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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간 사촌동생, 깐족대는 그를 누른 '빽도'

[넘버링 무비 255]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빽도>

23.05.04 18:02최종업데이트23.05.0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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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도(Back-Do)
한국단편경쟁 섹션
한국 / 2023 / 16분 / 컬러 / 
감독 : 차경민
출연 : 이도은, 정용훈, 태경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빽도>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1.
설날, 친척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정민(정용훈 분)과 수민(이도은 분) 남매는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것이 아니다. 수민은 아직 취직을 하지 못해 백수로 지내는 중이고 정민 역시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삼수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큰집에 즐비한 어른들의 화려한 과거가 두 사람의 어깨를 더 무겁게 짓누른다. 서울대, 서울대, 그리고 또 서울대다. 어지간하면 이 두 사람도 집안 어른들의 걸음을 따라 쉽고 편하게 인생을 살아갈 법도 할 텐데, 그 뛰어난 유전자에 누가 못된 장난을 쳤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집안에서 정민과 수민 남매가 미운오리새끼인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한참 분위기가 서먹해질 무렵 사촌동생 재영(태경 분)이 의기양양하게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한 손에는 빛나는 서울대 합격통지서가 들린 채로다. 당연하게도 가족 어른들은 난리가 난다. 언제 준비했는지 어느새 두 손엔 플래카드까지 들렸다. 환대도 이런 환대가 없다. 이때까지 뜨거운 눈총만 받으며 잘못한 것도 없이 잘못한 사람처럼 무릎 꿇고 앉아 있던 두 남매에게는 이 장면이 못내 서운하다.

집안 어른들의 대를 이어 한국 최고의 명문대학에 당당히 입학한 재영과 인생이 영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정민, 수민 남매.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사소한 자존심 싸움으로 인해 펼쳐지게 된 세뱃돈 전부를 건 내기 윷놀이 한판으로 옮겨가게 된다. 보통의 경우 친척들이 둘러앉아 던지는 윷놀이가 친목과 화합의 상징이라면, 이 영화 <빽도> 속의 윷놀이에서는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적통(嫡統)인 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겨루는 유전자 사이의 치열하고도 유치한 대결이랄까.

02.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면 영화 <빽도>는 성적제일주의가 야기하는 많은 문제들을 담고 있는 무거운 작품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 문제가 하나의 가족 내에서 벌어짐으로 인해 더 쉽게 비교되고 큰 차별을 받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강점은 이야기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코미디 형식을 빌려 그려낸다는 것이다. 극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주제 의식은 다소 무거울 수 있지만 이를 다루는 형식은 가볍게 가져감으로 인해 전체의 무게감을 조절하는 모습이다.

영화를 구성하는 전반적인 부분들 모두가 그렇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쭐거리는 사촌 동생 재영의 모습은 물론 두 남매가 조금은 과하게까지 열등감을 느끼는 모습들조차 이 영화가 차용하고 있는 형식의 문법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후 펼쳐지는 윷놀이 장면을 통해서도 윷가락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경쾌한 소리와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묵직한 타악곡, 빠르게 전환되는 화면의 속도감 등을 통해 그 호흡을 잃지 않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물론 이와 같은 방식의 연출은 30분이 채 되지 않는 단편 영화의 특성 때문에 더욱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런 매체의 특성을 감독이 잘 이해하고 활용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빽도>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3.
친척 조카 동생이 원했던 부루마블 게임이 아니라 정민의 윷놀이가 이들의 대결 종목으로 정해졌다는 것부터가 이 게임이 순수함을 배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초에 각자의 세뱃돈이 걸린 내기에서 순수라는 단어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윷을 쥐고 자세를 잡는 몸짓부터 서로의 말이 놓인 말판의 거리를 가늠하는 눈빛까지,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서로를 향한 독기가 맺혀 있다. 돈도 돈이지만 재영은 재영대로 덜떨어지는 이 남매에게 작은 게임 하나 져주고 싶지가 않고, 남매는 들어오는 순간부터 우쭐거리는 저 사촌동생 놈의 코를 이 게임으로라도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

"도도 아니고 빽도, 진짜 어울리는 결말이네. 아~ 빽도 인생이네 지금 보니까."

함께 모인 4개의 말이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와 도착을 한 칸 남겨둔 상황, 사촌동생 재영의 승리가 확정적인 상황에서 수림이 던진 윷가락이 빽도가 되어버린다. 어떻게든 윷과 모를 내어 골인을 목전에 둔 그의 말을 잡아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앞으로 나아가도 모자랄 판에 뒤로 가게 생겼으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재영의 참을 수 없는 깐족거림과 더 이상 방법이 없어 보이는 상황의 허탈함. 그때, 정민이 소리를 지른다. 두 사람의 말 하나가 출발 지점의 바로 한 칸 앞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빽도'가 이 게임을 끝내기 직전이었던 재영의 말 모두를 한꺼번에 잡아내는 순간이다.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빽도>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4.
지금 마지막 기회처럼 여겨지는 순간에도 꺼지지 않는 마지막 희망이 존재한다. 이 영화의 타이틀이자 핵심 소재나 다름없는 '빽도'에 담긴 의미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뱃돈 전부가 걸려있다고는 하지만 이 조잡한 윷놀이 한 판을 이겨봐야 취직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대학 입시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자존심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자존심이 밥을 먹여준다는 말이 있을까. 이 내기 한 판을 이긴다고 해서 집안 어른들의 시선이 금방 바뀔 것도 아니고 건방진 재영의 태도가 달라질 일도 없다. 하지만 수민 남매는 포기하지 않았다. 되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냈다. 다소 비겁하지만, 애매한 윷을 보고 우기기까지 해 봤다.

그래 그렇다. 살다 보면 막막한 순간들이 참 많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코미디를 기반으로 하는 이 작품에서는 이야기를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풀기 위해서 정민과 수민 남매를 이 혼란한 윷놀이판으로 이끌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풀어냈다. 어쩌면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이야기들을 스크린 속에서 한 번 더 똑같이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관객들의 지친 마음에 닿을 수 없고 일깨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의미가 퇴색되는 일은 조금도 없다. 윷놀이판 바깥에 남는 남매의 현실은 스크린 바깥에 놓인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고, 비유 위의 의미는 다른 대상 위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용하다는 에너지 드링크를 있는 대로 다 쏟아부어 마시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기운까지 빌려 몰입할 정도의 간절함을 현실에서도 보인다면 꿈 역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빽도가 아니라 빽도의 빽도가 거듭 나오는 행운이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할머니의 말씀 중에 '세상에는 확률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단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숫자나 계산된 결과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닌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지나치게 윷놀이에 몰입한 수민은 스치듯 흘려버리고 말았지만, 이 말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지막까지 실패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너무 오랫동안 힘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영화도 이 말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짧은 쿠키 영상에 그 답이 있다.)
영화 전주국제영화제 빽도 차경민 이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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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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