로리>를 보고 자의적인 확대 해석을 하면 된다. <일타 스캔들>에서의 진짜 스캔들은 사연 넘치는 로맨스도 아니고, 아리송한 연쇄 살인 사건도 아니다. 이 드라마에서의 진짜 스캔들은 기존의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용감한 재해석이다.

행선과 해이의 촌수는 3촌이다. 이모와 조카 사이가 모녀 사이로 설정된 것은 그저 사회와 주변의 인식만이 아니었다. 결국 친모가 나타났어도 그 모든 구성원이 인정하고 지지하는 관계는 엄마 행선과 딸 해이라는 관계 설정이었다. 한국의 가족 간의 관계를 '촌수'로 이야기한다. 이 '촌수'는 어쩌면 가족 간의 거리를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가족관의 관계는 손가락 한 마디(촌)만큼의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촌수가 없는 유일한 관계는 부부뿐이다.
 

▲ 행선의 가족 행선 모녀의 관계만이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 아니다. 행선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모습은 다채로운 조화다. ⓒ vN


행선 모녀의 관계만이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 아니다. 행선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모습은 다채로운 조화다. 다 큰 남동생이 가족의 일원으로 굳건하다. 그의 핸디캡(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이 아니다. 누나와 조카가 필요로 하는 필수적인 구성원이기 때문에 가족으로 존재한다. 하루 종일 가게를 운영하는 누나에게는 꼭 필요한 조력자이고, 집안에 든든함을 줄 수 있는 남성이며, 모녀간의 크고 작은 갈등을 조정할 완충재가 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행선 친구 영주는 어떤가. 그저 옆에 있어 주는 절친을 떠나 결국 가족의 구성원이 되고 마는 그녀는 이미 가족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관계가 가장 유대관계가 강한 가족이 되었다. 이 가족을 둘러싼 다른 가족들의 모습은 그 반대로 그려진다.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이지만 그 외형이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 잘나가는 변호사 부모를 두었지만, 밥상에서 정다운 이야기는 기대하기 힘든 위태로움이 있고, 딸아이의 입시 성공을 위해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보지만, 정작 자신 남편의 외도는 현장을 목격하고 나서야 인지하게 되는 인플루언서 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행선이 사랑에 빠지는 치열은 어떤 모습인가? '1조 원 가치'의 1등 유명 강사지만 집은 늘 싸늘한 어둠 속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게워 내기를 일상으로 보낸다. 그를 병적으로 흠모하던 비서 동희(신재하)의 가족은 10년 전 가슴 아픈 일들로 해체된 지 오래다. 그 반대에 행선의 헌신과 선의로 일군 진짜 가족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가족은 더 빛나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가족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가족이라는 병>은 유명 아나운서 출신 작가 시모주 아키코(下重曉子·79)가 출간 한 달 만에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렸던 책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단란한 가족'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저자는 이것을 종교에 비유한다. '단란한 가족'이라는 것은 아무리 기도해도 살아생전 맞이할 수 없는 휴거와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가족은 깨져선 안 되는 신성불가침 영역에 들어선 지 오래다. 이 신성불가침의 판타지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병폐를 양산해낸다. 존속살인, 사기, 방치, 학대 등이 우리 옆에서 벌어져도 며칠씩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라는 신뢰는 바이러스처럼 퍼져 범죄의 씨앗을 틔운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하지만, 사실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 <가족이라는 병> 중에서 -
 

▲ 시모주 아키코 <가족이라는 병> 이런 이야기들을 지난 시간 속에서 지인들에게 공공연히 이야기하면서 이 책을 권하였다.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이 ‘우리 가족만큼은 절대 그런 가족이란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답변이 돌아온다. ⓒ 알라딘

 

이런 이야기들을 지난 시간 속에서 지인들에게 공공연히 이야기하면서 이 책을 권하였다.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이 '우리 가족만큼은 절대 그런 가족이란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답변이 돌아온다. 그 돌아온 답변을 마주하고 있자니 복잡하면서 다른 말을 꺼내기도 미묘하다. 그런데도 단란함과 화목함이라는 강제 상징이 병폐를 만들어 내는 현실은 진실에 가깝다. 언젠가 저자처럼 일종의 고해성사로 이런 병폐를 이야기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모주 아키코는 신랄하게 이 병이 낫기 위해 변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남편 얘기를 마치면 자식 얘기로 주제를 갈아타는 사람은 재미없다. 어차피 이야기 내용은 가족 자랑이거나 불평 둘 중 하나일 뿐이니까. 이 관점에 대한 동조도 저마다일 것이다. 그런데도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은 일관적이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은 서로에게 기대지 말고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와닿는다. 결혼, 출산, 양육, 승진 등 가족의 자랑거리가 될 허울의 강요를 벗어 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억지로 손 잡혀간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는 일은 '행복을 강매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다.

