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4 04:59최종 업데이트 23.04.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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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영화 <송암동>의 특별상영을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특전사 K의 새로운 증언을 비롯한 송암동 일대 사건을 연속 보도하면서,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날인 5월 27일까지 펀딩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5.18민주화운동 중 광주 송암동 일대 민간인 학살(5월 24일)을 증언한 당시 특전사 11공수여단 소속 K. ⓒ 이희훈


'방하착(放下著)'.

인터뷰를 마친 특전사 K가 불쑥 이 세 글자를 꺼냈다. 불교에서 "내려놓으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K는 1980년 5월 24일 광주 송암동에서 겪은 일을 "생사의 갈림길"이라고 표현했다. 그 이후에도 "몇 달 동안 귀가 멍했다"고 떠올렸다.

"지금도 생생할 수밖에 없는" 그때의 기억은 그만큼 더욱 K를 괴롭혔다. 끔찍한 생각이 들 때마다 K는 "방하착"을 되새겼다고 한다. 그는 지난 43년 세월을 곱씹으며 "내려놓는다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털어놨다.

지난 3월 24일, 4월 11일 두 차례 <오마이뉴스>를 만난 K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43년 만에 처음 세상에 공개했다.

"젊은이들을 막 잡아 왔어요"
 

5.18민주화운동 중 광주 송암동 일대 민간인 학살(5월 24일)을 증언한 당시 특전사 11공수여단 소속 K. ⓒ 이희훈


"(계엄군들이) 주위에 가서 젊은이들을 막 잡아 왔어요. (잡혀 온 사람들은) 포승줄에 묶여서 고랑에 엎드린 사람도 있었고, 서 있는 사람도 있었고요. (계엄군) 몇몇이 엎드린 사람들 등 위에 올라가 쭈그리고 앉아서 대검으로 조샀어요. '내 전우를 죽여?' 그러면서 대검으로 등을 콕콕 찌른 거죠. 묶인 사람들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랬고요. 근데 갑자기 H 소령이 나타나서 '야, 비켜 비켜' 하더니 탕탕탕. 고랑에 엎드린 사람들도 탕탕탕, 서 있는 사람도 그대로 탕탕탕."

이 모습을 불과 2~3m 거리에서 목격했다는 K는 '몇 명 정도 총에 맞았나'라는 질문에 "글쎄요. 숫자를 세진 않았으니까. 그냥 많았어요. 대략 20여 명"이라고 답했다. K의 이 같은 증언은 반인도범죄로 볼 수 있는 학살이자 43년이 흐른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다.

K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11공수여단 소속이었다. 계엄군이 5월 21일 광주 시내에서 물러나면서 11공수여단은 주남마을에서 외곽 봉쇄 임무를 맡았었다. 그러다 5월 24일 오전 1시께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오후 1시 30분께 이동을 시작했다.

5.18 직후 11공수여단이 작성한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전투상보)'에 따르면, 당시 군용트럭 54대(2½톤 42대, 1/4톤 10대, 3/4톤 1대, 5/4톤 1대)와 APC(병력수송장갑차) 2대(선두와 후미 각 1대씩)가 줄지어 이동했다. 맨 선두 APC에 탄 K는 함께 그곳에 있던 인물로 11공수여단 63대대 조창구 중령(대대장), 차정환 대위(작전장교) 등을 거론했다.

"선두 APC에 타서 가고 있는데 지프차가 왔어요. 63대대 조창구 대대장, 작전장교(차정환), 당번병(김OO)이 APC로 옮겨 탔죠. 정보장교는 그 지프차를 타고 되돌아갔고요. APC 해치(개구부)에 캘리버50(기관총)을 거치하고 그 주위에 (모래를 담은) 마대를 쌓아놨어요. 작전장교(차정환)가 '아이고, 선배님 앉으십쇼'라고 해서 나는 APC 안에 앉았고 작전장교는 위쪽에서 (해치에 몸을 절반 정도만 내밀고) 총을 쏘면서 갔죠. 그러다 갑자기 빠앙, 빠앙, 빠앙, 빠앙."

