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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이전에도... "영화숙과 재생원, 기록으로 남겨야"

[이영광의 '온에어' 232] KBS 1TV <시사 직격> 서지원 PD

23.04.07 16:31최종업데이트23.04.0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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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부산에 있었던 부랑인 수용 시절인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피해들은 언론이 많이 다뤄서 대부분의 사람이 알 것 같다. 그러나 부산에는 형제복지원 이전에도 비슷한 기관이 있었고 거기서도 많은 피해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자행된 것일까?

지난 3월 31일 KBS 1TV <시사 직격>에서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이 방송되었다. 영화숙 피해자인 박상철(가명)씨 이야기로 시작한 이날 발송에서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 이 수용 시절이 문 닫기 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피해자들 증언을 통해 살펴봤다.

취재 이야기가 궁금해 지난 4일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을 공동 연출한 서지원 PD와 전화 연결했다. 다음은 서 PD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방송은 끝냈지만 마음 계속 무거워"
 

<시사 직격>의 한 장면 ⓒ KBS

 
-지난 3월 31일 방송된 KBS 1TV <시사 직격>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 공동 연출하셨잖아요. 방송 끝낸 소회가 어때요?
"사실 방금도 출연하셨던 피해자분이랑 통화를 나누고 있었거든요. 아직 진화위의 조사가 개시되지도 않고 국가 차원에서 밝혀질 수 있는 그런 방법들이 게시되지 않아서 피해자분들도 조금 답답해하시는 것 같고 그 마음을 제가 아니까 방송은 끝냈지만 좀 마음이 계속 무거운 것 같습니다."

-부산에 1970년대까지 있었던 부랑 시설 영화숙과 재생원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이건 어떻게 취재하게 되셨어요?
"2022년 11월쯤 부산 지역 신문 기사를 하나 보게 됐어요. 그 기사를 보고 저도 '그때 이런 일이 진짜 있었다고? 이게 가능하다고?'라고 놀라기도 해서 기회가 되면 한번 취재를 해보고 싶은데 그럼 나 말고도 다른 취재진이 취재를 시작하지 않을까 했죠. 제가 그때는 경제 특집을 준비하고 있어서 취재를 할 수는 없었고요. 경제 특집 끝나고 1월쯤에 그 기사 관련해서 찾아봤는데 여전히 다른 신문이나 방송사에서 취재하지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라도 한번 취재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혹시 이런 거에 관심이 있었나요?
"형제복지원 사건도 알고는 있었고 또 코로나 지나면서 수용 시설에 대한 문제들이 많이 사회적으로 불거지기도 했잖아요. 그래서 수용 시설 관련한 취재를 직접 진행해 본 적은 없지만 뭔가 문제가 있고 기회가 되면 한번 취재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근데 영화숙과 재생원에 대해서는 저도 그 이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영화숙과 재생원,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소개 부탁드려요.
"전쟁 후 소위 부랑아 부랑인이라고 하죠. 그런 분들을 사회복지 차원에서 수용해서 밥도 주고 치료도 해주고 잘 케어를 해서 사회에 내보낸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부랑아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1950년대 작은 고아원으로 출발을 했는데 1960년대 들어 방송에도 등장했던 이순영 원장이 인수하고 이 기관이 굉장히 확장됩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숙 재생원 모습을 1960년대부터 갖추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이순영 원장이 설립한 건 아닌가요?
"아니에요. 원래 법인은 동대신동에 있었지만, 영화숙 시설 자체는 장림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작은 규모의 고아원으로 출발했던 걸로 보여요. 그때 당시 부산의 이런 고아원이나 부랑인 수용시설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설립 인가 신청서를 부산시에다가 제출했었어야 했거든요. 그 당시 기록을 봤을 때는 초창기 다른 분이 운영하고 있었고 규모가 작았었습니다."

