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8 11:50최종 업데이트 23.04.1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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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인구 구성이 다양해지고 문화예술의 향기가 풍성해졌는가 하면, 땅과 바다가 환경파괴로 신음한다는 경고음도 들린다. 4·3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는 한편으로는 새 공항 건설을 두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천혜의 땅 제주도를 살기 좋은 평화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제주 사름(람)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편집자말]

가시리 녹산로의 봄날 풍경 오임종 전 4.3유족회장이 가시리 청년회장과 이장을 할 때 마을사람들과 함께 벚나무를 심고 유채꽃을 파종해 오늘날 멋진 풍경의 기초를 닦았다. ⓒ 황의봉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녹산로는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힌다. 봄이면 벚꽃과 유채꽃이 동시에 만발해 10여㎞에 달하는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가 펼쳐진다. 대한민국 100대 아름다운 길로도 선정돼 육지 관광객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최고의 봄날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아름다운 가시리 마을에도 1948년 4·3의 광풍이 불어닥쳤고, 인구의 절반가량이 희생돼 제주도에서도 대표적인 비극의 현장이 됐다.

동네 집집마다 같은 날 제사

1959년 가시리에서 태어난 오임종 어린이는 10살이 될 무렵,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력 11월 21일이면 하루에 네 분의 제사를 지냈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작은할아버지. 그뿐만 아니라 동네 집집마다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이게 뭐지? 이상하네.'


오임종 어린이가 자라면서 조금씩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4·3이라는, 상상도 못 했던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자신의 집안뿐 아니라 가시리 마을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살아남은 마을 어른들로부터 "너희 할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좋은 분"이라는 말을 들으며 청년 오임종은 결심했다. '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어도 모두들 쉬쉬하고, 위령탑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는가. 나라도 나서야 할 일이 아닌가.'

오임종은 가시리 청년회장이 됐고, 4·3유족 청년회 창립(초대 회장이 현 오영훈 제주지사)에 동참해 운영위원을 한 데 이어 4·3유족회 표선면 지회장을 맡았다. 2021.2.1.∼2023.1.31에는 제주4·3 유족회장으로 10만 유족을 대표해서 4·3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농장에서 일하는 오임종 전 유족회장 골드키위 농장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오임종 전 4.3유족회장. 그는 제주도 최초로 골드키위를 뉴질랜드에서 들여와 재배하기 시작했다. ⓒ 황의봉

 
지난 1월 말 유족회장의 임기를 마친 그는 이제 본업인 농장 일로 바쁘다. 표선면 오봄농장에서 골드키위를 키우고, 감귤도 재배한다. 제주 4·3 75주년을 맞은 올해 추념식은 극우 인사들의 연이은 망언 퍼레이드와 4·3을 폄훼한 현수막, 자칭 '서북청년단'의 등장으로 그 어느 해보다도 어수선하게 치러졌다. 평범한 농부의 일상으로 돌아온 그를 만나 30여 년에 걸친 '4·3운동'의 사연과 최근의 사태에 관한 생각을 들었다. 4·3 유족이 된 내력부터 들어봤다.

"태어나 보니 할머니가 집안의 가장이셨습니다. 4·3 때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가 희생되셨어요. 그러니까 저는 유족 2세인 셈이죠. 할아버지 형제들이 여섯 분이었는데, 그중 한 분이 당시 행방불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돼 네 분이 처형당하신 겁니다.

1948년 음력 10월 보름날 토벌대가 해안에서 8㎞ 떨어진 중산간 마을 가시리 전역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표선리로 소개해 표선국민학교에 수용했습니다. 음력 11월 21일 토벌대가 수용자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킨 후 가족 전부가 소개해온 집안과 그렇지 않은 집안을 나눴다고 합니다. 이날 우리 집 어른들 네 분이 '손가락 총'(손가락으로 지목)에 걸렸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버들못이란 곳으로 끌려가 집단학살을 당한 겁니다. 모두 73명이 한날한시에 죽임을 당한 엄청난 사건입니다. 행방불명된 작은 할아버지의 부인도 집단학살 한 달 후 역시 처형됐습니다."


집안 남자들이 몰살되다시피 한 후 그의 할머니는 남편과 시부모의 시신을 수습해 불에 타버린 자신의 집터에 묻었다. 그리고 무덤 옆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평생을 무덤지기로 산 셈이다. 집단학살 사건 당시 아버지는 10살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외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할아버지가 집 뒤 우영팟(텃밭)에 있다가 지나가던 토벌대의 조준 사격으로 쓰러졌다. 이유도 모른 채 당한 죽음이었다.

"요즘 어머니가 치매로 투병 중인데, 주무시다가 일어나 '순경 와신디 제기 곱으라'고 하십니다. 순경 왔는데 빨리 숨으라는 겁니다. 어머니의 의식이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현장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얼마나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리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먼저 떠난 가족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평생을 보내셨고요."

