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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략기 진주 활약 정한용 의병장 등에 대한 포상 필요"

이태룡 박사 "일제 침략기 전기 진주의병 연구" 밝혀 ... 노응규 의병장은 포상

등록 2023.05.07 14:31수정 2023.05.0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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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응규 의병장의 상소문 원본(왼쪽)과 사본. 원본은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 소장하고 있는 것이고, 사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탑재된 것으로 ‘일본영사관’ 종이에 원본을 다시 쓴 것이다. ⓒ 이태룡

 
일제침략기(1894~1910년)에 관찰사(경상우도)가 있었던 진주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정한용(鄭漢鎔, 1865~1935) 의병장을 비롯한 본주의소(本州義所)에 참여했던 의병들에 대한 정부 포상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태룡 박사(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는 진주문화원 주최로 오는 8일 오후 국립진주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일제침략기 진주의병 학술회의"에서 "일제 침략기 전기 진주의병 연구"에 대해 발제한다.
 
이태룡 박사는 미리 낸 자료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먼저 의병 관련 인물에 대한 포상이 적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일제강점기 35년을 보내고 광복 후 17년이 지난 1962년부터 의병을 비롯한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2023년 3월 1일 현재 1만 7748명의 독립유공자를 포상하였는데, 의병 공적으로 포상을 받은 이는 2715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 박사는 노응규(盧應奎, 1861~1907) 의병장의 본부의소(本府義所)와 정한용 의병장의 본주의소(本州義所)를 "두 의진의 협력과 의병천하 경상우도"라고 표현하며 당시 진주의병을 주도했다고 기술했다.
 
노응규 의병장은 안의(함양) 출신으로 1896년 2월 진주관찰부를 점령한 후 1만여 명의 경남의병을 2개월 동안 지휘했으며, 이후 의병해산 뒤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아사순국했다. 진주 출신인 정한용 의병장은 최익현(면암)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 드나들었다.
 
이태룡 박사는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 있는 노응규 의병장의 상소문(원본)과 정한용 격문(晉州倡義將收淚傳檄事), 노응규 유고집 <신암유고(愼菴遺稿)>와 정한용 유고집 <직재유고(直齋遺稿)> 등을 분석했다.
 
"일본 군경이 발을 붙일 수조차 없었다"
 
노응규-정한용 의진은 진주는 물론 고성·사천 등지에서 호응한 의병수가 수천 명(1만여 명이었다는 기록도 있음)이었고, 두 의진은 2개월 동안 함께 의병활동을 벌여 경상우도 전역을 의병천하로 만들었다가 의병해산령에 따라 1896년 4월 19일(음력 3월 7일)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 박사는 "노응규의 본부의진과 정한용의 본주의진은 함께 창의한 뜻을 하늘에 고하고, 임진왜란 때의 충신들을 모신 창렬사와 논개 사당인 의기사에도 제사를 올려 민심을 안정시켰다"고 설명했다.
 
이날 행차 시에 나팔수, 고수, 격적홀기와 총을 든 기수가 앞장섰고, 노응규 의병장은 녹색 도포에 사인교를 탔으며, 정한용 의병장은 융복을 입고 말을 탔다고 한다. 의진의 참모들은 갑옷을 입고 말을 탔으며, 총검을 든 의병들이 후진을 형성하였고, 주민들은 갑오왜란 이전의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참례했다는 것이다.
 
의병은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박사는 "두 의소에서는 한 가지 재주, 재능이 있는 사람이면 귀천을 막론하고 선발하고, 행정의 공백을 막기 위해 행정제도를 갑오왜란 이전의 체제로 환원하여 경륜이 높고 사리에 밝은 인물들을 좌수, 호장, 형리, 이방 등으로 임명하였다"고 했다. 두 의진의 의병 세력은 많게는 1만명에 달할 정도였는데, 이태룡 박사는 이 상황을 "일본 군경이 발을 붙일 수조차 없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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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용 의병장 시종원 분시어 임용. 정한용, 시종원 분시어 임용(「관보」 제0609호, 1897.04.13). 정한용과 함께 분시어에 임명된 한창교는 3품, 원익상, 이석진 등은 4품, 송수만은 6품이었으며, 이재관은 당시 23세로 의양군(義陽君)으로 봉해지기 전이다. ⓒ 이태룡

