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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마을의 기적같은 이야기 "보시게, 아직 잠기지 않은 게 있어"

소리와 함께 반짝이던 옥천 군북면 막지리의 지난날... 풍물, 물에 잠긴 고향을 길어올리다

등록 2023.04.29 18:15수정 2023.04.2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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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 막지리 주민 이수길씨 휴대폰에서 찾은 막지리 옛 주민들 사진. ⓒ 월간 옥이네

 
마을을 점령한 굴삭기가 집터를 부쉈다. 집터가 으스러진 지 반나절이 채 안 돼 마을은 단숨에 물속에 잠겼다.

배구를 좋아하던 주민들이 안방처럼 드나들던 솔밭, 선조부터 성심껏 일궈온 귀하고 비옥한 논밭, 사공이 배를 띄워 길을 만들던 맑은 물과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진 은빛 모래밭, 까까머리 아이들이 줄지어 등교하던 마을 길... 주민들은 날망에 올라 이 모든 것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물이 덮친 것은 마을만이 아니었고, 마을을 덮친 것도 그저 물만은 아니었다.


1만 평의 넓은 솔밭, 인접한 안내면 장계리까지 뻗은 은빛 모래밭은 4km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총 경지면적 99.5ha, 이 중 73.6ha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수몰 이전 가구 수 130여 호, 인구는 750여 명. 300여 명 어린이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마을에 22가구만이 남았다.

땅이 유독 기름졌던 금강변 금싸라기 농지에 보리농사 흥하던 농촌 마을은 순식간에 살길을 잃고 무참한 폐허가 됐다. 대청호가 들어서며 수몰된 충북 옥천군 군북면 막지리 이야기다.

이수길(82)씨는 아버지의 고향이자 할아버지의 고향, 자신의 삶의 터전이 물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모습을 쓸쓸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마을에 남아 막지리를 지켰다. 마을의 역사를 지키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리하여 떠나간 이들이 내리고 간 뿌리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누군가 돌아왔을 때 조금이나마 떳떳하게 웃어 보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이런 그가 문득 옛 시절이 떠오를 때 펼쳐보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막지리 풍물 이야기다.

여기 아직 잠기지 않은 것이 있어


"여길 보시게. 세월 속에도 물속에도 아직 잠기지 않은 것이 하나 있어. 바로, 이 풍물이지."

그가 마을회관 2층 창고 문을 열자 마을의 오랜 꽹과리와 장구, 북과 징이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만에 빛을 머금은 꽹과리가 금방이라도 짱짱한 소리를 낼 듯 의기양양 번쩍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수길씨의 눈빛이 악기 위에 쌓인 세월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우리 아버님은 1917년생이셨어. 아버지가 청년이던 시절에도 우리 마을은 풍물을 놀았지. 아버님이 징을 치던 모습이 기억나. 어디 아버지뿐인가. 막지리 풍물 이야기를 하려면 마을 사람들을 다 끄집어내야 하는걸. 그때 옛사람들 그 이름 다 불러야 끝나는 이야기야. 저 물속에 들어있는 것들까지 다 꺼내는 얘기지. 풍물 이야기가 곧 막지리 이야기인 거야."

때는 1978~1979년, 이수길씨가 마을 이장을 보던 때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내면 막지리가 군북면 막지리가 되고, 머지않아 대청댐이 들어선다는 소문으로 마을에 토지 매매 열풍이 불며 다소 어수선하던 때. 그는 군북면 최연소 이장을 맡게 된다.

"우리 마을이 중봉충렬제 농악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옥천군 대표로 충북농악제에 나가게 된 거야. 다른 동네는 면 단위로 팀을 이뤄 출전하는데, 우리는 충북 유일 마을 단위 풍물단이었지. 그렇게나 크고 바글대던 동네였어. 이전에도 우승한 이력이 있었다지만, 이때 기억은 특히 선명해.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지기 전 마을 이름을 걸고 나간 마지막 대회였을 거야, 이때가. 한마디로 걸어댕길 줄 아는 사람들은 다 출동했던 거야."

이수길씨가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사진 몇 장을 꺼내어 내민다. 사진 속 인원만 서른 명이니, 지금 막지리 맥기마을 인구보다 많은 수다. 무등을 타던 어린이만 6~7명, 현재는 막지리에서 어린이라곤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40여 년 전 희미한 얼굴들을 가리키며 한 명 한 명 그 이름을 차례로 불러본다.

