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흑인 여성 작가가 기억하는 서로 다른 두 어머니

책 <자미>와 <엄마, 나 그리고 엄마>를 통해 본 다른 '엄마됨'

등록 2023.03.31 15:11수정 2023.03.3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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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자미> ⓒ 디플롯


두 흑인 여성의 자서전적 에세이를 읽었다. 오드리 로드의 <자미>와 마야 안젤루의 <엄마, 나 그리고 엄마>다. 두 사람은 흑인이라는 점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나는 이들을 '흑인'이라는 괄호 안에 묶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지는 호되게 깨져야 한다.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으며 이미 오드리 로드에게 흠뻑 반했었는데, <자미>도 좋았다. 자미는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함께 일하는 여성들을 부르는 캐리아쿠식 이름이다." 자매애에 대한 그의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표현이다. 마야 안젤루는 매우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흑인 여성으로, 시인이자 가수이자 배우였다. <엄마, 나 그리고 엄마>는 말 그대로 엄마와 자신의 '엄마됨'을 돌아보고 여든에 쓴 회고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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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엄마, 나 그리고 엄마> ⓒ 문학동네


오드리와 마야를 거론했지만, 나는 오히려 이들이 증언하는 어머니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다. 이들 어머니들 역시 흑인이지만 동일한 흑인으로 정체할 수 없다. 아이들을 강인하게 키우는 양육 스타일은 비슷해도, 각기 다른 사람이기에 아이들도 다르게 키웠다.


두 여성 다 인종차별이 심한 세상을 살아내느라 백인의 몇 배로 강단 있게 살아내야 했지만, 일정 시간부터 삶의 스타일과 질이 달라졌다. 성인이 될 무렵까지 오드리네는 여전히 쪼들렸지만, 마야의 어머니 비비안은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삶이 윤택해지면 마음이 넉넉해지는 법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해야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집에서 자애가 넘치기는 쉽지 않다.

오드리가 어머니 린다를 "어린 내 눈에 어머니는 분명 여성이 아닌 누군가였다"고 기억할 만큼 굉장한 여장부였다. 덩치가 컸고 목소리는 우렁우렁했다. 압도적 카리스마로 딸 셋을 엄히 키웠다. 평생 노동에 시달렸기에 딸들에게 짜증을 부릴 때도 잦았다. 딸들에게 사랑을 넘치게 표현하기엔 그는 너무 피곤했다.

마야 엄마 비비안은 이혼 후 마야 남매를 키우지 못하다가 마야가 열세 살이 되던 해 다시 모여 살게 되었다. 마야는 엄마에 대한 서먹함으로 한동안 엄마를 'Lady'라 칭했다. 비비안은 대담한 여자였다. 도박장을 운영하면서도 남자나 폭력에 굴복하는 법이 없었다.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모리배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터득하고 있었다. 그의 백엔 항상 권총이 들어 있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켜주지 못한 엄마 비비안은 마야에게 헌신했다. 일하면서도 아이들을 지극히 보살폈다. 그랬어도 마야가 열일곱에 미혼모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마야는 성적 호기심으로 백인 남자와 관계를 맺고 덜컥 임신한다. 물론 그 백인은 책임질 생각이 없다. 보통 엄마라면 대노할 일이지만, 비비안은 별일 아닌 것처럼 "너하고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예쁜 아이가 생기겠"다며 딸의 출산을 적극적으로 돕고 나선다.

오드리도 마야도 젊은 시절 청춘을 보내느라 분주했다. 오드리는 학교에서 이미 인종차별을 겪고 있었고, 자신의 심각한 근시와 땅딸한 체구가 또래들에게 호감 가는 조건이 아니라는 데 적잖이 위축되어 있었다. 총명한 오드리가 자아를 키워갈수록 엄마는 딸 단속을 더욱 엄격히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겪는 흑인으로서의 난감함을 엄마에게 토로하고 싶었지만, 엄마는 "인종차별을 개인적인 괴로움으로 취급했다." 약자의 방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과 가사노동을 양립하고 애들까지 보살펴야 하는 그로서는 늘상 마주치는 흑인을 향한 조롱 섞인 시선과 욕설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머리가 굵어지는 오드리에게 엄마는 더 이상 큰 세상이 아니었다. "가부장의 도구로 가부장의 집을 부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고등학교를 마친 뒤 독립한다. 오드리는 엄마의 감시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지만, 혹독한 가난을 직면해야 했다.

