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촌 투쟁, 제도적 방안 마련 위한 첫 자리

'귀환촌 주민 투쟁, 민주화운동 위상정립을 위한 토론회'

등록 2023.04.01 13:48수정 2023.04.0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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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촌 주민 토론회 후 기념 촬영 ⓒ 심명남


달동네, 판자촌, 토막촌, 빈민촌, 슬럼가 등으로 불린 지역은 어느 도시에나 존재했다. 이런 공간 중 하나였던 전남 여수시 덕충동의 여수 귀환촌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정부가 대책 없이 밀어붙인 귀환촌 철거로 주민들이 철거반대 투쟁에 나서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실이 뒤늦게 조명됐다.

일제 식민지 시절 강제징용과 먹고 살기 위해 일본 등지를 찾았던 노동자들이 귀환하면서 여수 귀환촌이라는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방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동포를 '우환동포'라고 불렀다. 귀환동포들은 해방직후 귀국해 거주할 공간이 없어 여수건국준비위원회의 지원속에 이곳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된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절대적 빈곤은 6.25 동란으로 악화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귀환촌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항구도시 특성상 하역작업을 하거나 막노동, 짐꾼, 고물수집, 신문팔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전남도의회 주종섭 의원에 따르면 당시 귀환촌은 철도청 소유의 땅이 되었고, 귀환촌 사람들은 임대료와 세금을 꼬박꼬박 냈다. 그런데 1969년 접어들면서 순천철도국에서 '철거계고장'이 발부되었다. 대책도 없는 갑작스런 철거요구에 주민들은 아연실색 할 수 밖에 없었다.

몇차례 대책을 요구했으나 여수시나 철도국에서는 대책안을 마련해 내지 못하고 철거 압박을 가했다. 그러던 중 "넝마주이를 동원해서 강제 철거 시킨다더라"는 소문이 돌면서 주민들은 집단적인 행동에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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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지역 귀환촌 주민만 1만 7387명에 달한다. ⓒ 심명남

 
철거반대 투쟁은 1969년 3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이틀간 시위가 일어났다. 이로인해 시위 참여자 1명이 사망하고, 주민을 비롯 경찰관, 철도공안원 등 1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17명이 구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이후 주민들은 여수시에서 지원한 신월동 재건마을(새마을), 오림동 경찰묘지, 인근 덕충동 소재 토끼등으로 이주한다. 일부는 다시 귀환촌으로 흘러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1969년 이주 이후 귀환촌에 남아있거나 다시 이사를 온 사람들과 이사와 살았던 사람들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귀환촌은 결국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행사를 앞두고 철거를 하게 된다. 귀환촌 지역이 박람회 행사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31일 오전 여수시의회 소회의실에서 '귀환촌 주민 투쟁, 민주화운동 위상정립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는 '귀환촌 투쟁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중심으로 제도적 방안 마련을 위한 첫 자리라 눈길을 끌었다.

여수시의회 김영규 의장과 구민호 의원이 주최한 이날 토론회에는 이미경, 김채경, 민덕희, 고용진 의원을 비롯 주종섭 도의원과 귀환촌 주민 그리고 전남대 학생회장 등 30여 명이 자리를 채웠다.  

김영규 의장은 "우리 지역의 잊혀질뻔한 민주화운동 위상정립을 위한 토론회가 전남도의회와 여수시의회 역할이 중요하다"면서 "향토문화적 사건을 발굴하고 토론회를 준비한 주종섭 도의원과 미평·만덕동 죄장으로 나오신 구민호 의원님께 감사드린다"라고 인사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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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촌 주민 투쟁 민주화 운동 위상 정립을 위한 토론회 좌장을 맡은 김영규 여수시의장 ⓒ 심명남

 
김 의장은 이어 "여수지역에서 귀환한 1만 7387명중 덕충동 철도부지와 자산종화동, 자산공원 일부 지역에 귀환촌을 토대로 살아계셨던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다"며 말을 이어갔다. 

"어떤 도시나 이면에는 꺼내기 힘든 가슴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여수의 마지막 판자촌이었던 귀환촌과 수용소를 방불케하는 남산동과 벅수꼴도 판자촌이었어요. 지금도 생생히 증언해 주실 분들이 있습니다. 여수 귀환촌은 국가권력에 의해 생존권을 박탈당해 군사정부에 저항해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큰시위가 벌어져 사회적파장도 상당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50년도 훨씬 지난 지금 시민들도 잘 알지 못하는 슬픈 역사가 안타까울뿐입니다. 우리가 귀환촌 투쟁을 재조명해 앞으로 실효성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토론회 좌장을 맡은 여수시의회 구민호 의원은 "20여년간 지내온 삶의 터전에서 69년 3월 31~ 4월 1일 이틀동안 공권력의 강제철거와 주민들의 철거반대 투쟁에 대해 현재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해 보는 자리다"면서 "69년 4월 2일 이후 보금자리를 강제로 떠나야만했던 원인과 과정을 살펴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후손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승해 나갈지를 고민해보는 자리다"라고 토론회 취지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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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섭 전남 도의원이 여수 귀환촌 투쟁의 함의와 과제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 심명남