1994년, 35세의 오임종은 가시리 마을 청년회장이 된다. 4·3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진상을 조사하고,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을 세우자는 생각에서였다. 청년회원들을 동원해 가시리 마을의 정확한 피해실태를 파악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마을 어디에 어떤 집들이 있었는지 그림을 그려놓고, 그 집에 누가 살고 있었으며, 자식은 몇 명이나 되는지를 일일이 다 조사했다. 이렇게 해서 파악한 가시리 마을의 희생자가 621명으로 1200여 명 가시리 인구의 절반에 해당했다.

이장 되던 해  4·3특별법 통과
  

21년 만에 전부 개정된 4.3특별법. 4.3희생자 등에 대한 배·보상을 위자료 형식으로 지급하는 것과 추가 진상조사, 희생자 특별재심 등 명예회복과 상처 치유를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2021.2.26 ⓒ 제주4.3유족회

 
"당시 마을 자체적으로 피해 실태를 조사한 것은 아마도 가시리가 처음일 겁니다. 신문사 특별취재반에서 찾아와 기사가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가장 먼저 경찰이 달려와 이 사업 안 하면 안 되겠냐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주도의회 4·3특위에서도 찾아왔는데, 가시리에 위령탑을 세울 게 아니라 제주도 전체 차원에서 하나로 뭉쳐 위령탑을 건립하자고 제의하길래 맞는 말이다 싶어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의 아름다운 녹산로가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만 해도 오솔길 정도로 좁았던 길이 강태훈 군수 시절 확장되었는데, 이때 그가 회원들과 함께 갓길에 벚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5년 후 가시리 이장이 됐을 때는 유채꽃을 파종해 녹산로가 명품 길로 탄생하는 기초를 닦았다.

1999년 그가 이장이 되던 해 마침내 연말 국회에서 제주도민의 숙원이었던 4·3특별법이 통과됐다. 이때부터 그는 희생자 신고 업무를 맡게 된다.

"가시리 마을의 희생자 조사를 하다가 이젠 신고 업무를 하게 된 것이죠. 희생자 신청을 받고 보증인을 첨부해서 당국에 접수하는 일이었어요. 육하원칙에 따라 기록을 하면서 신고 업무를 처리했는데, 막상 신청을 받아보니까 마을 전체적으로 400여 명밖에 올라오질 않아요. 200여 명이나 누락된 겁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50여 년이 지나 희생자 신고 접수가 이루어지다 보니 당시 4·3을 직접 겪었던 체험자들이 대부분 사망한 데다가 가족이 몰살된 경우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신청 못 한 희생자가 많았던 것 같아요. 4·3 때 제주도민 2만 5천에서 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공식 추산하고 있지만, 실제 신고된 숫자가 1만 5천 명 미만인 것과 비교하면 가시리의 경우도 대충 맞아떨어지는 셈이지요."


제주4·3 유족회는 10만 회원을 포용하고 있는 제주 지역 최대 규모의 단체다. 4·3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하게 죽은 이를 위령하는 것은 물론, '빨갱이' 누명을 쓰고 죽거나 감옥살이를 한 이의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하는 등 수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국가보상금 첫 지급 2022년 11월 7일 4.3평화교육센터에서 4.3희생자에 대한 국가보상금 첫 지급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맨 오른쪽이 오임종 유족회장. ⓒ 제주4.3유족회

 
최근 진행되는 보상금 지급도 민감한 이슈다. 지난해 개정된 4·3특별법은 희생자에게 9천만 원의 국가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현행 민법상 상속권이 있는 유가족들이 수령할 수 있도록 했다. 보상금이 적정한지에 대해서 이견들이 있을 수 있고, 후유장해 희생자의 경우 장해등급을 3개 구간으로 나눠 차등 지급하도록 한 데 대해서도 이견들이 제기된 바 있다. 유족회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물론 유족회 내부에서 보상금을 더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오기도 했지요. 그러나 국민이 지지하는 선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이상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이 모인 겁니다. 대신 유족들을 보듬는 사업을 정부에 요청하자고 했습니다. 보상금 신청 대상 희생자가 약 1만 5천 명 정도인데, 이 중에 2천여 명은 유족이 없어 국고에 귀속될 전망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보상' 개념을 도입해 미래세대를 위한 사업에 쓰도록 하자고 건의했고, 이를 법률에 담은 것이지요.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4·3과 관련한 교육도 하고, 연구인력도 확충해야 합니다."

오임종 전 유족회장은 취임하면서 4·3과 관련한 미국의 책임 문제를 밝히고 사과를 받는 일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 문제에 진전이 있었을까?