-영화숙과 재생원이 없어진 지 50년이 지났는데 왜 모를까요? 저도 아예 몰랐거든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관련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당시에 이곳을 기억해야겠다나 기록해야겠다고 관심을 갖고 계속 꾸준히 기록해온 주체도 없었던 것 같고요. 이번에 부산시도 만나봤지만, 관련한 기록들을 갖고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식으로 답변을 하시는 걸 보니 기록이 없어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 같고요. 

한편으로 제가 만난 당시 주민들이나 피해자분들 중엔 영화숙과 재생원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기억을 하고 계신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근데 이분들이 있었음에도 이거를 더 많이 알려야겠다고 생각하셨던 분들은 없으셨던 것 같고요."

-방송 보니까 그 당시 문제 제기가 있었잖아요. 언론에도 나온 것 같던데.
"맞습니다. 원장이 공금 횡령이나 이런 부분들이 당시에 기사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이후에 결국 문을 닫게 됐어요. 그걸로 사람들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개인 차원에서는 그냥 우리의 불행으로만 생각해서 더 이상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결국 반복되는 거잖아요"

-가장 처음에 뭐부터 취재를 시작했나요?
"일단 피해자분들 네 분 정도가 피해자 모임을 갖고 계셨어요. 그래서 피해자분들을 찾아뵙고 사전 인터뷰를 길게 들었습니다."

-그 당시 영화숙과 재생원에는 몇 명이 있었나요?
"제가 지금 당장 기억이 안 나는데 저희 방송에 아마 영화숙과 재생원에 1200명 이상으로 수용했던 거로 추정하고 있거든요."

-피해자인 조상철(가명)씨 이야기로 처음 시작하셨잖아요. 왜 구성을 이렇게 하셨어요?
"조상철 선생님이 식사하시다가 저희가 예상치 못하게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그리고 저희는 음악 들으시는 줄 몰랐는데 식사하시다가 갑자기 본인이 자주 들으시는 음악이 있다고 하면서 '고아'라는 노래를 트시더라고요. 보통 밥 먹다가 울진 않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우세요. 그래서 그걸 보고 시청자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제일 처음에  조상철 선생님이 식사하시는 모습으로 시작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시설에선 남자만 받은 건가요?
"아니요. 여성분들도 수용이 되었던 걸로 기억하고 계시고 실제로 여성 수용자 사진도 있었던 걸로 확인이 됐어요. 하지만 지금 연락이 닿는 분들은 남자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남자 수용소가 상대적으로 컸습니다. 수용 인원도 많았고요."

-끌려가는 게 형제복지원하고 비슷한 거 같던데.
"아주 비슷했습니다. 그냥 아예 길에 보이는 좀 남루해 보인다거나 저희 방송에도 보면 나오지만, 가출한 애 같아 보이는 행색을 딱 보고 애들을 데려갔고요. 지금 관점에서 보면 거의 납치죠. 또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부모가 옆에 있는 게 보이지만 아이와 엄마가 손잡고 가다가 손 놨을 때를 노려서 아이를 납치하는 일들도 빈번했던 거로 피해자분들은 기억하고 계셨어요."

-영화숙은 폭행과 감금이 일상이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거의 말보다는 주먹이 늘 먼저였다고 하고요. 저희가 만난 모든 피해자들이 말씀하시는 게 한결같이 다 맞았다고 하세요."

-성폭행도 있었나 봐요?
"맞습니다. 아무래도 계급이 있는 공간이었고 또 계급이 높은 사람이 낮은 원생들을 함부로 대하다 보니 그 연장선에서 성폭행도 빈번히 일어났다고 하고요. 많은 분에게 이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거기서는 먹을 것을 제대로 못 먹은 거 같아요. 1960년대면 어려운 때잖아요. 그래서 못 먹은 건지 아님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그때 우리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긴 했지만, 일례로 봤을 때 영화숙, 재생원 직원분들은 아이들 끼니에 대해서 전혀 챙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왜냐면 미군이나 다른 해외 복지 기관들에서 구호물자들이 그 당시에 굉장히 많이 들어왔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아이들 기억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미군 트럭이 와서 뭔가 박스 같은 걸 두고 가는데 그 음식들을 직접 먹어본 적은 거의 없다는 거죠. 

