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09 04:51최종 업데이트 23.05.09 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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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줄잇는 윤 대통령 퇴진 시국선언... 국민 분노 폭발한 지점 https://omn.kr/23lsm)에서 필자는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이 일본 극우세력이 앵무새처럼 뇌까려 온 두 가지 주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이라고 했다. 윤 정부가 식민지기의 강제 동원(강제 징용)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제3자에게 변제 책임을 지우면서 1965년 한국 정부가 국민의 개인 청구권을 일괄 대리해 일본의 지원금을 수령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세력이 뇌까려 온 두 가지 주장이란 첫째, 식민지기에 한국인 노동자의 강제 동원은 없었다는 것이고, 둘째, 설사 강제 동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1965년 일본과 한국이 맺은 청구권 협정에 의해 한국인 노동자가 일본 전범기업에 손실보상과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모든 권리가 소멸했다는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는 첫 번째 주장을 두고 팩트 체크를 했는데, 여러가지 증거로 미루어 일본 극우 세력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의 권리는 네 가지
  

창원시에 있는 강제징용 노동자상 ⓒ 윤성효

 
이제 두 번째 주장에 대해 팩트체크할 차례다. 과연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동원 노동자가 손실 보상과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모두 소멸했을까. 이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여기에 관련된 권리가 여럿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는 민사상 채권·채무관계에서 발생한 손실에 대한 당사자 개인의 청구권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직결된 일본 기업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은 강제동원 노동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이다. 두 권리에는 각각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이 따라붙는다. 따라서 여기에 관련된 권리는 네 가지가 존재하는 셈이다.

일본 극우세력과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으로 이 네 가지 권리가 모두 소멸했다는 입장을 천명해 왔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법원은 민사상 손실보상 청구권에 대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만 소멸했을 뿐, 나머지 세 가지 권리는 멀쩡히 살아있다고 판결했다. 양측의 입장 차이가 엄청나게 큰데, 도대체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우선 청구권 협정의 관련 조항을 살펴보자.
 
제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 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3. (…)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 체약국의 관할 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 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 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제2조 1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의 범위에 어떤 권리가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고, 학계에서도 논쟁이 진행 중이다. 민사상 청구권에 대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이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했다는 데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니 나머지 세 가지 권리, 즉 일본 기업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은 강제동원 노동자의 손해배상 청구권과 그에 대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 그리고 민사상 개인의 청구권의 소멸 여부가 문제다.

일본 기업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은 강제동원 노동자의 손해배상 청구권과 그에 대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이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되었는지 여부는 그 협정의 성격을 파악하면 금방 가려낼 수 있다. 

식민지 지배와 관련된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하는 일은 없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은 1951년 9월 연합국과 일본이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제4조 (a)항("한반도 지역 내 일본과 일본 국민의 재산과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에 대한 청구권(채권을 포함)의 처리와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의 일본 내 재산과 일본과 일본 국민에 대한 청구권(채권을 포함)의 처리는 일본과 한국 간 특별조정에 맡긴다")을 다루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 문제는 애당초 의제에 오르지도 않았다. 구 식민지 국가가 처해 있던 처량한 처지라고나 해야 할까. 당시 한국 정부는 참석을 강력히 요구했음에도 회의에 초청받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한국은 식민지 피해를 입은 국가가 아니라 단지 일본으로부터 '분리된 지역'으로 분류됐다. 이는 강화회의 전 일본 정부가 연합국 측에 조선과 대만 등 구 식민지는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따라 취득되어 장기간 세계 각국이 일본령으로 승인한 지역이라고 호소한 결과였다.