 
발제자로 나선 전남도 주종섭 의원은 여수 귀환촌 투쟁의 함의와 과제를 통해 대책없는 철거반대 투쟁과 귀환촌 투쟁의 함의, 귀환촌 투쟁의 민주화운동 위상정립을 위한 과제를 발표했다. 

"여수 귀환촌은 여수시 덕충동 일대 여수역 인근 지역을 말합니다. 1969년 3월 31일과 4월 1일 이틀간 진행되었던 여수역 인근 귀환촌 주민들의 대책없는 철거반대 투쟁의 진행을 살펴보고 그 의의와 역사적 가치를 조명코져 합니다. 그리고 귀환촌 투쟁이 민주화운동으로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확인해 보고자 토론회를 마련했습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김병호 전 이사장은 여수 귀환촌 형성과 변천을 발표했다. 우석대학교 정호기 교수는 여수 귀환촌 철거반대투쟁의 정체성을 민주화운동의 제도적 기반에서 본 식민지와 전쟁의 상흔이 농축된 공간의 탄생과 귀환촌 철거반대투쟁의 성격 규명, 민주화운동의 제도화에서 철거반대투쟁의 위상, 여수귀환촌 철거반대투쟁의 위상 정립을 발표했다.

고추가루탄으로 맞선 귀환촌 주민들의 생존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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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에 참석한 여수 귀환촌 주민들 ⓒ 심명남

 
당시 귀환촌 강제철거 현장에 있었던 여수 귀환촌 주민 이판용(70)씨는 16세 나이로 보고 듣고 느꼈던 참담한 현실을 생생히 증언했다. 일제징용후 3남 2녀를 둔 부친은 해방이 되자 고국땅인 여수시 수정동 소재 귀환정에 영구준비위원회 직원들께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집을 얻어 정착했다.

귀환촌에서 59년 사라호 태풍때 많은 피해를 입고도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항만하역 노동자들은 당시 여수한일은행에서 바꿔준 대일청구권 자금중 일본돈과 채권의 등을 받았다. 당시 철거 데모에 겪은 실상을 이렇게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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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귀환촌 주민 대표 이판용씨 ⓒ 심명남



"69년 3월 철도청에서 보낸 철거 계보장이 주민들에게 날라왔어요. 자진철거를 하라는 내용이었죠. 오갈데없는 귀환촌 주민들은 대책을 세워 달라며 관계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돌아온 답은 주위환경이 미관상 불편하니 강제철거하라는 답변이었어요. 박정희 정권에서 공권력을 행사하던 관계기관은 철거데모라 했지만 귀환촌 주주민들에겐 생존권 투쟁이었습니다. 

넝마주이와 폭력배들을 동원해 강제철거를 집행한다는 험난한 유언비어들이 난무하기 시작해 투쟁이 시작되었어요. 투쟁현장에 가보니 많은 주민들이 눕거나 앉아있었고 돌팔매질과 진압경찰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해 주민들은 눈물, 콧물, 아침에 먹었던 된장국과 보리밥을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우리는 무기가 없으니 고추가루탄을 만들어 내자고 제안해 벽돌공장에서 모래를 가져오고 집집마다 양념에 쓰는 고춧가루를 가져와 담뱃갑에 있는 은박지 종이를 주워 똘똘말아 밥풀에 붙여 일명 고춧가루탄을 만들어 경찰에 저항했어요. 안전모를 썼지만 고춧가루탄을 맞은 경찰도 눈물이 범벅이 되어 기침을 하고 난리 법석이었지만 무장한 공권력을 주민들이 어찌 막아내겠습니까?

당시 부친께서 하얀 두루마기와 중절모를 쓰고 더이상 데모를 해서는 안된다고 막아 섰지만 주민들은 계속 투석전을 행사했어요. 저녁이 되자 일부는 집으로 일부는 술집으로가 가난의 한을 달래며 내일을 걱정했죠. 저녁 늦은 시간 경찰들에게 체포된 주민들이 더러 있었고 뒷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경찰들에게 맞아 주민 한사람이 죽었습니다."

 
#여수 귀환촌 #민주화운동 #주종섭 #여수 귀환촌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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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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