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4 15:30최종 업데이트 23.04.18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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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인구 구성이 다양해지고 문화예술의 향기가 풍성해졌는가 하면, 땅과 바다가 환경파괴로 신음한다는 경고음도 들린다. 4·3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는 한편으로는 새 공항 건설을 두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천혜의 땅 제주도를 살기 좋은 평화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제주 사름(람)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편집자말]
22살 청년은 처음으로 육지 여행을 떠났다. 청량리역을 출발해 강원도 정선을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그는 속으로 되묻고 있었다. '왜 돌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지?' 청년은 육지에 와보고 나서야 제주도의 돌담이 소중한 보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름다운 제주 돌담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그림으로 그리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돌담 사랑의 시작이었다. 조환진 돌빛나예술학교 대표의 이야기다.

그의 아버지가 평생 돌을 쌓으며 살아온 돌챙이(석공이란 뜻의 제주어)였고 보면, 청년 조환진의 돌에 대한 애착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체구도 작은아들이 돌 쌓는 힘든 직업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조환진 대표 자신도 돌담의 아름다움에 빠졌지만, 직접 돌담을 쌓게 될 줄은 몰랐다.


제주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그가 첫 직장으로 인연을 맺은 곳은 한경면 저지리의 분재예술원, 오늘날의 '생각하는 정원'이었다. 친구와 둘이 들어갔는데, 일주일 정도 일을 시켜본 원장은 그의 친구는 분재과로 보내고, 조환진 대표에게는 울타리 돌담 쌓는 현장의 보조 일을 하도록 했다. 퇴사할 때까지 3년 반 동안 돌을 다듬고, 운반하는 보조 역할이었다.

청년 조환진의 두 번째 일터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됐으나 제주의 오름을 아름다운 사진으로 남겨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바로 그 김영갑 사진작가를 찾아간 것이다.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영갑 작가는 그에게 사진 일보다는 갤러리 마당에 돌담 쌓는 일을 맡겼다.

김영갑 작가는 '자연스러운' 돌담을 강조했다. 절대로 돌을 깨뜨려 쓰지 말고, 줄을 맞추거나 높낮이를 맞추지 않으며, 돌담의 폭도 넓게 혹은 좁게 해서, 일률적인 모양의 돌담이 아닌 자연스러운 돌무더기 느낌이 들도록 쌓으라는 것이었다. 분재예술원에서 수평 수직이 반듯한 돌담을 쌓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자연스러운 돌담 쌓기가 몸에 배었다고 말한다. 김영갑 갤러리에서의 돌담 쌓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3, 4개월 만에 그만두었고, 얼마 안 가 김영갑 작가는 루게릭병으로 고인이 됐다.

돌이 나를 따라다니는 게 아닌가

뜻하지 않게(?) 돌담 쌓는 일에 엮이던 그가 본격적으로 돌담을 직업으로 삼게 된 계기가 찾아왔다. 2003년 결혼을 하고 남의 집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사시던 집 앞에 신혼집을 짓기로 하면서부터였다. 조경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집을 짓기 시작했다.

조환진 대표는 직접 돌집을 설계하고 아버지의 기술 지도를 받아 가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집을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 3년 만에 한림읍에 28평짜리 집을 완성했다. 원형도 아니고 타원형도 아닌 콩처럼 생긴 묘한 모양의 돌집이었다. 특이한 집으로 소문이 나자 구경꾼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생방송 투데이'라는 TV 프로그램에도 소개됐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돌담을 쌓아 달라는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50년 경력의 아버지에게 본격적으로 노하우를 전수 받으며 돌 쌓기를 직업으로 삼게 됐다.

"내가 살 돌집을 지었을 뿐인데 운명이 바뀐 셈입니다. 제가 돌을 좋아한 게 아니라, 돌이 저를 따라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는 곳마다 돌과 관련되는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처음엔 돌챙이 직업이 비전도 없고, 너무 힘든 일이라 대학까지 나와서 할 일이 못 된다고 반대하시던 아버지도 결국은 저에게 기술을 가르쳐주시더군요."
  

세상에 하나뿐인 돌집 조환진 대표가 직접 설계해 3년 만에 완성한 돌집. 특이한 집으로 소문이 나 TV에도 소개됐다. ⓒ 조환진

 
운명적으로 돌담을 쌓게 되었다는 조환진 대표, 그는 돌담 쌓기에 어떤 매력을 느꼈기에 자신을 따라다닌 돌담을 평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였을까.

"저는 돌덩이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주도의 돌은 용암이 굳어서 생긴 것들인데 모양이 다양하잖아요. 그 각기 다른 돌들을 이리저리 짜 맞추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주는 그 자체가 재미있습니다. 마치 어린이들이 블록 맞추기를 즐기듯이 말이죠. 그리고 돌담을 쌓으면 없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오래 존재하니 어떤 영원성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림이나 사진, 조경 등 해본 일에 비해 이 돌담 쌓기가 더 재미있어요. 재미있어 하다 보니 잘하게 되고요."

조경업체에서 일하던 시절, 조환진 대표는 뒷날 돌빛나예술학교를 만들게 되는 또 하나의 터닝포인트를 만나게 된다.

