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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꼭 참아야 하는 것

식사 준비에 대한 주부의 고충... 남편들도 알고 함께 나눠야

등록 2023.04.11 04:49수정 2023.04.11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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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밥에서는 해방되셨어요?"


주부 안식년 첫 번째 기사에서 진정한 안식년은 '밥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된다고 썼던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종종 내게 물어온다. 내 대답은 아쉽게도 아직 "노(NO)!"이다. 나는 지금도 밥을 하고 있다. '밥'은 여전히 내 '일'이고 아무도 대신 해 주지 않는다.

"오늘 저녁은 뭐 먹어?"

아이가 말을 하면서부터, 아니 결혼하고 남편과 둘이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식구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아온 질문이다. 식구들은 '밥(食)을 함께 먹는(口)'이라는 그 단어의 뜻처럼 내 얼굴을 보면 밥부터 생각이 나는가 보다.

그렇잖아도 딱히 저녁 메뉴가 떠오르지 않아 고민스러운데 세 식구가 돌아가며 밥 타령을 하면 간신히 누르고 있던 짜증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만다.

"나도 몰라. 그냥 주는 대로 먹어!"


75년이나 밥을 맡아온 엄마

영혼을 담은 앙칼진 목소리와 머쓱해 하는 식구들의 표정, 어딘지 익숙하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우리 엄마도 그랬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두부 한모와 콩나물 백원어치를 외상으로 가져와 저녁을 준비하셔야 했던 엄마는 "뭐 해먹지?"와 "지겨워"를 입에 달고 사셨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부족한 식재료로 엄마는 늘 새로운 메뉴를 준비하셔야 했다. 그렇게 차려진 반찬들도 몇 젓가락 스치고나면 그대로 물려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것저것 반찬의 가짓수를 늘리다보니 엄마로서는 매 끼니 상을 차려내는 것이 참 고역스러운 일이었을 테다.

하지만 엄마의 이런 고충은 아랑곳 없이, 도마 위에서 칼이 토닥이던 소리가 나에게는 마치 타악기의 연주처럼 들렸다. 밥상 위에 차려질 맛난 반찬에 대한 기대를 넘어 안정감과 평화로움까지 느끼게 해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엄마의 눈총을 받아가며 또 물었었다.

"엄마, 오늘 저녁은 뭐 먹어?"

열 살 때부터 밥을 하기 시작하셨다니 올해로 밥의 구력(?)이 75년이나 되는 엄마는 지금도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다. 그리고 힘들어 하는 엄마를 위해 설거지라도 거들려고 하시는 아버지를 번번히 내치시면서도 팔순이 넘어서까지 밥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신다.

이제 적당히 하셔도 된다고 말려보지만 누군가는 끼니를 챙겨야 하고, 한 끼 외식비를 가지면 일주일을 살 수 있다는 계산 때문에 여전히 싱크대 앞을 못 떠나신다. 어쩌면 30년 후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를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며칠 전 저녁 메뉴로 남편이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이려는데 남편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내 마음속의 한숨 소리를 들었던 건지, 안식년을 부르짖는 아내에게 밥을 얻어 먹으려니 눈치가 보였던 건지, 아님 낼모레 환갑의 나이가 되어서야 철이 드는건지, 자기가 끓여보겠다고 나섰다. 나는 "됐어!" 하려다가 자리를 내주었다.

아내들도 퇴직할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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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끓여준 김치찌개에서 밥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 심정화

   
김치는 얼마만한 크기로 썰어야 하는지, 물은 얼만큼이나 부어야 하는지, 고기 잡내를 없애기 위해서 된장과 고추장을 얼마나 넣는지, 불 조절은 어떻게 하고 몇 분 동안이나 끓여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묻는데 당장이라도 숟가락을 뺏어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안 들어도 꾹 참아야 했다.

남편의 첫 번째 김치찌개는 제법 먹을 만했다. 아니 국물이 약간 텁텁한 것만 빼고는 기대 이상으로 아주 훌륭했다. 찌개 한숟가락에 칭찬 한 마디씩을 얹으며 한 냄비를 맛있게 다 비웠다. 평소 표현이 없는 남편도 자신의 숨겨진 요리 재능을 발견한 것이 뿌듯해서인지, 저녁을 먹는 내내 이어진 내 칭찬이 기분 좋아서인지 입꼬리를 연신 씰룩거렸다.

안식년에도 결코 해방될 수 없을 것만 같던 밥! 백발에 허리가 꼬부라져서까지 밥을 하다가 싱크대 앞에서 코 박고 죽을 것 같았던 내 암울한 미래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면 아내들이 홀대한다고 서운해 하는 남편들이 많다. 평생 가족들을 위해 일했는데 더이상 돈을 못벌어오니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억울해한다. 하지만 아내들이 남편을 홀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들도 퇴직할 나이가 되어 쉬고 싶은 것이다.

남편 밥에는 가끔 꾀를 부렸어도 아이들 밥 해먹이는 일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열심히 살아 온 인생이, 아이들 대학 보내고 이제 좀 편안해지려는데 집에 들어앉은 남편의 밥을 또 챙겨야 하니 부아가 치미는 것이다.

남편들은 일을 그만두고 쉬어도 되는 나이를 나라에서 강제로 정해주는데 아내들은 그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하니 퇴직한 남편이 어떻게 반가울 수 있겠는가. 남편도 아내도 각자의 일터에서 평생 똑같이 일을 해왔고, 이제 똑같이 기운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 퇴직 후에는 집안 일을 함께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앞으로도 밥으로부터의 해방은 불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끝까지 꿈은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안식년에 적어도 김치찌개로부터는 해방되었으니까. 이제부터 시작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주부안식년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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