결국 개인주의와 가족주의라는 가치 중에서 개인주의를 택해야만 가족이라는 병이 낫는다는 말에 각자의 관점이 나뉠 수 있다. 가족 간이라도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라는 이유는 한 가지다. 그 가족에게 나도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조망하여 관계를 생각하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을 알아 가는 일이다. '가족'이라는 껍데기를 벗기고 나면 사회에서 존재하는 각각의 존재가 된다. 서로가 주체성을 가진 존중받을 남남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가족의 정립은 그런 생각이 유효하다. 가족이라는 병이 깊어 진다면, 우선 그 가족들의 각자를 인정해야 하고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이 된다는 이야기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는 무엇일까?

2018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을 떠 올리게 되었다. <어느 가족>의 원제는, 도둑질하면서 살아가는 가족이라는 의미의 '만비키 가족'이다. 언뜻 보기에는 화목하고 다정해 보이는 6명의 가족이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참 복잡하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집을 나간 후 외롭게 살아가던 하츠에는 낯선 타인들을 집에 들인다. 노부요는 가정폭력을 일삼던 남편을 죽이고 내연남인 오사무와 함께 들어오고, 가출한 후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아키도 합류했다. 쇼타는 빠칭코 주차장에 버려졌던 아이다. 그리고 친부모에게 학대당했던 유리까지. 그들은 피를 나누지도 않았고 법적으로 묶인 가족도 아니다. 그들은 미래를 공유하거나 함께 그리지 않는다. 가족처럼 사는 이유는 하츠에의 집, 그리고 연금이 필요할 뿐이다.

영화는 2016년 일본에서 일어난 연금사기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만이 아니라 복지 연금 제도가 잘 되어 있는 유럽 등에서도 연금사기는 종종 일어난다. 노인의 연금에 의지해 일가족이 살아가다가 임종을 맞게 되면, 죽음을 숨기고 계속 연금을 받아내는 사기가 만연한 유형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사기가 발각되었을 때 한 가족은 '죽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라는 터무니없는 변명을 한 적이 있다. 분명히 변명인데, 이 변명에서 그럴듯한 이야기로 진실과 사실 사이의 이면을 찾아낸 이야기가 <어느 가족>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 <아무도 모른다>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하이브리드 판 같이 보인다. <아무도 모른다>는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방치된 남매의 실화를 이야기로 만들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아이가 뒤바뀐 것도 모르고 살다가 6년 만에 사실을 알게 되는 두 가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 영화 <어느 가족>의 한장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은 자유 의지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임무 할당이나 마찬가지다. <어느 가족>에서의 가족의 모습을 평단이나 기사에서 ‘유사 가족’이라고 칭하곤 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사이비 가족’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도덕적 윤리 관념도 부족하고,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경쟁력도 한참 모자란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만큼은 풍만해 보인다. ⓒ Netflix

 
앞에 말한 감독의 영화에서 가족이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가장 이해하기 힘든 관계를 말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은 자유 의지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임무 할당이나 마찬가지다. <어느 가족>에서의 가족의 모습을 평단이나 기사에서 '유사 가족'이라고 칭하곤 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사이비 가족'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도덕적 윤리 관념도 부족하고,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경쟁력도 한참 모자란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만큼은 풍만해 보인다.

우리는 혈연으로 뭉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살면서 관계가 삐걱거릴 때마다 고뇌에 빠진다. 대부분 자책감을 가지고 의무감이라는 플라시보 위약을 먹고 그저 버티어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가족은 단지 피가 섞이고 법이 묶은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아 내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의 집합체다.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관계. 그것을 유사 가족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그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차라리 변화하는 시대에 다양한 가족의 한 형태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명칭이든 무슨 설명인들 상관없이 무엇이든 좋다. 0.78이라는 순수 출생률이 말해주는 것은 단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허물어져 해체되고도 완전히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다. 기존의 가족 개념을 유지하던 사회의 인식과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의미다. '가족끼리 왜 이래?'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세상이 변해서다. 세상이 변했으니 가족도 바뀌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가족과 의절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들의 지갑이었고, 방패였던 존재가 흔들리는 모습이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싶다. 가장 위태롭고 외로울 때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곁에 없었다. 대신 아주 뜻밖의 존재들이 유대를 이루고 약한 연대를 만들었다. 이제는 그런 유대와 연대의 관계를 새로운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내게도 또 다른 가족이 생겼다'라는 일종의 따뜻함이 번질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나와 함께 이 깊은 시간을 건너는 사람이 가족이니까. 
일타스캔들 드라마 리뷰 전도연 정경호 가족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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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IT컴퍼니(IBM, NTT)에서 비즈니스 디벨로퍼로 퇴직 ; 바람들어 사랑하는 아내 여니와 잘 늙어 가는 백수를 꿈꾸는 영화와 야구 좋아라하는 아저씨의 끄적임.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일상에 대한 글을 나눕니다. <원순씨를 부탁해>의 저자. 다수의 독립잡지에 영화, 드라마 리뷰, 비평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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