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6 16:37최종 업데이트 23.04.1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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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중명전 1층에 을사늑약 강제 체결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왼쪽부터)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이완용,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 권우성

   
을사오적들은 오늘날뿐 아니라 당대에도 당연히 미움을 받았다. 물리적 공격도 받았지만, 욕도 많이 먹었다. 그중에서 인상적으로 욕을 먹은 것이 군부대신 이근택(1865~1919)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교권을 넘긴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의 핵심인 당시 40세의 이근택은 이완용·권중현·박제순·이지용과 함께 거국적 지탄의 대상이 됐다. 이때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한 말이 있다. "나는 다행히도 죽음을 면했다"라는 말이다.


당시 역사를 담은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근택의 그 한마디가 주방의 가사도우미 귓속으로 들어갔다. 이근택의 며느리인 한씨가 결혼할 때 데리고 간 몸종이었다.

며느리 한씨는 이토 히로부미에 맞서 을사늑약 체결을 저지하다가 징계를 받고 연금됐다가 늑약 직후 풀려난 한규설의 딸이다. 한규설은 1910년 국권침탈 뒤에 일본이 주는 남작 작위도 거부했다. 바로 그 한규설의 집에서 노비로 살다가 이근택 집에서 일하게 된 여성이 이근택의 그 말을 부엌에서 듣게 됐던 것이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 여성은 주방에 있던 난도(鸞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짐승 잡을 때 쓰는 제례용 칼을 손에 쥔 그는 주인집 가족들 앞으로 다가가 이렇게 소리쳤다.

"이근택! 너는 대신이 되어 나라의 은혜를 입은 게 얼마나 많으냐. 그런데도 나라가 위태한데 죽지 못하고, 한다는 말이 '나는 다행히 면했다'이냐? 너 정말 개·돼지만도 못하구나. 내 비록 천한 사람이나, 어찌 개·돼지의 노비가 될 수 있겠느냐? 내 칼이 약해서 너를 만 동강이로 벨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차라리 옛 주인한테 돌아가겠다!"

<매천야록>은 이 여성이 한규설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노비의 이름은 알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근택 집 사람들은 그를 제압하지 못하고 집 나가는 것도 지켜만 봤다. 칼을 손에 쥔 그의 기세에 그 집 식구들이 눌렸으리라고 볼 수 있다.

격렬한 대중적 증오

노비제도는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조선 체제가 동요한 1894년에 폐지됐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증가된 노비들의 저항으로 인해 조선시대판 노사분규에 지치게 된 노비주들은 종신 세습제인 노비제도보다는 단기 계약제인 머슴제도를 점점 더 선호하게 됐다.

그래서 18세기에 이르면, 머슴이 노비의 대체 노동력으로 부각될 정도로 많아져 굳이 노비를 쓰지 않아도 논밭을 가동할 수 있게 됐다. 머슴 숫자가 많아지면서 발생한 이런 현상이 1801년 공노비 해방, 1894년 노비제 폐지로 이어졌다. 노비제도의 반인간성에 대한 비판과 저항도 원인이 됐지만, 머슴제도라는 대체물이 있어 대지주들이 노비제 폐지를 수용한 측면도 컸다.

이근택 집의 가사도우미가 난도를 휘두른 시점은 노비제가 해체된 지 10년이 지난 뒤였다. 그래서 이 여성은 법적으로는 노비도 아니고 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인과 떨어져 사는 외거노비도 아니고 주인집에 사는 솔거노비 출신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노비제 폐지 이후에도 한동안 전통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주인집에 대한 고도의 경제적 의존 때문에 기존의 상하관계에 여전히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하관계의 내용 속에는 '주인에게 욕하는 노비는 교수형에 처한다'는 <대명률직해> 규정도 있었다. <경국대전> 형전과 더불어 형법 기능을 한 <대명률직해>에 이렇게 규정됐기 때문에, 주인에게 대놓게 욕하는 노비들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런 노비는 주인이 사사로이 처형한 뒤 사후에 신고해도 괜찮았다. 법은 노비주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1905년 시점에는 그런 법규가 작동하지 않았지만, 솔거노비 출신 상당수는 여전히 전통적 속박에 억눌려 있었기 때문에 주인에게 함부로 대하기 힘들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하면, 그 여성이 이근택의 말을 듣고 얼마나 화가 났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근택은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인상적 방법으로 봉변을 당했다. <매천야록>에 소개된 낯선 취객이 그다. 양복 차림으로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행차하던 이근택을 발견한 이 취객은 "나는 왜놈인가 생각했더니 이근택이구나"라며 "오적의 괴수가 부귀영화가 이 정도뿐이냐?"라고 조롱했다.

