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31 12:00최종 업데이트 23.03.3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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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 74회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한 윤석열 당선인이 추념사를 하고 있다. 2022.4.3 ⓒ 인수위사진취재단

 
윤석열 정권은 일본에 했던 말들은 잘 지키는 반면, 국민들에게 했던 약속은 잘 지키지 않고 있다. 제주 4·3에 대해 굳게 언약한 것을 나 몰라라 하는 태도마저 나타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작년에 제주 4·3 추념식에 참석해 "4·3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온전한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언약했지만, 지금은 태도가 달라져 있다. '일본과의 관계나 미국 방문 일정 등으로 인해 업무가 바빠서 금년도 추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할 수 없다'고 제주도에 통보한 사실이 지난 15일 보도됐다. 거기다가 국민의힘 지도부의 추념식 참석 여하도 현재까지 불투명하다.


윤 대통령은 작년 추념식 때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4·3을 기억하는 바로 우리의 책임이며, 화해와 상생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입니다"라고 발언했다. 아픔을 치유하는 게 우리의 책임이라면, 아픈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찾아보고 돌봐야 한다. 그런데도 일본 등과의 관계로 인한 업무 증가를 이유로 4·3 참석을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국회에서 열린 "4·3은 공산폭동" 세미나

4·3에 대한 국민의힘 정권의 태도가 의심스럽다는 점은 제75주년 추념식을 코앞에 둔 3월 30일에 4·3을 모독하는 세미나가 국회에서 열린 사실로도 느낄 수 있다. '지금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라는 타이틀로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개최된 '제주 4·3사건 재조명 세미나'에 국민의힘 의원들이 참석했고 축사까지 한 의원도 있다.

제주4·3사건 재정립 시민연대,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교수모임, 서울대 트루스포럼이 공동 주최한 이 행사에서 국민의힘 서병수 의원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까지 해가며 세미나를 축하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사단법인 제주4·3범국민위원회 관계자가 30일 저녁에 제공해준 자료집에 따르면, 서병수 의원은 주최 측에 감사를 표하면서 문제적 인물을 거명했다. '김일성주의자들이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을 움직였다'는 등의 극우적 발언으로 인해 지난 2월 24일 진실화해위원 선출을 위한 국회 표결에서 부결된 이제봉 울산대 교수 등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은 윤석열 정부와 함께 이념 갈등으로 얼룩진 슬픈 역사를 뛰어넘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보편적 가치가 바로 서는 정상 국가를 만드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축사를 마쳤다.

유튜브에 올라온 세미나 동영상에 따르면, 국민의힘 최재형·박덕흠·김학용 의원도 내빈으로 소개됐다. 그런 뒤에 발표된 내용들을 들어보면 '슬픈 역사를 뛰어넘겠다'는 축사가 어떤 의미인지 절로 느껴지게 된다.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인 박인환 변호사는 '역사왜곡을 위한 법이념의 전개 과정-제주 4·3사건을 중심으로'라는 발표에서 4·3을 공산주의 폭동으로 규정했다. 자료집을 통해 "1948.5.10 제헌의원 선거를 저지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찬동·지지하기 위하여 남로당에 의하여 자행된 무장폭동"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4·3사건은 1947년 3·1절 기념식 때 미군정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고도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일이 발단이 됐다.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경찰이 발포해 6명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항의 운동으로 시작됐다. 그랬다가 민족 분단 반대를 향한 제주도민들의 열망과 어우러지면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투쟁으로 발전했다. 이를 두고 북한 정권 수립을 돕기 위한 공산 폭동으로 매도하는 발언이 세미나에서 나왔던 것이다.

박인환 변호사는 더 나아가 4·3 때의 민간인 학살을 두둔하기까지 했다. 3만 명(정부 발표는 1만 4천)이나 희생된 일을 두고 "공산세력의 대한민국 건국 방해 활동이 그 본질이고, 안타까운 희생자의 발생은 부수적·우발적이라는 점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없음"이라고 발표문에 썼다.

전민정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대표는 4·3이 어떤 방향으로 재정립돼야 하는지에 대한 극우세력의 희망을 반영한다. '4·3특별법의 위헌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그는 진상 규명 및 희생자·유족 명예회복을 위한 이 법률이 "반국가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는 주장을 발표문 첫 문장에 담았다.

그는 "4·3은 소련의 한반도 공산화 전략의 일환으로서 소련·북로당·남로당이 합세하여 일으킨 공산폭동 반란이었다"라고 규정한다. 지도자 박헌영이 월북한 뒤라서 남조선노동당이 제주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북조선노동당의 김일성은 박헌영과 경쟁관계라서 남로당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던 당시의 맥락을 완전히 도외시한 주장이다.

그런 뒤 "반성 없는 가해자를 희생자로 만들어 보상하거나 추모하는 행위는 진정한 희생자에 대한 2차 가해에 해당한다"는 어이없는 발언까지 내놓았다. 뒤이어 '4·3 바이러스'라는 표현을 써가며 "4·3 바이러스가 화해와 상생이라는 위선의 옷을 입고 우리 국민의 결단으로 만들어놓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시스템에 침투하여 헌법이념을 파괴하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라며 애석해 했다.
   

3월 30일 ‘지금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라는 타이틀로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개최된 ‘제주 4·3사건 재조명 세미나’ ⓒ 자유미래TV 유튜브 영상


김대중 대통령까지 거명하며 4·3 모독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법치수호센터장인 구충서 변호사는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문제점'이라는 발표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거명하면서 4·3을 모독했다.