분리된 지역이란 독립 국가가 제국주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됐다가 다시 독립을 얻은 곳이 아니라, 한 국가의 영토였다가 해당 주민의 요구와 기존 국가의 승인에 의해 별도의 국가로 나뉜 곳을 뜻한다. 이렇게 분류되었으니 식민지 피해 배상은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국제법적으로 조약은 체결 당사국 간에만 법적 효력을 갖기 때문에, 조약 당사국에서 배제된 한국은 조약 준수의 의무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이때 한국은 오히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틀 밖에서 얼마든지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국제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 셈이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특별조정'이란 영토 분리로 생기는 재산, 채권, 청구권의 귀속을 정리하는 일이었을 뿐, 분리되기 전 영토 지배의 불법성은 전제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일 간 협상에서도 식민지 지배의 책임은 포함되지 않았고, 재산, 채권, 청구권의 처리는 단지 민사 차원으로 한정되었다. 식민지 지배로 인한 피해가 의제가 되지 않았으니, 식민지 지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까지 소멸하는 일은 아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사실 청구권 협정 체결 후 한참 동안 한국과 일본 두 정부는 다 같이 이에 부합하는 해석을 내렸다. 즉, 한국 정부는 영토의 분리·분할에서 오는 재정상 및 민사상의 청구권이 해결됐다고 해석했고, 일본 정부도 일본에 의한 조선의 분리·독립 승인에 따라 한일 양국 간에 처리할 필요가 있는 양 국가 및 양 국민의 재산, 권리, 이익,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을 밝혔다.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은 민사상 손실에 대한 청구권이었다는 해석이 양국 간에 공유되었던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식민지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해결된 권리'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직결된 일본 기업의 불법행위로 입은 피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것은 국제법적 근거를 가진 정당한 행위였고, 마침내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승소한 것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단죄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2012년 5월 24일(최종 확정판결이 난 것은 2018년 10월과 11월이다) 대한민국 대법원이 다음과 같이 결론지은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2차 세계대전 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본질과 청구권 협정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한 명판결이었다. 
 
'청구권 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서 (…)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하지 아니하였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아니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민사상 손실에 대한 개인 청구권도 소멸하지 않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일제 강제징용 승소 판결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30일 오후 서울시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강제징용 피해자 원고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2018.10.30 ⓒ 유성호

 
이상에서 일본 기업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은 강제동원 노동자의 손해배상 청구권과 이에 대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은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 즉 민사상 채권·채무관계에서 발생한 손실에 대한 당사자 개인의 청구권은 어떻게 됐을까. 이 청구권에 대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은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당사자 개인의 청구권까지 해결됐는지는 좀 따져봐야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 정부가 청구권 협정 체결 후 30여 년 동안이나 외교적 보호권이 소멸했을 뿐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청구권 협정 체결 당시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郎) 일본 외무대신은 중의원 '일본국과 대한민국 사이의 조약 및 협정 등에 관한 특별위원회'에 참석해 "외교 보호권만을 포기한 것"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고, 1990년대 초 야나이 순지(柳井俊二), 단바 미노루(丹波實) 등 외무성 조약국장들도 각각 참의원과 중의원의 예산위원회에서 청구권 소멸은 외교 보호권에 한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일본 정부가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유지한 배경에는 구소련과 맺은 공동선언이 있었다. 일소 공동선언에서 일본과 소련 양국이 "국가, 단체,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서로 포기한다"고 밝히자, 구소련에 재산을 두고 온 일본인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에 대해 일본 정부는 개인의 청구권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일본 정부가 오랫동안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유지한 것은 그러지 않는 경우 자가당착에 빠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소송이 잇따르자 새로운 대응 논리가 필요했고, 마침내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을 바꾸었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대법원이 "국민의 개인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개인 청구권 자체는 청구권 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는 없고, 다만 청구권 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됨으로써 일본의 국내 조치로 해당 청구권이 일본국 내에서 소멸하더라도 대한민국이 이를 외교적으로 보호할 수단을 상실하게 될 뿐이다"라고 판시한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네 가지 권리 가운데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은 민사상 청구권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뿐이고, 나머지 세 권리는 오랜 세월 동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고 해야 한다. 