이수길씨는 마을 이장으로 풍물단 연습을 주관하고, 주민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상쇠와 부쇠만 3명, 장구와 북이 각각 5명, 징 2명을 비롯해 무등과 기수, 소고까지 총 30여 명이 이 대회에 참가했다. 새납(태평소)을 잘 부는 사람을 수소문해 옆 마을 군북면 석호리 진걸에서 데려온 한 사람이 유일한 외부인이었다. 마을이 바글바글했다며 당시를 추억하던 눈빛이 촉촉하게 일렁인다.

"우리 마을은 원래 풍물로 아주 유명한 마을이었어. 풍장 치는 것이 일상이고 생활이었지. 무엇이 연습이고 무엇이 놀이인지 구분하지 않았어. 모두가 놀고 즐겼지. 지금은 물속으로 사라졌지만, 만 평 가까운 널따란 솔밭에 모여 풍물을 놀았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막지리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곳에 모여 풍장을 쳤어. 아이들은 어른들의 연주에 맞춰 소고를 치며 무등(상쇠의 목말을 타고 춤추고 재주 부리는 것)을 배웠고, 채를 쥐여주면 몸에 붙은 막지리 가락을 금방 표현할 줄 알았어. 평생을 듣고 자랐으니 그 장단이 이미 피에 흘렀던 게지.

여기 사진 속 아이들도 그냥 애들이 아냐, 풍물에 관해서라면 하나씩 자기 특기를 지닌 사람이었어. 그랬기에 마을 사람들은 어린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대하는 법을 알았어. 지금 그 애들이 벌써 손주를 보고 할아버지가 됐다더군. 이젠 전국으로 다 흩어졌지만."

대회를 위해 주민들은 매일 같이 솔밭에 모여 풍물을 치며 웃음꽃을 피웠다. 대회에 나가지 않는 이들 중 손재주가 좋은 여성들은 광목천을 떼다 바느질을 해 풍물복과 모자를 만들었다. 대회 출전 여부를 떠나 모든 주민의 눈과 마음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그야말로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대회 날 해가 밝자 막지리 주민들을 태운 수십 대의 차들이 옥천을 떠나 청주로 향했다.

1979년 청주야구장에서 열린 제5회 충북농악제에서 옥천군 대표로 출전한 막지리 풍물단은 최우수상을 거머쥔다. 당시 상쇠로 꽹과리를 연주한 마을 주민 김봉학씨는 개인 특별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누렸다. "칠채에 모두 능한 풍물단은 막지리가 유일하다"는 심사위원장의 평가는 이수길씨의 귓가에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막지리 풍물은 당당히 충북 최고 자리까지 올라선다. 

"막지리 풍물을 이야기하면서 이 사람, 이 김봉학 이름 세 글자를 빼놓으면 쓰나. 사물놀이를 창시하고 보급한 그 김덕수의 작은 아버지라오. 김덕수의 아버지이자 김봉학씨의 형님 김문학씨도 우리 마을 사람이고, 김덕수 고향도 우리 막지리 아닌가. 그런데 우리 막지리에선 그 김덕수보다도 김봉학, 이 사람을 더 알아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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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첫번째는 1979년 제5회 충북농악제 출전 당시 소고를 치며 재주를 부리던 무동들. 마을 청소년·어린이로 구성됐다. 두번째는 충북농악제 출전을 알리는 막지리 기수들. 사진 속 깃발에는 한자로 '군북면 막지리'라 적혀 있다. 이수길씨는 마을이 수몰되며 깃발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세번재는 풍물복을 입은 상쇠 깅봉학씨가 꽹과리를 들고 단체 최우수상과 개인 특상을 수상하고 있다. 트로피를 든 사람이 이수길씨. 트로피는 군에 기증했다. (사진제공 : 이수길씨) ⓒ 월간 옥이네

 
막지리 풍물 속 영원히 살아 숨 쉴 이름, 김봉학

막지리 풍물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 바로 김봉학씨다. 그는 막지리 풍물을 이끄는 상쇠로, 막지리 풍물 전성기를 만든 주역으로 주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기억된다. 그 이름에 반가움을 느낀 강천호씨가 입을 열었다.

