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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불시착한 비행기, 하룻밤에 벌어진 일들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여섯 개의 밤>

23.04.03 11:13최종업데이트23.04.0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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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의 경계선을 넓히거나 혹은 무너뜨리거나
 
옴니버스 영화 <여섯 개의 밤>은 얼핏 보면 요즘 한국 독립영화의 주요 관객층이 부담 없이 즐길만한 도회적 설정을 담은 작품이다. 여행 중 일어나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사건들에 독립영화 팬이라면 낯이 익은 감독과 배우들이 영화에 대한 기본 신뢰를 보증한다. 하지만 잠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순간이 급작스레 찾아온다면, 그 다음부터 이 영화는 예상외로 독특한 구석이 많은 미스터리한 작품으로 돌변한다. 본 작품은 특정한 항목으로 규정되기 쉽지 않은, 꽤나 가치판단의 문제를 수반한 채 관객과 만나는 중이다.
 
영화는 기획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크게 3가지 요소가 어우러지며 조합되는 과정을 거쳤다. 첫 번째 요소가 가장 독특한 지점이다, 대개 별 무리 없이 <여섯 개의 밤>은 독립영화의 범주에 포함시킬 테지만, 해당 작업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렇게 규정하는 게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해당 프로젝트는 기획 당시부터 제작사가 주도하는 프로젝트로 출발한다. 대부분의 독립영화 작업들은 '작가'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감독의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출발해 제작지원을 구하고 시나리오를 정돈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게 마련이다. 상업영화와 구분되는 작가 중심의 독립영화 창작과정은 대개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제작사가 미리 영화화를 고려해 시나리오를 만들어두고 감독을 매치하는 방식을 취한다. 상업개봉영화라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독립영화로 분류되는 작업에선 보기 드문 낯선 형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다른 요소들에선 근래 개봉되는 드라마 장르의 독립영화들과 크게 상이한 점이 없으면서도 그 기원에서부터 결정적 차이를 가진다. 사실 '한국독립영화'의 범주와 영역이 과연 어떻게 획정되어야 하는지 쟁점은 늘 잠재해온 문제이긴 하다. 과거에 비해 극장 개봉 중심으로 장편 독립영화들의 소개 방식이 정형화되면서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구분선은 장편 분야에선 지극히 모호해진 게 사실이다.

그렇게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던 진실의 일면을 유독 본 작품이 더 민감하게 끄집어내는 셈이다. 독립영화 작가로서 정체성을 견지하는 감독과 여러 영화를 통해 독립영화의 '얼굴(들)'로 공인되어온 배우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레이오버 Layover' 상황에서 출발하는 로드무비
 

▲ "여섯 개의 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인디스토리

 
이쯤에서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될 당시 <여섯 개의 밤>의 처음 제목은 '레이오버 호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레이오버 Layover'란 비행기가 중간기착할 때 일시 체류하게 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용어다. 이 용어가 적용되는 상황이 영화의 기본 전제이자 배경이 된다. 일상생활에서 잠시 이탈해 여행 중인 과정, 그 중에서도 뭔가 다른 일정을 진행하기엔 애매한지라 말 그대로 '버리는' 시간이 되는 상황이다. 꼼꼼하게 준비하고 촘촘하게 짜놓은 여행 시간표 중에서도 어쩔 수 없이 '희생 플라이' 같이 낭비하는 시간이라니, 용어의 기원부터 무엇인가 일상에선 접하기 힘든 상황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가.
 
그런 원 제목처럼 영화는 여행과정을 중심축으로 진행되는 '로드무비' 장르 중에서도 더 우발적이고 예측불가의 상황을 기본설정으로 삼는다. 승객을 가득 태운 채 뉴욕으로 향하던 비행기 속 승객들이 웅성거리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출발한다. 태평양과 북미 대륙을 횡단하기엔 여객기 엔진 상태가 시원찮다는 판단 때문에 예정된 비행은 중단된다. 엔진을 점검하기 위해 비행기는 부산에 불시착을 하고 만다. 당연히 사후조치가 진행되어야 할 상황이다. 승객들은 다음날 대체 항공편을 타기 전까지 항공사가 마련한 숙소에서 예정에 없던 일박을 하게 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상황이라 승객들은 미리 준비한 계획이 있을 리 없다. 영화는 그중 3팀-6명의 주요 인물이 하룻밤 동안 겪게 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6명의 인물들은 2명씩 조를 맞춰 개별 에피소드를 이끌어간다. 관객들이 흔히 기대할법한, 이런 형태의 옴니버스 영화들에서 종종 시도되는 각 에피소드 별로 타 에피소드 등장인물들과의 크로스-오버 상황은 특별히 일어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딱 전형적인 정공법을 취한다. 3개의 에피소드 별 2명씩 묶인 등장인물들은 1대 1 대면상황에 직면한다. 개별 에피소드마다 주역이 되는 2명 외에 나머지 4명은 자리를 비워준다. 사실상 그들이 동시에 출현하는 건 다중이 함께 이동하는 비행기와 셔틀버스 외에는 없다. 그조차 그저 같은 공간에 위치하거나 동선이 겹치는 것뿐이다. 각각 20대 독신남녀 vs 조금 더 높은 연배의, 결혼을 준비하는 남녀커플 vs 독신인 딸과 나이든 노모 조합이 각자의 에피소드를 책임진다. 이야기 진행순서는 생물학적 연령 + 인생 주기 단계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뤄진다.
 