2018년 제70주년 4·3 추념식에 참석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그 직후 페이스북에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8년 CNN과 인터뷰할 때 제주 4·3은 공산 폭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라고 써서 논란을 일으킨 일이 있다. 구충서 변호사는 그 문장을 발표문 첫 문장에 담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이 발언은 어떠한 편견이나 왜곡 없이 제주 4·3사건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한 것으로 보여집니다"라고 말했다.

구 변호사와 홍 의원이 참고한 문건은 '김대중 사이버기념관'이라는 사이트에 담겼던 인터뷰다. 이 문건 속의 김대중은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A)라고 발언했다. 이를 근거로 '김대중도 4·3을 공산 폭동으로 인정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인터뷰의 사실 여하를 취재한 결과를 담은 2018년 4월 3일 자 <서울신문> 기사인 '[뉴스를 부탁해] DJ도 제주 4·3은 공산 폭동이라고 했다?'에 따르면, 그 인터뷰 원문은 CNN 홈페이지에 남아 있지 않다. "김대중평화센터에 물어봤더니 '당시 인터뷰 원문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구하지 못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라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그런데 CNN에 보도됐다는 위 인터뷰 발언과 구조적으로 거의 같은 문장이 <김대중 자서전> 제2권에 들어 있다. 자서전에서 김대중은 "4·3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일으킨 무장 봉기가 발단이 됐다. 강경 진압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냈고 다수의 양민이 희생됐다"(B)라고 발언했다. CNN 인터뷰에 나온 A와 구조적으로 비슷하지만, 표현이 약간 다르다. 

현재까지는 B가 4·3에 대한 김대중의 가장 정확한 입장 표명이다. 영어로 번역된 글이 아니라 한글로 쓴 문장이며, 무엇보다 김대중 자신의 책임하에 집필된 문구다. 

남로당도 사회주의 정당이긴 하지만, A로 말하는 것과 B로 말하는 것의 뉘앙스 차이는 크다. <김대중 자서전>은 B 문구 앞에서 "나는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폭도·빨갱이 등으로 매도되어 살아온 것에 국가가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빨갱이로 몰려 수난을 당한 김대중은 다른 사람들을 빨갱이나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을 불편해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장에서도 그런 정서를 읽을 수 있다. 김대중의 진짜 의중은 B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항일투사들이 대거 가담한 조직이었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제국주의에 대항하려면 사회주의로 무장하는 게 최선이라는 신념에서 일제강점기 때 사회주의를 공부한 사람들이 그 속에 많이 포함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조선'노동당'이라는 당명을 근거로 이들을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맥락과 충분히 부합하지 않는다. 이들을 민족주의세력으로 규정하는 편이 훨씬 더 사실적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 대한 고려 없이, 또 <김대중 자서전>도 확인하지 않은 채 김대중의 발언을 이용해 4·3을 모독하는 것은 김대중의 뜻을 폄훼하는 일이다.

신뢰할 만한 인터뷰 원문을 CNN 홈페이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면, 자서전이라도 뒤져보는 것이 학술 발표자의 책무다. 법조인의 자세이기도 하다. 구충서 변호사의 발표문에서 CNN 인터뷰가 비중 있게 언급됐으므로, 얼마든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김대중 자서전>을 뒤적여 김대중의 인식을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됐어야 한다.

4·3을 폄훼하는 사람들이 이처럼 역사적 맥락도 살피지 않고 또 제대로 된 검증 작업도 없이 섣불리 비판 대열에 가담하는 배경은 마지막 발표자인 김은구 서울대 트루스포럼 대표의 발제에서 자연스레 드러난다. 발표문을 사전에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유튜브에서만 확인된다.

동영상에 따르면, 그는 "4·3은 전략적으로 정말 중요한 주제입니다"라며 "4·3이 민중항쟁으로 규정됐기 때문에, 여순반란도 여순항쟁이 되고 대구폭동도 대구항쟁이 될 겁니다"라는 취지로 위험성을 경고했다.

4·3에 대한 재평가가 1946년 대구 10·1항쟁 및 1948년 여순사건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담은 발언이다. 4·3 재평가를 뒤집지 못하면 다른 사건들까지 재평가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읽을 수 있다. 서병수 의원은 '슬픈 역사를 뛰어넘겠다'고 발언했다. 4·3을 폄훼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섣불리 학술 발표에 나서는 데는 '슬픈 역사를 뛰어넘겠다'는 조급증도 한몫을 한다고 볼 수 있다.  
 

23일 제주시 이도이동에 있는 한 거리에 '제주4·3 영령이여, 저들을 용서치 마소서 진실을 왜곡하는 낡은 색깔론, 그 입 다물라'라는 내용의 현수막(사진 위쪽)이 게시돼 있다. 김한규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제주시을)은 제주4·3을 공산폭동이라고 왜곡 주장하는 현수막(사진 아래)이 최근 설치돼 유족 등 도민들을 아프게 하고 있다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현수막을 이날 걸었다고 밝혔다. ⓒ 김한규 국회의원

 
국민 생명과 안전에 적신호

제주 4·3을 올바로 평가해두면,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함부로 대하고 민간인 학살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 방지할 수 있다. 과거의 불행에 대한 사회적 반성을 확실히 정리해두는 것은 동일한 사태의 발생을 막는 데 유효하다. 4·3과 5·18 등을 폄훼하는 태도가 윤석열 정권에서 점차 노골화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위험한 적신호다. 이런 적신호 때문에라도 4·3을 엄정하게 평가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참석과 축사 속에 열린 위 세미나의 제목은 "지금 제주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이다.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가 아니라 "지금 윤 정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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