또 영화숙, 재생원이 농장이라든가 축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 농장에서 기른 농작물도 있었고 젖소도 있었어요. 그래서 우유도 있을 텐데 그런 것들을 먹었던 기억은 갖고 계시지 않은 거죠."

-당시 숙소를 재현하셨잖아요. 왜 하셨어요?
"사실 가장 힘든 부분들이 뭐였냐고 했을 때 가혹행위 이런 것들도 있었지만 잠자리 부분이 모두 한결같이 되게 힘들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인원들이 굉장히 빼곡하게 잤고 그것이 굉장히 불편했다고 했는데 저희도 칼잠이라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아마 시청하시는 젊은 시청자분들도 어떻게 자는 건지 가능한지 모르실 것 같아서 안전에 만전을 기해 숙소를 직접 지어보고 당시 비슷한 체구의 아이들로 한번 직접 잠자리를 재현해서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촬영했었습니다."

-이순영 원장 아들은 국회의원도 출마했고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맞습니다. 아들이 결국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출마도 했었고 자서전이나 자기 선거 공보물에 보면 아버지 이름을 거론하면서 자랑스러운 사회 사업가란 식으로 아버지를 굉장히 자랑스럽고 되게 존경할 만한 인물로 묘사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희가 이분이 그 당시 영화숙, 재생원에 대한 기억이 있을 수 있잖아요. 때문에 죄를 묻지 않아도 목격자일 수도 있으니까 찾아뵙고 당시 얘기 좀 더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자택으로 추정되는 곳까지 가서 뵀지만, 아무튼 미국에 있다고만 하고 전화도 계속 받지 않아서 연락이 닿지 않아 아쉽게 나오긴 했는데 기회가 되면 다음에라도 직접 만나 뵙고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부랑 시설 잔혹사가 계속 나오고 있잖아요. 더 있을 가능성 있을까요?
"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고요. 실제로 그때 당시에 전후 사회복지 사업 관련해서 서울 다음으로 굉장히 활발했던 곳이 이 부산 지역이더라고요. 그때 시의 보조금도 있었고 해외 기관 해외 복지 구호 단체들도 굉장히 많이 있었던 곳이 바로 부산이었어요. 그러면서 이 사회복지 사업이 '사업'으로 된 거죠. 이게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사업적인 모델로써 기능을 했던 부분이 있더라고요. 영화숙, 재생원이 없어지고 난 다음에 바로 형제복지원이 1970년대 생겨서 1980년대까지 운영됐던 이 구조도 가능했던 게 아마 그 당시 사회복지사업을 '사업'으로 알아보고 이걸 운영을 했던 사람들이 계속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해요. 더 많은 공간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재하며 느낀 점이 있을 것 같은데.
"가장 큰 건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는 거예요. 50년 넘는 세월 동안 가슴 속에 묻어 있던 자신만의 불행, 불운이 아니라 우리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알아야 될 중요한 기록으로 남겨줬으면 한다는 마음이 있고요. 두 번째는 제가 주민분들을 만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만났을 때 다 지나간 얘기인데 '뭘 다시 꺼내냐'나 '그 사람들 돈 바라고 그러는 거 아니냐'란 얘기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기록하지 않으면 결국 반복되는 거잖아요. 모르고 있으면 다시 이런 일이 또 일어나는 거고요. 그리고 수용시설 관련한 문제는 탈시설 논의부터 해서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결국 떨어진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해요."

-취재했는데 방송에 안 나온 게 있을까요?
"서울에 계신 영화숙 피해자분들을 몇 분 찾았어요. 그분들과 만나는 장면도 찍었는데 분량이 넘쳐서 그분들과 만나 더 서로 연대하고 힘을 내자란 얘기하는 모습들이 편집됐습니다."
서지원 시사 직격 영화숙 재생원 수용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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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와 이영광의 '온에어'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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