'K-생애주기'에 따라 배열된 에피소드의 공감대
 

▲ "여섯 개의 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인디스토리

 
첫 번째 에피소드는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선우와 수정 사이에 일어나는 사연이다. 딱 봐도 배낭여행객인 선우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같은 줄 좌석에 탄 수정에게 시선이 가는 중이다. 수정은 진한 눈 화장과 검정색 의상으로 평범하지 않은 기운을 풍긴다. 선우는 어렵사리 수정에게 말문을 트고 둘은 함께 호텔 바에서 위스키를 마신다. 그 과정에서 선우는 수정의 속사정을 듣게 되고 둘은 함께 자석에 끌린 것처럼 시간을 보내게 된다. 배낭여행물의 아이콘이라 할 <비포 선라이즈>에서 청춘남녀가 그들 각자의 일상에서라면 간보기와 조건 따지기로 절대 이뤄지지 않을 즉흥적 교감을 나누는 것과 비슷하게 (관객들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둘의 관계는 급진전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결혼을 앞둔 장기연애커플 규형과 지원의 이야기다. 둘은 미국에 거주중인 규현의 부모에게 인사차 향하는 길이다. 결혼절차가 제법 진행된 모양새로 신혼여행 준비 직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처음 에피소드의 청춘남녀들에 비해 좀 더 현실적인 문제가 둘에게 속속 대두한다. 늦은 시간이지만 기왕 온 김에 호텔 수영장을 가고 싶다고 하며 서슴없이 기내에서부터 맥주를 들이키며 여행 기분을 누리고픈 지원과 달리 규현은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 보인다. 그리고 지원에게 공유하지 않았던 규형의 또 다른 여행 목적을 알게 되면서 둘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다. 한번 믿음과 신뢰가 허물어지면 '관계의 종말'은 순식간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행 길에 오른 은실과 그런 노모 수발을 들기 위해 동승한 딸 유진의 사연이다. 은실은 꽤 중한 수술을 받으러 가는 듯하다. 젊은 세대에 비해 비행기 여행이 낯설기도 하다. 몸 불편한 데다 낯선 환경, 예정에 없던 연착이 겹치다 보니 은실은 불시착 상황부터 허둥지둥 불안해하며 유진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 몸이 아프기도 하니 매사에 안절부절 법석을 부리던 은실은 조금 안정을 찾자마자 한밤중에 해운대 바닷가 구경을 하자고 유진을 채근한다. 하지만 수십 년간 묵혀왔던 가족 내의 갈등은 모녀 사이에서 기어코 폭발하고 만다. 부모는 자식이 원망스럽고 자식은 부모에게 서러운 것 투성이다.
 
3개의 에피소드는 비행기에 탑승했던 21세기 한국인들의 삶을 압축해서 재조명하듯 펼쳐진다. 아직은 우연한 만남과 즉흥적 결정이 가능한, 그 반대급부로 불투명한 미래와 아직 온전히 독립하지 못한 자녀세대의 피로감이 전달되는 첫 번째 에피소드 속 젊은 남녀의 관계는 신기루처럼 하룻밤으로 끝날 듯하다. 그래서 유독 해당 에피소드는 몽환적인 꿈처럼 다가온다. 뉴욕에서 어쩌면 둘은 다시 만날 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교환하거나 훗날을 기약하지 않는다. 그 나이이기에 가능한 여운과 단절의 기운이 넘실대는 에피소드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그렇게 가볍게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없는 관계들을 다룬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불과 몇 년쯤 더 나이든 남녀는 현실의 무게와 남들과의 비교로 인한 스트레스, 서로 감춰두기만 했던 균열이 한꺼번에 분출되기 시작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더욱 상처를 벌리게 된다. 이 둘이 내친김에 터트리는 불만 박람회는 영화 전체에서도 감정적 고양이 극에 달하는 순간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결혼'에 대해 갖는 복잡한 감정이 마음껏 폭로된다. 그런 폭주는 다음 에피소드에선 모녀간 해묵은 감정의 골로 이어진다. 모녀는 서로 묵혀둔 설움을 이때다 하고 뿜어낸다. 여행이라는 예외적 상황에서 일상에선 쉬쉬하던 문제들이 폭발하는 경우를 겪어본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몰입하게 될 공감능력 극강의 순간들이다.
 