"제주4·3은 미군정 하에서 시작된 일이고, 미군이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미국의 책임을 묻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작년에 워싱턴에서 이 문제로 세미나도 열고 했습니다만, 아직은 갈 길이 먼 형편입니다. 정부 차원에서 사과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고, 미국 언론을 움직여 미국 정부를 압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과거 노근리 사건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미국 대통령이 유감 표명한 적이 있었지요. 또 미국 국회의원들을 설득해 의회가 정부에 압박하도록 하는 길도 있습니다만, 어느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꾸준히 노력해나가야 합니다."

작년 여름 휴가차 제주를 찾은 문재인 전 대통령을 만났고, 가을에는 문 전 대통령의 거주지인 양산 평산마을 사저에서 제주4·3 유족회가 기증한 '평화의 나무'를 함께 심기도 했다. 그가 만나본 문 전 대통령의 제주4·3에 대한 인식은 어땠을까.

"문 대통령의 4·3에 관한 생각이나 태도는 추념사에 나오는 그대로입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4·3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제주도민을 위로하는 것으로 저는 느꼈습니다. 문 대통령과 대화를 해보면 이분이 제주도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학생 시절부터 제주도를 좋아했다는 것이고, 제주에 오면 모든 게 잘 풀린다는 이야기까지 하시더군요. 2013년 한라산에서 백록(하얀 사슴, 실제로는 노루였을 것이라고 함)을 봤다고도 하고, 젊었을 때 가족들과 제주에 와서 만장굴을 갔는데 갑자기 500만 번째 입장객이라는 축하 폭죽이 터지더라는 겁니다. 이때 기념품도 받고 신문에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평화의 나무' 기념 식수 2022년 10월 19일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 앞마당에서 4.3유족회가 기증한 '평화의 나무'를 심고 있는 문 전 대통령 부부와 오임종 유족회장. ⓒ 제주4.3유족회


4.3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10만 유가족을 대표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4·3 때 집안 어른이 네 분이나 희생당한 가문의 후손으로 오 전 회장은 이번 4·3 75주년 추념식을 전후해 벌어진 일련의 이념공세나 폄훼 사태에 대해 어떤 심경이었을까?

"이보다 더한 경우를 많이 겪었기에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빨간색을 덧칠하는 이념논쟁으로 국론을 분열시키는 일은 더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 나타난 서청(서북청년단)이 정말 서청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어떤 단체가 4·3을 흔들기 위해 서청을 표방한 사람들을 보냈고 현수막을 내걸며 조직적으로 일을 벌인 것이라고 봅니다. 윤석열 당선자가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는데, 대통령 취임사에서 국민통합보다는 '자유'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을 듣고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하는구나, 올 게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3을 둘러싼 석연치 않은 분위기는 75주년 추념식 전후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우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4·3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하는 국무총리 산하 4·3위원회 위원들의 임기가 올해 6월로 만료되는데, 후임 인사들이 대거 보수 성향의 인물로 채워질 경우, 향후 4·3문제를 다루는 방향이 왜곡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미 4·3을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했던 김광동 씨를 진실화해위원장에 임명했는가 하면, 정부가 채택한 4·3진상보고서를 폄훼해온 김태훈 변호사를 4·3위원회에 결원이 생기자 새 위원으로 임명한 사례가 있고 보면 심각한 우려가 아닐 수 없다.

"행정안전부에서 하는 일인데, 그런 우려가 현실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작년 추념식 때 요직에 계신 분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윤 당선자 주위에 4·3위원회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감싸고 있어 나중에 틀림없이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어요. 요즘 상황을 보면 현재의 위원들이 재임명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극우적 성향을 지닌 분들이 새로운 위원으로 채워진다면 내년 말까지 진행할 추가 진상조사 결과가 4·3위원회 승인 과정에서 논란을 빚을 수도 있어 걱정됩니다. 물론 4·3위원회에 정당 추천 인사가 들어가고 유족 대표도 있기는 합니다만..."
  

4.3유족회와 경우회의 화해 과거 대립하고 반목해왔던 두 단체가 제주시 신산공원과 4.3평화공원에서 화해와 상생 8주년 기념 합동참배 행사를 가졌다. 2021.8.2 ⓒ 제주4.3유족회


가시리 마을 청년회장이 되어 위령탑이라도 세워야겠다며 시작한 오임종 전 유족회장의 4·3운동이 이제 30년을 맞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시점에서 제주4·3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어디에 두어야 할까, 그의 생각을 물었다.

"지금까지 4.3의 완전한 해결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사실 완전한 해결이라는 게 모호한 점이 많아요. 사망하신 분들은 어떻게 해야 완전한 것인지, 유족들은 어떻게 해야 완전하게 위로를 해드리는 건지 답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작년부터 정의로운 해결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게 설득하기도 좋고 논리적으로도 맞는 말입니다. 인권존중 평화교육 같은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담기에도 좋은 목표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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