오인교전이었다. K가 말한 이 사건은 송암동에 주둔 중이던 전투교육사령부(보병학교 교도대)가 11공수여단을 시민군으로 착각해 공격한 사건이다. 교도대는 90mm 무반동총으로 K가 타고 있던 APC를 공격하는 등 집중 사격을 이어갔고, 11공수여단 또한 이에 대응하며 서로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11공수여단 소속 9명이 사망하고 33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중엔 K가 APC에 함께 있었다고 말한 차 대위(사망)와 조 중령(중상)도 포함돼 있다.

"세 발인가, 네 발인가 맞았는데 막 불길이 통과하면서 (APC 안을) 지나갔죠. 엔진이 땅에 쿵 떨어져서 차는 멈췄고 내 철모는 벗겨져서 바닥의 핏물, 내장 위에 떠 있었고요. 철모를 다시 주워서 쓰고 도로가 도랑에 복지부동으로 있었어요. 그때 조창구 중령은 팔이 떨어져서 껍질만 달랑달랑했고. (차정환 대위 등) 나머지는 거의 토막 살해가 돼 버렸죠."

"파리 목숨 돼버렸죠"
 

5.18민주화운동 중 광주 송암동 일대 민간인 학살(5월 24일)을 증언한 당시 특전사 11공수여단 소속 K. ⓒ 이희훈

 
K는 도랑에 숨어 버틴 시간을 "1시간 정도"로 기억했다.

- 당시 떠오르는 모습이 있나요?

"당시 벚꽃은 안 피었고 벚나무가 쭈욱 있었어요. 잎과 줄기가 촤악촤악 떨어졌죠. 총알이 하도 막 오가니까요. (오인교전이 종료된 후) 나중에 보니까 2½톤 트럭은 벌집이 돼 있더라고요. 바닥의 탄피는 뭐 말할 것도 없고요."

- 오인교전은 어떻게 해서 마무리됐나요?

"(도랑에 숨어) 그러고 있는데 1시간 정도 지나니까 전방에서 '사격을 중지하라, 사격을 중지하라' 소리가 들렸어요. 메가폰으로. 그때 교도대장 김OO 중령이 (사격 중지 명령을) 한 것이었죠."

- APC에 있었는데 부상을 입진 않았나요?

"그때 제가 갖고 있던 총이 쫘악 찌그러져 있더라고요. 파편이 튀어 권총에 맞은 거죠. 그 권총 없으면 저도 죽었겠죠. 그래도 작은 파편이 몸에 다 배겼었죠. 보급장교였던 오OO 소령이 '바지 한 번 내려 봐'라고 해서 내렸더니 피가 나고 있었죠."

K는 이처럼 오인교전 후 도로 옆 논에 앉아 부상을 수습하던 중에 앞서 언급한 학살 상황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 오인교전이 종료된 후 어떤 상황이 이어졌나요?

"잠잠해지긴 했는데 애들(계엄군들)이 그 주위에서 젊은 사람들(오인교전과 관련 없는 일반 시민)을 잡아 오고 그러더라고요."

- 오인교전인 걸 인지하지 않았나요? 

"사격을 중지하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알았죠."

- 그런데 왜 사람들을 잡아 왔을까요?

"(이전에) 시민들이 무장했었잖아요. 우리(계엄군)도 피해를 많이 봤고요. 그러니까 머리가 돌아버린 거예요. '내 전우를 죽였네' 그러면서요. 그래서 젊은이들을 다 잡아 와 버린 거죠. 그래서 포승줄로 묶여서 엎드려 있는 사람들 위에 올라가 대검으로 막 조샀던 것이죠."

- 조샀다는 게 어떤 의미죠?

"대검으로 이렇게 등허리를 (콕콕) 찍은 거죠. 뒤에서."

- 대검을 총에 착검한 채로요?

"아뇨. 그냥 손으로요. (밑에 사람들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러고 있고요. 근데 그때 H 소령이 '야, 비켜 비켜' 하면서 쏴버린 거죠. 엎드린 사람이고 (서 있는 사람이고) 뭐고 M16 소총으로 탕탕. 서 있던 사람은 앞으로 떨어지고 엎드려 있던 사람은 그대로 파리 목숨 돼버렸죠."

- 대략 몇 분 정도로 기억하시나요?

"글세요. 숫자를 세진 않았으니까. 그냥 많았어요."

- 대략 최소 몇 명 정도였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20명."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 봉주영

 

ⓒ 영화 <송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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