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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원' 하려면 작성하는 서류... 거짓 서명을 했습니다

[어느 노동자의 고백] 근로기준법 제63조 3호 적용제외 '감시적 근로자'의 하루

등록 2023.03.31 04:51수정 2023.03.3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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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시적 근로자'다. 보통의 용어로 나의 직업은 '경비원'이다. 최근까지 아파트 경비원을 하다가 지금은 서울 시내의 빌딩에서 경비원 일을 하고 있다.

나를 채용한 용역회사에 따르면 "일반적 업무보다 노동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이 정한 근로시간, 휴게와 휴일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아도 된단다. 정확히 말하면 근로계약서에 앞서 서명해야 하는 '동의서' 내용이 그렇다. 아파트 또는 빌딩, 공공기관이나 사기업 할 것 없이 경비원이라는 명칭이 붙는 노동자라면 기본적으로 모두 해당한단다. 어쨌든 나는 동의서에 서명했다.

근로기준법 밖 노동자, '경비원'의 하루
 

감시적 근로자 (확인서/동의서) 경비원으로 취업하려면 동의서에 서명해야만 한다. 근로계약은 그 다음이다. 동의서에는 근로기준법 제61조 제3호 적용제외 대상이라고 돼 있지만, 이는 문서의 오류다. 정확히는 근로기준법 제63조 3호 적용제외 대상이다. ⓒ 김상봉


어찌됐든 동의를 했으니 나의 일과 내용을 간략히 짚어보려고 한다.

주간 근무를 하는 날이면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새벽 6시께 집을 나선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일터에 도착하면 보통 오전 7시 30분이다. 경비복으로 갈아입고 간단한 조회를 마친 후 근무 장소에 가서 전날부터 야간근무 한 경비원과 교대하는 시간은 오전 7시 55분. 지각이나 결근을 하지 않고, 무사히 근무를 시작하게 됐으니 한숨 놓인다.

서류상 나는 "일반적 업무보다 노동 강도가 약"하다는 감시적 근로자다. 서류엔 이런 문구도 있다. "잠시도 감시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고도의 정신적 긴장이 요구되지는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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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길 정류장 아직은 쌀쌀한 새벽 6시 출근 길 ⓒ 김상봉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또 누르고... '중요한 분'을 찾고 또 찾고

본격적인 출근 시간이면 빌딩에 입주해 있는 기업의 직원들이 정문과 후문으로 밀물처럼 들어오기 시작한다. 5대의 엘리베이터는 사람들을 꽉 채우고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1층 로비의 경비원들은 쉴 새 없이 상향 버튼을 눌러 위로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다시 1층으로 돌아오게 한다. 1분 1초가 아쉬운 직원들이 기다리는 시간을 아껴 빨리 올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역시 "일반적 업무보다 노동 강도가 약"한 감시적 근로다.

그런가 하면 건물로 들어오는 많은 사람 틈에서 '중요한 분'들을 발견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이 빠지게 살핀다. 중요 인물이 들어서면 얼른 엘리베이터로 다가가 대기하다가 버튼을 누르고 정중한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천 명의 사람이 몰려 들어오는 시간, 일일이 눈을 마주하며 고개 숙여 인사하는 반복된 행위에 마스크 속 입이 마르고 목이 잠기거나 허리가 뻐근하긴 해도 "잠시도 감시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고도의 정신적 긴장이 요구되지 않는" 감시적 근로자다. 

오전 11시가 지나면 점심을 먹으려는 직원들이 하나둘 내려오기 시작한다. 30여 분동안 북새통을 이룬다. 1층에 있는 식당에는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아서 보안이나 안전을 위해 더욱 세심한 눈으로 근무한다. 감시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서 법 적용에서 제외한다는 근로기준법의 규정이 뭔소린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근무 시간 내내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는 것은 아니니 나는 "잠시도 감시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고도의 정신적 긴장이 요구되지 않는" 감시적 근로자다.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직원과 방문객들, 서류와 물건을 가지고 오는 택배 기사, 간식이나 식사를 배달하는 퀵서비스 기사. 이들 중 택배와 퀵서비스는 건물 내 사무실로 들어갈 수 없다. '왜 들어가면 안 되냐'는 기사들, '바빠서 1층까지 내려올 수 없다'는 직원들의 항의까지 양측으로부터 받기 일쑤다.

오후 5시가 지나면서부터 퇴근하는 직원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오후 5시 55분이 되면 야간 근무자가 출근해 교대하면서 나의 주간 근무는 끝난다. 퇴근 후 만원 버스에 의지해 귀가한 나는 "일반적 업무보다 노동 강도가 약"하고 "잠시도 감시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고도의 정신적 긴장이 요구되지 않는" 상태로 하루를 마친 감시적 근로자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 등 적용 제외' 노동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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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길 풍경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 중 어둠이 내려앉는 차창 밖으로 겨우 보이는 북한산과 한강이 심신의 위안을 준다. ⓒ 김상봉

 
고백하건대, 사실 내가 하는 일은 적지 않게 고달프고 힘들다. 아파트 경비원의 경우 24시간 근무 관행이 표준처럼 굳어 있다. 24시간 동안 집을 나와 경비초소를 거점으로 청소와 순찰, 고지서 전달, 광고지 제거, 안내문 게시, 일몰 시각에 점등, 일출 시각 소등은 물론 주민에게 친절한 미소로 인사하기 등의 업무가 어찌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

근무지나 근무 형태에 따라 수월하거나 힘든 경비 업무로 나눌 수는 있겠지만, 경비원이라는 직업은 결국 총량으로는 비슷하게 힘든 노동강도를 지니고 있다. 

어쨌든 나는 감시적 근로자 동의서와 근로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채용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든 일인 줄 알면서도 '거짓 서명'한 이 행위 자체는 한편으로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그러니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이상한 동의서를 내밀며 서명을 요구한 사용자가 아니다. '감시적 근로자'라는 희한한 규정을 만든 국회도 아니며, 이를 묵인하고 방조하면서 편파적인 심판 노릇을 하는 고용노동부도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일자리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서명을 한 나 자신 말이다.
#경비원 #감시적근로자 #비정규직 #감단근로자 #아파트경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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