화난 이근택은 취객을 포박해 관아로 보냈고, 극심한 고문을 받은 취객은 "역적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스스로 목을 맸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근택에게 지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을사오적들이 얼마나 격렬한 대중적 증오에 직면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기회주의적 처세술의 화신
 

을사오적 중 하나로 을사늑약 당시 군부대신이었던 이근택 ⓒ 위키미디어 공용

 
1865년 8월 11일 충주의 무인 가문에서 출생한 이근택이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있다. 17세 때인 1882년에 임오군란을 피해 명성황후(민비)가 충주로 피신한 일이다. 구식 군인들이 섞인 한양 시민군의 봉기로 약 1개월간 고종의 왕권이 정지되고 중전이 충주에 은신한 일이 이근택의 역사무대 등장을 가능케 했다.

2005년 3월 <내일을 여는 역사>에 수록된 오연숙 서울대 연구원의 기고문 '이근택, 기회주의적 처세술의 화신'은 "그는 매일 신선한 생선을 민비에게 갖다 바쳤다고 한다"라며 "이 공으로 그는 민비가 환궁한 뒤 1883년에 남행선전관으로 임명되었다"고 설명한다. 바다가 가깝지 않은 지금의 충북 땅에서 매일 같이 신선한 생선을 구해 명성황후에게 성의 표시를 했던 것이다.

명성황후의 신임을 배경으로 무관의 길을 걷던 이근택은 대한제국이 선포(1897년 10월 12일)된 뒤에는 고종의 주목을 끄는 일도 하게 됐다. 을미사변(1895년 10월 8일)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유품을 일본 상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는 거액을 주고 구입해 고종황제에게 헌납했다.

이를 계기로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된 그는 경찰과 군사 부문의 핵심 실세로 부각됐다. 그렇게 해서 비중이 높아진 그를 일본이 집중 공략해 친일파로 만들고 을사늑약에 찬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2권에서 "이근택은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대신들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체결의 찬부를 묻는 자리에서 조약 체결에 찬성함으로써 을사5적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라며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을사늑약 가담으로 인해 이근택은 욕을 먹은 것뿐 아니라 암살 위협에도 노출됐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근택 편은 "1906년 2월 기산도·이근철 등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고 여러 날 치료를 받았다"라며 "나인영·오기호 등이 주도한 을사오적 척살 계획의 척살 대상자로 지목되었으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에도 관계없이 그의 친일은 계속됐다. 위 사전은 그가 1908년 11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이 된 것을 두고 "대한산림협회는 일제가 전국의 산림 측량 등을 목적으로 설치한 단체로 일본인 측량기사를 초빙해 산림 측량 등을 비롯한 산림사업을 주관했다"라고 말한다. 일본이 한국의 산림자원을 장악하는 데도 가담했던 것이다.

군부대신이 일본 스파이 활동

그런 이근택을 위해 일본은 재정적 보답을 후히 해주었다. 그의 나이 45세 때 대한제국이 없어진 뒤에는 일본제국이 그의 인생을 책임졌다. <친일인명사전>은 그의 친일 재산 축적과 관련해 "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19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1938년 10월 11일 서울의 편창제사방직주식회사 노동자 300여 명이 동맹파업을 일으킨 것은 하루 14시간 노동에 대한 대가로 식사 제공에 3원 내지 7원의 월급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근택이 죽은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시기에도 노동자들의 월급은 그 정도였다. 1919년까지 이근택이 받은 월급 133원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대한제국 멸망에 기여한 공로로 자작의 작위도 부여했다. 또 은사공채 5만원권도 지급했다. 원금이 은행에 예치되는 이 공채의 이자를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게 해줬던 것이다.

일본은 을사늑약 직전에도 거액의 돈을 그에게 은밀히 지급했다. 위 오연숙 논문은 늑약 2개월 전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무렵에 30만원이라는 기밀비를 일제로부터 받고 궁중과 부중의 모든 기밀사항을 정탐하여 일본에게 제보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등 그의 친일행위는 극치에 달했다"고 말한다. 군부대신이 조정의 정보를 캐내 일본에 전달하는 스파이 활동까지 겸했던 것이다.

<조선상고사> 저자이자 독립투사인 단재 신채호가 1905년 <황성신문>에 입사할 당시의 논설위원 월급이 30원에서 40원 정도였다. 이근택이 받은 기밀비는 논설위원 1만 명의 1개월치 월급이었다.

이근택의 노비는 "이근택! 너 정말 개·돼지만도 못하구나"라고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근택의 삶은 훌륭했다는 공식 평가를 내렸다. <친일인명사전>은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12월 17일 그가 사망한 일을 기술하면서 "사망 후 일본 천황이 생전의 공로를 인정해 2500원을 주었다"라며 "작위는 장남 이창훈이 이어받았다"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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