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8 21:27최종 업데이트 23.04.18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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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보도자료 ⓒ 문화재청


한때 '학생 의거' 정도로 평가됐던 4·19가 세계사적 사건으로 승화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가 '4·19혁명 기록물'에 대해 등재권고 판정을 내린 것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문화재청은 17일 자 보도자료에서 이 사실을 전하면서 "등재가 권고된 '4·19혁명기록물',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오는 유네스코 집행이사회(5.10-5.24)에서 최종 등재 승인을 앞두고 있다"고 한 뒤 "대한민국은 최종 등재가 승인되면 총 18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발생한 또 다른 민중 궐기인 1919년 3·1운동은 동아시아에서 승승장구하던 제국주의에 일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25년 전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도 반일 코드가 담겨 있었지만, 반외세·반봉건 기치를 내건 동학에서는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냥 일본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졌다. 3·1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대한 명확한 반대 표시였다.

3·1 운동이 세계사적 의의를 띠었다는 점은 같은 해에 발생한 반제국주의 투쟁인 중국 5·4운동과 인도 스와라지(자치)운동은 물론이고 베트남·필리핀·이집트·터키 등의 독립운동이나 민중운동에 영향을 준 데서도 나타난다.

역사상 최악·최첨단의 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한 가지 방식을 보여주면서 피압박 민족들의 피를 들끓게 했다는 점에서 3·1운동은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다.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 운동에 두는 것은 제국주의에 짓밟혔던 나라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4·19 역시 당연히 소중한 자산이다. 4·19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세계사적 의의를 띠었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이승만의 부정선거·장기독재·민간인학살에 대한 투쟁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영향권 내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부조리에 맞선 저항이었다.

미국 지배체제와 그 배후의 미국 자본주의는 말로는 자유와 민주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세계 각지의 독재정권을 후원하고 냉전 구도를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다. 미국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가 갖는 모순을 노출시킨 사건이 4·19였다. 이런 점에서 4·19는 3·1과 맥이 닿는다.

4·19의 의의는 세계적 파급력에서도 확인된다. 1960년의 이 사건은 일본 민중이 전개하는 안보 투쟁이 그해 5월 19일 절정에 오르는 데 기여했다. 1951년 체결된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으로 격상시키려는 미·일 양국의 시도에 맞선 이 운동은 더 이상 전쟁의 희생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일본 민중의 몸부림이었다. 4·19는 그들의 저항이 한 달 뒤 정점을 찍도록 만들었다.

세계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친 기록유산

도널드 트럼프 및 조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미국의 영향력은 세계 곳곳에서 기울어지고 있다. 앞마당인 중남미는 물론이고 아프리카·중동·유럽에서도 동요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계가 현저히 쇠퇴하고 있다. 일례로, 작년 9월 20일에 마키 살 아프리카연합 의장은 아프리카를 우크라이나전쟁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유엔 총회에서 경고했고, '하필이면' 작년 8월 15일에 프랑스 군대를 몰아낸 말리는 지난 2월 5일에는 유엔인권대표도 국외로 추방했다. 4월 7일에는 리비아 남쪽인 차드가 독일대사를 추방했다.

지난 3월 27일부터 아프리카 순방에 나선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아프리카 여성을 위한 10억 달러 지원 계획, 탄자니아에 대한 5억 6천만 달러 지원 계획 등을 공약한 것은 아프리카에서 중·러에 밀려 점점 왜소해지는 미국과 서방세계의 처지를 역설적으로 반영한다. 이 외에, 중동의 사우디와 유럽의 프랑스가 미국에 대해 삐딱한 태도를 보인다는 점은 언론보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렇게 미국의 권위가 세계적으로 약해지는 것과 대비되는 현상은 동북아에서 한국의 윤석열과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와 대만의 차이잉원 같은 '미국 충신'들이 활약하는 것이다. 태평양만 걷어내면 중국·소련과 맞닿는 미국이 북태평양 방어를 위해 한·일·대만을 더욱 옥죄는 결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측면도 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었던 시기가 바로 4·19 때였다. 유럽의 경제적 연대와 제3세계의 비동맹운동 등으로 인해 195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의 권위가 약해졌다. 이런 흐름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더욱 옥죄는 일이었다. 이는 미국의 영향력이 동북아를 발판으로 다소나마 되살아나는 데 점차적으로 기여했다.