"한림읍 협재의 한 별장 공사 현장에서 조경 일을 거들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침 돌담 쌓는 업체가 와 있었는데, 석공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니 실력이 대단해 보였어요. 그래서 업체 사장님께 돌담 일 배우면서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네는 돌담 기술을 배우고 나면 따로 나가서 사업할 사람'이라며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순간, 돌담 쌓는 기술은 쉽게 가르쳐주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언젠가는 돌담 쌓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제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단히 돌담 쌓는 방법을 익혀서 자기 집 돌담 정도는 스스로 보수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었어요."

2015년 조환진 대표는 돌빛나예술학교를 세우게 된다. 마침 제주의 밭담이 국가중요농업유산(2013년)과 세계중요농업유산(2014년)으로 지정되자 관련 조례가 만들어지고 제주연구원에 밭담사업단이 만들어지는 등 관심을 끌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조 대표는 학교를 시작하면서 '돌담 쌓는 기술의 대중화'를 목표로 내세웠다. 직업인 양성보다는 자기 집 울담이나 밭담이 무너지면 스스로 쌓을 수 있도록 가르치자는 취지였다. 돌빛나예술학교는 처음 조환진 대표의 돌집에서 시작했으나 강의실과 실습장이 미비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얼마 후 협재의 야영장을 무료로 빌려 운영하게 됐다.

돌빛나예술학교가 문을 연 다음 해에는 밭담사업단과 연계 사업으로 밭담 해설사 양성 과정을 진행했다. 이론과 실기, 현장 답사로 구성된 이 과정은 제주도 문화에 해박한 최고 전문가들이 강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조 대표는 당시 강사로 나왔던 고 송성대 교수의 권유로 제주대학교 지리학과 대학원에 진학, 현재 박사과정을 수료한 상태다. 남을 가르치려면 이론적 배경과 함께 사회적으로 공인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돌빛나예술학교는 이후에도 진화를 거듭한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밭담사업단과 협력하여 밭담 축조기술자 양성과정인 '밭담 아카데미'를 진행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학교 설립 초기부터 비정기적으로 해오던 봉사 활동을 본격화 했다. 밭담 아카데미를 수료한 '동문'들을 중심으로 매월 정기적인 돌담 보수 봉사 활동에 나섰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아카데미도, 봉사도 중단됐다. 제주도 교육청과 제주문화 알리기 사업의 하나로 진행하던 어린이 돌담 교육도 난관에 부닥쳤다. 어린이들이 돌빛나학교로 찾아와 진행하던 돌담 쌓기 체험교육이 중단된 것이다.
  

찾아가는 돌담학교 제주의 돌과 돌담 종류 등 이론 수업과 가벼운 돌로 직집 쌓아보는 실기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 조환진

 
다행히 코로나19가 진정되면서 최근 들어 어린이 교육은 재개했다. 요즘은 요청이 들어오면 돌을 싣고 초등학교를 찾아가서 교육하고 있다. 용암 폭발로 생겨난 제주의 돌과 돌담의 종류 등 이론 수업을 하고, 가벼운 송이 돌로 직접 돌담을 쌓아 보는 실기 수업을 병행하는 식이다.

코로나로 중단했던 봉사활동도 재개했다. 봉사는 매달 둘째 토요일, 자발적으로 모인 봉사자들이 무너진 돌담을 복구하는 현장 체험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제주 돌을 처음 만져보는 초보부터 숙련된 전문가까지 함께 참여하는 게 특징이다.

봉사자들은 돌빛나예술학교 밴드나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공지되는 일정을 보고 찾아온다. 3월에는 한림읍 금릉리 원담(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닷물이 들고 나가는 해안가에 쌓은 돌담)을 보수하기도 했다. 지역주민은 물론, 귀농 귀촌한 사람, 제주문화에 관심이 있는 이주민 등 다양한 사람들이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한림읍 금릉리 바닷가의 원담을 보수하는 봉사활동 매달 둘째 토요일 봉사자들이 모여 무너진 돌담을 복구하는 봉사활동을 한다. ⓒ 황의봉

 
돌빛나예술학교는 지금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수업 장소도 다시 마련해야 하고, 교육 프로그램도 새로 짜야 한다. 조환진 대표는 무조건 서두르기보다는 내실 있는 준비를 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돌빛나예술학교 설립 당시의 목표대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돌담 쌓기의 대중화'를 위해 고심 중입니다. 단순히 코로나 공백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차원을 넘어 '학교'라는 명칭에 걸맞은 내용과 형식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당분간 휴교하면서 시간을 갖고 체계적이고 정기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볼까 합니다."

제주를 뛰어넘어

조환진 대표는 요즘 제주를 뛰어넘어 국제적인 안목으로 돌담을 바라보고 있다. 외국의 돌담을 견학하고, 해외전문가들과 교류를 본격화하는 중이다. 그가 처음 다른 나라의 돌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2014년 제주MBC가 방영한 '밭담 오래된 미래'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였다. 영국의 돌담 쌓기 교육 현장을 소개하면서 돌담 쌓기가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 직업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제주 돌담만을 알았던 그에게 서양의 돌담 이야기는 신기했다. 제주에선 돌담에 관심 갖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는데, 영국 젊은이들이 어떻게 돌담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궁금했다.