마야는 아들 가이와 살기 위해 독립한다. 엄마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살아가려는 딸을 비비안은 자랑스러워 한다. 가이를 키우기 위해 투잡을 뛰어도 월세를 내고 나면 생활비는 언제나 부족했다. 비비안은 가난한 모자를 주말이면 불러 배불리 먹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들을 키우며 마야는 비로소 엄마를 받아들인다. 더 이상 엄마를 'Lady'라 부르지 않게 되었다.

마야는 재능이 많았다.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글이면 글, 못 하는 게 없었다. 이 모든 도전에 거주지를 떠나야 할 때조차, 비비안은 마야의 전적인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손자를 보살펴주고 딸이 원하면 어디든(한걸음에 미국에서 덴마크까지) 달려가서 마야의 든든한 보호막임을 입증했다. 마야를 꺼리던 사람들조차 비비안의 보호막 안에서 양순해졌다. 마야는 이를, '엄마됨'이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사랑해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묘하고 비현실적인 중간자 역할"을 해내는 것이라고 회상했다.

나는 이 헌신이 딸인 입장에선 부럽기도 했지만, 엄마인 입장에선 벅차게 다가왔다. 저렇게까지? 나이 마흔에 자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엄마를 덴마크까지 불러들인다고? 비비안의 헌신은 자발적이었겠지만, 열세 살까지 딸을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크게 반영되었을 것이다.

비비안은 마야를 죽음에 이를 정도로 때린 남자를 죽이라고 총을 건네는 엄마다. 총을 건네며 뒷일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약속한다. 물론 마야는 총을 쏘지 않았지만 비비안의 다짐은 허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눈에는 더 큰 눈, 이에는 더 쎈 이'로 되갚아 주는 게 비비안이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짱 두둑한 엄마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의 대담함에 기함했다. 차별을 공기처럼 겪고 눈 깜박하면 자기 밥그릇을 빼앗기는 전쟁터 같은 삶을 사는 흑인 엄마에게 총을 주며 복수하라는 처방은 우발적인 일이 아니었다. 문득 자신의 아이가 자신처럼 비참한 노예로 사는 걸 막기 위해 딸을 살해한 한 흑인 엄마(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의 배경이 된 실제 사건)가 떠올랐다. 노예 대물림을 끊으려고 딸을 죽인 흑인 노예 엄마에서, 자신을 죽을 만큼 때린 놈을 죽이라고 총을 건네는 흑인 엄마로의 진화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마야가 비비안에게 끊임없는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면 오드리는 그렇지 못했다. 오드리는 줄곧 엄마와 불화했다. 린다는 성인이 된 딸의 어리광을 들어주기 위해 따뜻한 밥을 준비하는 그런 엄마가 아니었다. 뼈가 닳도록 일해 키우고 교육시킨 것만으로도 엄마 일을 다 했다고 믿는 사람이다. 잔소리와 다그침이 훈육의 방식이었고 그는 자신의 방식을 딸과 타협하지 않았다. 불화했기에 자애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린다의 '엄마됨'이 완벽한 비비안의 모성에 비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비안의 모성은 보통의 엄마들에게 도달할 수 없는 어머니의 상을 세움으로써 뒤따르는 엄마들을 숨 막히게 만든다. 이제는 딸이 아닌 엄마로 살다 보니 비비안처럼 사는 일이 얼마나 가혹한지 깨닫게 된다.

삐딱한 엄마인 내 눈엔, '흑인이면서도' 저토록 훌륭한 사람이(그의 얼굴이 25센트 짜리 주화에 새겨졌고, 흑인 최초로 대통령 자유 메달을 받았다) 된 데는 헌신적 모성이 있었다고 재우치려 드는 방식이 불편하다.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할 사회적 방안은 뒤로하고,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는 모성을 슬그머니 앞세우는 성공신화가 거북하다.

나는 오히려 오드리와 불화했던 린다의 '엄마됨'이(다 잘했달 수는 없지만) 더 마음에 남았다. 오드리도 후에 깨달았다. 그토록 불화했던 엄마가 결국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완성시킨 바탕이었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은이), 송섬별 (옮긴이),
디플롯, 2023


엄마, 나 그리고 엄마

마야 안젤루 (지은이), 이은선 (옮긴이),
문학동네, 2016


#자미 #엄마, 나 그리고 엄마 #오드리 로드 #마야 안젤루 #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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