이 시기에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억지로 화해시키는 한편, 일본과의 동맹관계를 격상시켰다. 이에 대한 일본 민중의 저항이 안보투쟁이었다. 이 투쟁을 한층 고무시킨 것이 바로 4·19였다.

4·19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3·1운동처럼 이 사건도 세계적 파급력을 과시했다. 위의 문화재청 보도자료는 4·19혁명 기록물의 의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권고를 통해 제3세계에서 최초로 성공한 비폭력 시민혁명인 동시에 유럽의 1968년 혁명, 미국의 반전운동, 일본의 안보투쟁 등 1960년대 세계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친 기록유산으로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4·19가 오랫동안 학생의거 정도의 평가밖에 받지 못한 것은 이 운동의 주체세력이 기득권 구조를 타파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운동이 갖는 반미 코드와도 무관치 않다. 문화재청 보도자료에도 나타나듯이, 4·19는 친미진영 민중들이 지배체제에 대항하도록 부추기는 기능을 했다. 미국의 영향력이 세계 어느 지역보다 강력한 곳이 일본과 더불어 한국이라는 점은 4·19의 반미 코드가 적극 규명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를 설명한다.

4·19는 위 보도자료에 열거된 국가들뿐 아니라 튀르키예(터키) 같은 데도 영향을 끼쳤다. 1960년 4월 30일 자 <경향신문>에서 이에 관한 인상적인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세계 역사상 이번 한국 학생의 의거처럼 성공적인 것은 없었다"라고 한 뒤 "4·19의거는 전 세계적으로 절찬을 받았으며 이미 일본이나 토이기(土耳其) 같은 나라에서는 '한국 학생을 본받아라'는 스로강을 내걸고 데모운동이 전개 중이라 하니"라고 보도했다. 4·19를 본받자는 슬로건이 일본과 튀르키예를 움직이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표하는 기사였다.

세계사적 의의가 매우 지대한 사건
 

의에 죽고 참에 살자(1960.4.19.) ⓒ 문화재청


2020년 8월 <민족문학사 연구>에 실린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의 논문 '4월혁명의 국제적 파장과 반란의 1960년-일본의 안보투쟁과 터키의 5월정변과의 비대칭적 인식을 중심으로'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미국의 군사동맹체제에 긴박되어 있는 한국·일본과 터키에서의 학생 반란은 의도와 관계없이 미국 등에게는 탈미의 움직임으로 해석되어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를 뒤흔드는 위기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 등은 이를 일련의 반미제국주의 투쟁으로 자리매김하고 이를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뒤흔드는 절호의 기회로 해석하였다."

2020년에 <한국불교학> 제94집에 실린 김성철 동국대 교수의 논문 '탄허학으로 조명한 4·19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는 "불교뿐 아니라 동양사상 전반에 해박했던 탄허스님은 1960년에 일어났던 4·19혁명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1960년대에 일어나서 세계를 뒤흔들었던 구미 학생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평한다.

그런 뒤 2016년에 개최된 '4·19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이트 등록을 위한 국제학술대회' 발표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공과대학 인문사회과학부 교수가 저항운동가인 토머스 헤이든의 말을 인용한 사실을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헤이든은 한국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우리와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독재자 이승만을 끌어내렸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기쁨에 들떴다. 그 운동을 통해서 나는 냉전의 역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의 부모 세대가 자유세계를 위해 싸웠다'는 우리의 순진한 믿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 운동이 SNCC(학생 비폭력 협력위원회)와 남부의 흑인운동이 활력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있다."

이처럼 4·19는 세계 여타 지역에서 미국 지배체제의 모순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미국 내부에까지 침투해 미국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알고 보면, 세계사적 의의가 매우 지대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선언했다. 4·19의 세계사적 의의를 음미해 보면, '불의에 항거한'의 '불의'가 이승만 정권의 불의뿐 아니라 미국 패권주의의 불의까지 포함한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4·19혁명을 증언하는 기록물이 조만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다. 4·19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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