마침내 2017년, 외국의 돌담을 견학하고 교육도 받고, 현지 전문가들과의 교류도 모색하기 위해 영국과 아일랜드로 떠났다. 영국에서는 설립 49주년을 맞은 돌담협회 사무국장을 만나 국가와 민간이 협력해 체계적으로 돌담을 보전하고 있는 현황을 들을 수 있었다. 영국이나 아일랜드 모두 서쪽 지역에 돌이 많았다. 아일랜드에서는 서쪽 이니시어 섬을 방문해 유명한 석공을 만나 자세히 돌담을 살펴볼 수 있었다.

"영국과 아일랜드에 가서 보니 돌이 현무암 위주인 제주도와는 다른 석회암이었고 모양도 달랐지만, 돌과 돌의 마찰력을 이용하는 축조 원리는 같았습니다. 그리고 교본에 의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원칙에 충실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에선 땅을 파지 않고 돌을 쌓는 경우도 있는데 비해 그들은 반드시 20㎝ 이상 깊이로 판 뒤 돌을 쌓고 있었어요. 그래야 잘 무너지지 않는 것이지요."
 

아일랜드 이니시어 섬의 돌담 목장과 밭 울타리에 쌓은 돌담이 완벽히 보존돼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다. ⓒ 조환진

  
조환진 대표는 작년에 다시 아일랜드와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관광지 친퀘테레의 테라스 돌담을 살펴보고, 아일랜드에선 2주간 체류하면서 현지 석공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새로운 깨달음도 얻었다고 한다.

"돌을 대하는 마음과 자세가 우리와는 매우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처음 교육할 때 우리는 기초를 어떻게 놓고, 돌의 특징을 어떻게 살리는지 등 기술적인 부분부터 시작하는데, 그곳에선 '자기만의 마크'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자기가 쌓은 돌에 자기 이름이나 문양을 새기는 것이지요. 책임감과 함께 명예를 걸고 쌓는 자세부터 가르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가문 대대로 마크를 이어받기도 한다는 겁니다."
  

이탈리아 친퀘테레 테라스 돌담 조환진 대표는 외국의 돌담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영국, 아일랜드, 이탈리아의 돌담 현장을 찾아 견학을 하고 상호 교류 행사도 추진하고 있다. ⓒ 조환진

 
아일랜드 서쪽의 개발이 덜 된 이니시어 섬을 찾았을 때는 돌담길을 걷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부러움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목장과 밭 울타리에 쌓은 돌담들이 원형대로 완벽히 보존돼 있어 관광객들이 걷거나 자전거 혹은 마차를 타고 둘러보더라는 것이다.

조환진 대표에 의하면, 아일랜드 도니골 주와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합의해 올해 10월에는 아일랜드 대표단이 제주를 방문해 '돌빛나 축제'를 할 예정이다. 제주 한림의 이시돌 목장을 일군 고 맥그린치 신부의 고향이기도 한 도니골 주가 돌이 많고 자연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어서 제주와 자매 결연을 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제주도 당국도 긍정적인 반응이므로, 도네갈 주 정부가 호응하면 제주 문화를 유럽에 알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제주의 밭담을 일컬어 '흑룡만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치 기다란 검은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아름답게만 보이는 흑룡만리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만만치 않은 문제투성이라고 조 대표는 우려한다.

"요즘 제주의 밭담은 무너진 채 방치되고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농업인구가 고령화되다 보니 복구가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쓰다 버린 농약이나 비료, 각종 쓰레기가 널려 있어요. 한편으론 이주민이 늘어나 건축이 활발하다 보니 돌이 점점 귀해지고 있습니다. 돌담이 제주의 경관 가치를 크게 높여주고 있지만 이를 담당하는 행정부서도 없어요. 그러니 돌담 정책도 없고, 석공 인력의 실태도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훼손은 심해지고 관리는 부실한 형편입니다."
  

조환진 돌빛나예술학교 대표 조환진 대표는 해녀문화와 함께 제주를 상징하는 돌담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황의봉

 
조 대표는 항상 차 안에 카메라 장비를 싣고 다닌다. 아름다운 돌담 풍경이 보이면 곧 촬영하기 위해서다. 돌과 함께 평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답다. 돌의 매력에 빠진 조환진 대표는 해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돌담 문화 보존에도 기울여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돌담 문화도 해녀 문화 못지않게 제주를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문화 유산입니다. 제주의 산담이나 원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외국인들이 엄청 신기해합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제주 돌담의 가치를 더 잘 알 수 있어요. 해녀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의료 지원이나 수당 지급 등으로 매년 적지 않은 예산이 책정되지만, 돌담 문화를 지원하는 정책은 인색하기 짝이 없는 실정입니다. 돌담 쌓는 작업은 중노동이어서 허리 어깨 팔꿈치 무릎 등 직업병이 따라붙게 됩니다. 돌을 다루는 이들도 제주도의 가치를 높이는 공헌자로 보는 시각 전환이 필요하고 지원정책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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