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 바보' 할아버지는 오늘도 손녀의 화단을 가꾼다

등록 2023.03.31 16:39수정 2023.03.3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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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화받을 상황이 아닌데요!' 손녀 바보 할아버지와 손녀의 통화다. 다시 전화를 하겠다며 얼른 전화를 끊는다. 얼마 후, 손녀가 전화를 했다. "무슨 일 있었어?" 횡단보도를 건너야 해서 얼른 끊었단다. 다른 사람들은 건너면서도 전화를 하던데! 위험해서 전화를 할 수 없었다는 말에 얼른 수긍하고 말았다.


올해 4학년 된 손녀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친근했다. 봄이면 할아버지 시골집을 찾아 화단을 가꾸고, 계절마다 전국 여행지에서 만난다. 다정다감한 사위와 손녀가 스스럼 없는 이유다.

부산에 사는 딸의 전화다. 남해 독일마을에 펜션을 예약했는데, 봄을 맞이하면서 낚시도 하자는 전화다. '낚시, 좋지! 대신 낚싯배는 내가 대여할게!'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할 수 없고, 초대해 주는 것이 고마워 얼른 대답했다. 출발하기 전에 손녀와 통화를 했다.

할아버지가 사다 줄 것 이야기하라는 말에 잠시 머뭇거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오시면 되는데요!' 아무것도 필요 없단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 있을까? 하는 말이 고마워 손녀가 좋아하는 딸기나 듬뿍 준비해 가야겠다. 손녀바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

세월의 변함을 넉넉히 알려주는 손녀다. 삶의 방식이 변했고, 성장하는 속도가 다르다. 자라나는 모습과 말하는 솜씨까지 깜짝 놀란다. 날씨가 많이 따스해진 봄이다. 부산은 따스한 고장이라 봄이 벌써 왔으리라는 생각에 전화를 했다. 날씨가 따스해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살짝 서늘함이 있단다'. 초등학교 4학년이 하는 대답이다. 깜짝 놀랐다. 야, 세월은 이렇게 변하고 있구나! 가끔 주고받는 전화가 반갑고, 고맙기도 하지만 깜짝 놀라는 말솜씨다.

손녀와 자주 통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손녀와 이야기가 별 것 있겠는가? 커가는 모습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뿐이다. 가끔은 기다려지는 손녀의 전화다. 언뜻 장모님이 떠오른다.


긴병에 효자 없단다

몇 년째 요양원에 계시는 장모님이시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에 바보처럼 동감하며 살아간다. 처음 몇 년은 수시로 찾아갔고, 코로나 시대로 접어들며 자주 전화를 드렸다. 아침에도 하고, 지나는 길에도 했다. 하지만 전화하는 빈도가 달라졌다. 하루가 지날 수도 있고, 이틀이 지날 수도 있다. 모자란 삶은 가끔 잊고 사는 삶이 되었다. 장모님이 전화 끝엔, 늘 고맙다 하셨다. 또 해달라 하셨다. 왜 그리도 고맙다고 하셨을까? 한참이 지나고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 그럴 수도 있다는 요즈음의 핑계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세월, 뒷동산을 뛰어올랐다. 걷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 뛸 수밖에 없었다. 20km를 거뜬히 뛰고도 살았다. 서서히 거리는 짧아졌고 이젠, 5km를 뛰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 정도를 뛸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가? 거역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오늘도 알며 살아간다. 자그마한 풀 한 포기의 삶이 예쁘고, 바람에 떨고 있는 찔레나무 순이 안타까운 삶이 되었다.

손녀의 화단을 가꾸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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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의 화단 봄이 온 골짜기, 계절이 가꾼 꽃들이 가득하다. 손녀에게 무상으로 대여한 작은 화단, 수선화가 피고 비올라가 꽃을 피웠다. 튤립이 올라오고 앵초와 금낭화가 손짓을 한다. 손녀가 오면 반가워 할 꽃동산,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늘도 손녀의 꽃밭을 돌보고 있다. ⓒ 박희종


손녀와 주고받는 전화가 그립고 고마운 이유이다. 밝게 떠오른 맑은 햇살이 한없이 감사한 아침이다. 오늘은 무엇을 하며 감사해 할까? 골짜기에서 떠오른 태양을 보며 향긋한 커피를 마신다. 얼른 일어나 뜰로 나서야겠다. 뜰에 나가면 할 일이 많아 좋다. 봄을 준비해야 하고, 텃밭을 돌봐야 한다. 퇴비를 주어야 하고, 밭을 갈아 놓아야 한다.

작은 밭이지만 상추를 길러야 하고, 고추를 심어야 한다. 토마토를 길러내야 한다. 찾아 올 손님과 어린 손녀를 위해서다. 아직 남은 봄이 있으니 우선, 손녀의 화단을 정리해야겠다. 시골집을 찾아오면서 꽃을 사다 심고, 물을 주는 작은 화단이다. 무상으로 무기한 대여한 손녀의 화단에 푸름이 찾아왔다.

어린싹을 내민 수선화와 튤립이 푸름과 함께 꽃을 피웠다. 어떻게 봄을 알았는지 파란 꽃과 잎이 탐스럽다. 봄이 더 익어가면 빨갛고도 노란 꽃 속에 붉음과 분홍색 금낭화가 피어오르리라. 자잘한 앵초도 솜털을 이고 잎을 보여준다. 여기엔 수줍은 패랭이 꽃을 심어야 한다. 그래야 어울리는 화단이 된다.

노랑과 빨강 수선화와 튤립이 가득하고, 금낭화와 패랭이 그리고 제비꽃이 어우러지면, 손녀는 물을 주며 좋아하리라. 아내는 어느새 비올라를 심어 꽃을 피워 놓았다. 손녀의 화단이 서서히 모습을 갖추어 간다. 봄 내린 골짜기에 천상 손녀바보 할아버지, 사위 전화 기다리는 장모님 되어 손녀를 기다리며 화단을 가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손녀와의 전화 통화 속에 숨어 있는 삶의 이야기들, 오늘도 아침부터 바쁘기만 한 시골의 삶이다. 봄 속에 즐거움도 있고, 서러움도 있으니 보지런히 살아야 하는 아침이다. 아침부터 텃밭을 가꾸고, 손녀의 화단을 정리하는 손녀바보의 아침 일기다.
#손녀 #할아버지 #전원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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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무렵의 늙어가는 청춘, 준비없는 은퇴 후에 전원에서 취미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 가끔 색소폰연주와 수채화를 그리며 다양한 운동으로 몸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세월따라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아직 청춘이고 싶어 '늙어가는 청춘'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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