"막지리에서 김봉학씨 이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막지리에서 풍물을 잡았다 하면 연주하는 가락이 김봉학, 그 양반이 알린 가락인걸. 그때 김봉학씨 집은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회관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술 한잔 걸치면 신들린 사람처럼 꽹과리를 쳤는데 그 솜씨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어. 그 양반 집 방바닥에 농악이 철썩 붙어있다고 그랬어. 김봉학씨가 꽹과리를 잡으면 납작 붙어있던 농악이 벌떡 일어나 논다고." (강천호씨)

"김덕수 아버지 김문학씨가 전라도 남사당패에서 풍물을 익혔다고 그래. 그 집안 의가 좋았으니 그걸 김봉학 씨가 따랐을 테고. 기존 가락에 남사당패 가락이 섞여 들면서 우리 마을 장단으로 보급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 마을 농악은 다른 마을 장단과 달리 특별했거든. 치는 수준은 물론이고, 장단이며 가락이 분명 달랐어. 아마 그 양반 영향이 아닌가 싶어." (이수길씨)

김봉학씨가 상쇠를 잡으면, 마을 곳곳에서 나타난 주민들이 자연스레 뛰어들어 풍물을 즐겼다. 김봉학씨 집을 시작으로 풍장을 치면 그 소리가 막지리 구석구석 머물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특별한 날에는 더더욱 풍물 소리가 마을 전체를 얼싸안고 한바탕 쥐고 흔들었다. 김봉학씨의 집에서, 1만 평 솔밭에서, 10리에 달하는 은빛 모래밭에서도 그 울림은 일 년 내내 멈추지 않았다.

"내 기억이 있는 한은 사묵 쳤어. 안 치는 날을 세는 게 빠를 정도라니까. 술 먹고 치고, 그냥 노는 걸로 치고. 그런 건 그냥 허다한 일상이고 명절이나 절기에 맞춰서도 쳤지. 정월대보름 전날부터 보름날까진 지신밟기를 하느라 치지. 대보름날에 물속에 잠긴 돌탑이랑 선돌 앞에설랑 반드시 마을 제사를 올리는데, 그때도 사묵 치지. 그러곤 2월 초하룻날 또 놀고." (이수길씨)

"그뿐인가요. 농사 시작을 알리면서 치고, 음력 5월 단오에는 짚으로 동아줄을 만들어 미루나무에 그네 묶어 탈 때 또 한바탕 치고. 음력 7월 7일에는 한 열흘 이상 노는데, 이때가 가장 길게 풍물 치는 때였어요. 남의 집 농사일 봐주던 이들도 휴가가 끝난다고 다 나와서 흥겹고, 자기 집 일하는 사람들도 섞이고. 아주 대대적이었어요, 그땐." (강천호씨)

이어서 추석이 다가오면 또 한 번 풍물을 쳤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이라도 어린 시절을 막지리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망설임 없이 장단 속으로 뛰어들었다. 술상을 봐놓은 집 앞에서도 치고, 손님이 오면 환영의 의미로도 쳤다. 생기복덕을 가린다는 10월 초사흘에도 풍물이 빠지지 않았다. 그런 곳이 바로 막지리였다.

"명절에는 김문학씨가 아들 김덕수씨를 데려와서 또 한바탕 별난 풍경이 벌어졌어. 김덕수씨 5~6살 때 아주 자그마한 맞춤 장구를 걸치고 와서 풍물을 쳤지. 상모도 잘 돌렸고, 그때부터도 실력이 출중했어. 아버지 손 꼭 잡고 막지리에 매번 왔다오. 막지리 핏줄에 더해 전국을 돌며 장구를 배웠다고 하니 지금처럼 유명해지지 않을 수가 있나. 김봉학씨 환갑 때도 와서 또 놀았던 기억이 있고. 지금도 여기 김봉학씨 삼 형제 산소가 있으니 명절이면 들어와서 인사 올리고 가요."(이수길씨)

"농사한다고 치고, 농사 안 한다고 치고. 쉰다고 치고 일한다고 치고. 농촌에서 그런 말이 있을 정도라면 말해 무엇하겠어요. 일 년 내 사묵 친 거지." (강천호씨)

[다음기사]
마을은 잠겼지만 소리는 남았다... 김덕수 배출한 풍물의 고장 https://omn.kr/23n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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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군 막지리 수몰 이전 주민들이 모여 풍물을 치던 솔밭 (사진제공 : 이봉주씨) ⓒ 월간 옥이네

 
월간옥이네 통권 70호(2023년 4월호)
글‧사진 서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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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지리풍물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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