지난 4월 6일 때마침 한국 외교부가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했는데, 거기에는 1991년 8월 3~4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후 보상 국제포럼'에 참석한 인사들(민충식 청구권 협정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백충현 서울대 법대 교수, 타나카 히로시 일본측 교수)의 발언이 수록돼 있다. 이를 보면 세 사람은 필자가 내린 결론과 거의 같은 견해를 피력했음을 알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 왜 이러나
  

윤석열 대통령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나란히 걷고 있다. ⓒ 연합뉴스

 
2018년 10월 대한민국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오자 일본 정부는 극렬하게 반발했다. 당시 아베 총리는 "국제법에 비추어 있을 수 없는 판단입니다", "나라와 나라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가"라며 자신의 심경을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이런 분위기는 2019년 반도체 관련 3개 품목의 수출을 규제하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등의 통상 공격으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더러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민주주의 국가의 삼권분립 원칙을 존중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례한 요구였다.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과거에 한국과 일본이 아베가 말한 것 같은 약속을 맺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더 문제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외교 문제에서 상대측이 억지 주장을 펼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 쪽이 앞장서서 상대측의 억지 주장에 동조하고 나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바로 이런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지난 3월 16일 한일 정상회담 직후 이뤄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2018년에 그동안 정부의 입장과 또 정부의 65년 협정 해석과 다른 내용의 판결이 선고가 됐습니다"라며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에 문제가 있는 듯 발언했다. 

3월 21일 국무회의에서는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은 한국 정부가 국민의 개인 청구권을 일괄 대리해 일본의 지원금을 수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라며 마치 모든 청구권이 경제 협력 자금 수령으로 해결된 듯 발언하기도 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발언을 두고 외교부는 그때 받은 무상자금에는 강제동원 피해보상 성격도 들어있다고 해석했다. 

2012년 정권을 접수한 일본의 극우세력은 그 후 내내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와 관련하여 '강제동원은 없었다', '청구권 협정으로 조선인 노동자가 청구할 수 있는 모든 권리는 소멸했다'라는 주장을 끈질기게 펼쳐 왔다. 이는 상당한 선전효과를 발휘해 오늘날 일본 국민 가운데 이 내용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이슈가 될 때면, '또 그러냐. 벌써 몇 번째냐' 하며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인다. 일본에서 혐한 분위기가 급속히 확산한 데는 이런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월 방미를 앞두고 <워싱턴 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100년 전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고 말해 또 한 번 논란을 자초했다. 대통령은 '무조건 무릎 꿇으라' 하는 표현을 쓰면서 아마도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를 떠올렸을 것이다. 

일본의 극우세력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일부 일본 국민은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을 무조건 무릎 꿇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 일본의 정치 지도자라도 이런 분위기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 정도(正道)이겠지만,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으로서 그런 정서를 불가피하게 대변할 때도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그건 일본 정치인의 일이 아닌가. 왜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인의 혐한 정서를 내면화해 스스로 일본 정치인의 역할을 떠맡는가. 우리 국민이 윤 대통령에게 한국 대통령이 아니라 일본 총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드러내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 총리의 일본 국내 지지율을 끌어올려 주고 일본 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배경에 어떤 정치 문법이 작용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제(5월 7일) 한일 정상회담 직후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과거사에 대한 인식 문제는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느 일방의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발표한 해법(제3자 변제안: 인용자)은 65년 청구권 협정과 2018년 법원의 판결을 동시에 충족하는 절충안으로서 법적 완결성을 지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다시 한번 입장을 밝혔다.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불분명하지만,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함으로써 일본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전 칼럼과 이 칼럼에서 밝혔듯이, 대한민국 대법원의 확정 판결은 일본 기업의 조선인 노동자 동원이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였다고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강제동원 노동자와 관련한 네 가지 권리 가운데 세 가지가 엄연히 살아있음을 분명히 판시했다. 제3자 변제안이 이 판결을 충족한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정치 문법을 계속 구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동기자회견에서 기시다 총리가 "당시에 힘든 환경 속에서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일을 당한 일에 대해서 마음이 굉장히 아프다"고 발언했지만, 이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한 것이 아니고 그에 대해 사과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사건에서 가해자가 마치 제3자인 듯 성의 없이 내뱉는 립서비스처럼 들릴 뿐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일 정상 소인수 회담에서 먼저 기시다 총리는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한국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거나 요구한 바가 없는데 먼저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고 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 국민은 이런 정치 문법을 언제까지 참아줄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윤석열 대통령이 "민심은 바다와 같아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는 금언을 떠올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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