평범한 듯 보여도 정밀하고 탄탄한 '이야기'의 매력
 

▲ "여섯 개의 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인디스토리

 
각자 등장인물들 나이 대에서 일어날 법한 꽤 보편적인 사연들을 풀어내는 <여섯 개의 밤>은 에피소드를 관통해 공통적으로 정해진 결론을 취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여행 중 일어나는 추억처럼 인상적인 찰나로만 그친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는 관계의 종말로 치달으며 저러다 적당히 화해하겠지 하는 안일함을 배격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오래 묵을 대로 묵었던 불화가 노출되는 과정에서 일대 위기를 맞지만 한바탕 폭우가 쏟아진 뒤에 땅이 굳듯 발생하는 감정의 정화작용을 통해 가족 사이 관계를 재정립하기에 이른다.
 
특별히 당위적인 교훈이나 전제된 방향성 대신에 이 영화는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라는 특별한 계기를 통해 개개인이 우연히 체험하게 된 일탈을 설득력 있게 구현한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하룻밤의 유예시간 동안 일어나는 뜻밖의 상황들은 어느덧 4편째 극장개봉을 맞이한 최창환 감독의 안정된 연출력 + 제몫을 차고 넘치게 해내는 배우들 덕분에 충분히 개연성 있게 재현된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지극히 우발적으로 터지는 사건들이지만 탄탄한 연출과 연기 조합 덕분에 작위적이라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학생독립영화의 설익은 구성과는 비교 불허의 정밀도가 돋보인다.
 
3개의 에피소드는 점층적으로 차근차근 한국사회 구성원의 삶을 조명하게 만든다. 등장인물들의 생애주기에 따라 전개되는 단계별 숙제가 에피소드별로 주요한 갈등의 축으로 기능한다. 그러다 보니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관객층에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이야기 조합이 완성된다. 그렇게 촘촘하게 직조된 이야기들을 차례로 펼쳐 보이면서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화해, 관계의 종말을 관객들이 눈을 떼지 않고 관조하게 만든다. 다만 작중 인물들이 펼치는 실감나는 롱 테이크 장면들에서 관객이 느낄 보편적 공감대를 넘어 답답한 현실을 돌파하거나 잊도록 돕는 짜릿한 돌 직구는 이 영화에서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영화 속 '거울'과도 같은 의도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현실을 깊게 투영하지만, 애초에 그 이상을 뛰어넘어 대리만족이나 해법 제시까지 역할로 설정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소소한 듯 출발해 제법 격렬한 감정의 교차가 펼쳐지는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관객은 각자의 여행 속 추억을 소환해 비교하게 될 테다. 또는 영화에 자극받아 봄날의 여행을 상상하고 기획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요란법석 스펙터클과는 거리가 멀지만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은근한 중력장을 가진 영화다. 계통적으로 이 영화가 독립영화인지 저예산 (상업)기획영화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관객이 굳이 그런 구분기준에 따라 본 작품을 선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적절한 기획에 안정감 있는 제작진과 연기자들이 어우러져 우리가 '여행'에 원하는 감정을 딱 그대로 재연하는, 목적과 효용이 딱딱 들어맞는 결과물이다.
 
<작품정보>
 
여섯 개의 밤 The Layover
2022 | 한국 | 트러블&트래블 드라마
2023. 3. 29. 개봉 | 81분 | 12세 관람가
감독 최창환
출연 강길우(규형 역), 강진아(유진 역), 김시은(지원 역), 변중희(은실 역),
이한주(선우 역), 정수지(수지 역)
각본/제작 김기현, 정유미
PD 윤진
촬영 전상진
제작 ㈜컬쳐플랫폼, 매치컷㈜
배급 ㈜인디스토리
 
2022 23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초청
최창환 감독 강진아 강길우 김시은 변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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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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