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천황의 어전에서 실시되는 대본영회의 '대일본제국헌법'상 쇼와 천황은 육해군의 대원수로서 그 통수권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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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천황은 제국 헌법 아래서 명실상부한 '육해군의 대원수'였으므로, 군부가 그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전면전쟁을 강행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쇼와 천황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선택지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반대의 뜻을 강경하게 굳히지 못하고 개전 강행에 동의했다.
그리고, 처음에 본인이 품었던 우려와 달리 개전 직후의 일본군이 서구 열강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자 쇼와 천황은 이를 매우 흡족해했고, 이러한 성공을 일구어 낸 도조 히데키 대장을 총애했다. 도조 히데키 대장은 기존의 내각총리직과 육군대신직 뿐만 아니라 육군참모총장, 외무대신,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 등 여러 직책을 겸임하며 독재적 권력을 구축하고 헌병대를 이용해 반대파를 억눌렀는데, 이는 제국의 유일한 주권자인 천황의 동의와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도조 정권에 대한 쇼와 천황의 신임은 전황의 악화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도조 정권의 퇴진으로 쇼와 천황의 현실 인식이 바로 잡히지는 않았다. 보도가 통제되고 육해군이 스스로의 실책을 은폐하는 가운데, 쇼와 천황은 제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정확하고도 가장 방대한 정보를 보고받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제국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군부가 주장하는 반격의 성과에 헛된 기대를 걸며 '종전 공작' 제안에 미지근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레이테만 해전의 참패와 가미카제특공대의 등장으로 군부가 주장했던 실질적 반격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오히려, 절체절명의 국면에서 쇼와 천황은 적극적으로 작전에 개입하며 국민들의 희생을 극대화시켰다.
쇼와 천황은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지구전 수행을 위해 부득이하게 비행장을 포기한 오키나와의 제32군의 방침에 노여움을 드러내며 '비행장 탈환'을 채근했다. 천황의 채근을 거스를 수 없었던 제32군은 결국 무리하게 비행장 탈환을 시도하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는 오키나와 방어전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관련 기사:
부상병에 '청산가리 우유'... 일본 교과서에서 삭제된 또다른 비극 https://omn.kr/23ect).

▲무리한 비행장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일본군 장병들 점령된 요미탄비행장에 '강행착륙'하여 일시적으로 그 기능을 마비시키는 피해를 입힌 '의열공정대원', 급조폭탄을 어깨에 두르고 전차로 돌격하다가 사살된 소년병,콘크리트 블럭 무게추를 허리에 두른 특공기의 파일럿 등의 사진이 남아있다.(오키나와 구 해군사령부호 소장)
박광홍
뿐만 아니라, 쇼와 천황은 '항공기가 모두 특공에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수상함대는 어째서 놀고 있느냐'며 해군 군령부를 꾸짖었다. 레이테만 해전으로 연합함대가 궤멸되면서 일본해군에 의한 유의미한 수상작전은 이미 불가능한 것이 되어 있었지만, 해군은 감히 천황의 꾸중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전함 야마토를 비롯한 잔존함대가 오키나와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한 '해상 특공'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항공 엄호나 가용연료를 확보하는 것조차 지극히 곤란한 상황에서 강행된 수상 특공 작전은 당연히 파국으로 귀결되었다. 오키나와로 향하던 일본 해군 제2함대는 미군의 공습을 무력하게 얻어맞고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전함 야마토와 경순양함 1척, 구축함 4척이 격침되고 4044명의 해군 장병이 수장되는 동안, 미군은 겨우 13기 정도의 함재기를 잃었을 뿐이다(관련 기사:
사상 최대규모 일본 전함은 왜 '자살작전' 내몰렸나 https://omn.kr/1y3ui).

▲미군의 맹폭을 받는 전함 야마토 충분한 연료는 물론 항공 엄호조차 보장받지 못한 일본군의 잔존 함대는 미 해군항공대의 공격에 무력하게 궤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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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천황의 무리한 작전 개입으로 수많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미 파멸 직전까지 내몰린 제국 일본에는 연합군에 제시할 수 있는 협상의 카드조차 거의 남지 않았으므로, 이전에 제안된 '종전 공작'조차도 이미 비현실적인 발상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소련은 일본 측의 종전 중재 의뢰를 단칼에 거절하고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쇼와 천황을 평화의 옹호자로 미화하는 측에서 이야기하는 종전의 '성단'이 이때 비로소 등장한다. 군부가 4가지(천황제 유지, 일본의 주권을 보장하는 점령, 일본에 의한 자체 무장해제, 일본에 의한 자체 전범재판)를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고집하는 가운데, 쇼와 천황은 외무부의 뜻에 따라 '천황제 유지'라는 한 가지 조건만을 걸고 연합군과의 교섭에 나설 것을 결정했다. 천황제 유지를 타진하는 일본 측을 향해, 미국은 전후 천황의 지위가 '연합국군사령부의 제한 하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회신했다(관련 기사:
"일억 국민 쓰러져도..." 일본 군인이 지키고자 했던 것 https://omn.kr/1ural).
이 애매모호한 회신에 군부는 극렬하게 반발하며 본토결전을 재차 주장했다. 처음에 외무부의 손을 들었던 쇼와 천황 역시, 군부의 거듭된 반대에 동요하며 '재협상'으로 입장을 선회하기까지 했다. 만주와 북조선으로 진격하고 있는 소련군이 언제 홋카이도로 진입할지, 세 번째 원자폭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천황의 지위를 확답 받기 위해 재협상을 벌인다는 것은 나라의 멸망을 담보로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원로들과 외무부의 간절한 설득으로 쇼와 천황은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군부의 반대를 무릅쓴 포츠담 선언 수락의 '성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이 성단은 당시 많은 이들에게 '일본 국민을 위한 결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 해도, 천황의 이름으로 310만에 달하는 국민들이 전쟁에서 죽어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에 대한 협조로 기회를 엿보던 고노에 전 총리조차, '천황이 퇴위하고 절에 은거하며 전몰장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을 정도였다.
아무런 책임 지지 않고... 여생을 마쳤다

▲방일한 레이건 미 대통령 부부를 환영하는 쇼와 천황(1983년) 전후 일본을 접수한 미국은 일본에서의 대미협조 체제 구축을 위해 쇼와 천황의 존재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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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천황이 재판을 받는 일, 퇴위나 은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1989년까지 천수를 누리며 일본의 천황으로서 여생을 마쳤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결여된 채 그의 생일이 '쇼와의 시대'를 기념하는 축일로 지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천황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과 국가폭력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시민들은, 여전히 '쇼와의 날'에 대한 의문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국민을 희생시키고도 책임을 회피한 지도자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역행은 비단 일본 사회만의 일이 아니다. 이 지점이야 말로,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역사를 들여다보고 화해를 도모하는 풀뿌리 단계의 연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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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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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만 국민 죽었는데... 책임지지 않은 자를 기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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