 
두 의진은 일제침략의 교두보였던 부산을 진공하기 위해 김해로 별동대를 보내기도 했다. 이 박사는 "의병들은 김해에서 이틀 동안 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4명을 부상시켰지만, 의병은 4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하여 창원을 거쳐 진주로 회군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제는 진주의병 진압을 위해 육군과 해군을 동원했고, 관군 역시 병력을 증파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병의 군세가 너무나 막강하여 관군이나 일본군이 접근할 수가 없어 다수의 첩자를 투입하여 의진의 동정을 파악하고, 또 유언비어를 만들어서 의진을 허물게 하려는 이간책을 꾀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당시 국왕의 의병해산 과정을 설명한 이 박사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 난신적자를 처단한 후 국왕을 대궐로 모시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창의했고, 창의한 지 10여 일 후에 밀조까지 받았지만,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것이 어명인지라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으니, 의병을 일으켜서 진주부를 점령한 지 꼭 2개월 만이었다"고 했다.
 
정한용 의병장이 노응규 의병장을 삼가(합천) 감옥에 잠시 가두었던 상황에 대해, 이 박사는 "정한용은 노응규 일행을 삼가감옥에 구금했지만 이튿날 새벽 이들을 석방한 후 그도 의병을 해산하고 피신했음이 <해병자열소>에 드러나 있다"며 "의병을 해산하라는 왕명이 내렸다는 풍문은 일제와 그들 앞잡이 관료들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 끝까지 의병 활동을 지속하려고 했던 두 의병장은 의병해산 서찰이 도달한 직후 긴박한 상황 속에 의진 간의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에 생긴 잠시의 오해였다는 것이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의병해산 이후에 대해, 이 박사는 "정한용은 삼가 관아에 주둔하던 500여 의병을 모아 비통한 목소리로 해산식을 거행하자 의병들은 통곡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정한용은 하동의 지리산 자락인 옥산 속으로 몸을 피하고 말았다"며 "새로 부임한 진주관찰사 이항의(李恒儀)에 이어 경남관찰사 조시영(曺時永)은 서리들에게 의병 가담자를 색출, 악형을 가하여 많은 사람이 고초를 겪게 되었고, 거의 당시 두 의진에서 공적으로 유용한 것을 정한용의 형에게 곱절 더 징수하는 바람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고 하였다"고 했다.
 
이후 왕이 그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박사는 "정한용은 자신에게 벼슬이 내린 사실을 몰랐고, 당시 상황이 담긴 자료에도 벼슬길에 나아간 기록이 없는 것은 그가 경남 하동의 옥산 깊은 골짜기에 은거하는 바람에 교지나 조칙을 받을 수 없었다고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정한용은 지리산 속에 은거한 지 10년째 되던 1905년 겨울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소식에 상경하여 분상하였고, 이듬해 면암 최익현이 거의했다가 피체되어 서울로 갔다는 소식에 상경하였다가 구금되었으며, 면암이 대마도로 향할 때 부산항에서 배웅하였고, 순국하여 돌아왔을 때 부산항에 나아가 통곡하는 등 제자로서 도리를 다했다. 줄곧 우국일념으로 보내다가 경술국치 소식에 더 살고 싶지 않아 통분한 생활을 하였는데, 기미년 조선독립선언 소식과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 다시 책을 들었다가 70세가 되던 1935년 별세하였다."
 
그런데 이후 <독립운동사>를 비롯한 역사서 기술 과정에서 노응규·정한용 의진의 의병 해산 과정에 대한 '왜곡'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의병해산 과정에서 소통 부재로 인해 생겼던 오해가 당시 일부 기록에 남게 되었는데, 다른 객관적 자료와 함께 검토하지 않은 채 정한용은 관군에 매수되어 배신하는 바람에 진주의병이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는 왜곡된 소책자가 나왔고, 이를 바탕으로 논저가 뒤따르게 되어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고 했다.
 
노응규(건국훈장 독립장)의 본부의진에 참여했던 노공일·서재기·성경호(건국훈장 애국장)·서은구(건국훈장 애족장) 등은 포상이 되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정한용의 '본주의진'에 참여 의병에 대한 포상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태룡 박사 #의병 #노응규 의병장 #정한용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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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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