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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는 약을 여기에 보관합니다

등록 2023.05.10 08:41수정 2023.05.10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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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영화를 보다 보면 종종 아주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뭔가 약을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꼭 화장실인 거다. 두통약도 소화제도 전부 화장실 세면대 위의 거울장에서 나온다. 진지한 영화나 코믹한 영화나 상관없이 마치 서로 짠 듯이 모두 화장실에서 약을 꺼낸다.


화장실에 약을 보관하는데, 들고 나와서 부엌에 와서 먹지도 않고, 화장실에서 먹는다. 바로 세면대에서 저렇게 말이다. 칫솔 꽂아두고 양치질하는 컵을 사용해서 거기에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담고, 그 물로 약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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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소화제 먹는 장면들 ⓒ Julie and Julia

 
영화를 볼 때 약 먹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참 의아했는데, 결혼을 했더니 남편의 약이 화장실에 있었다. 자기 전에 약을 먹는데, 화장실에서 꺼내서 먹는 현장을 실제로 목격을 하고 나니 영화보다 훨씬 충격이었다.

왜 약이 거기 있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더니, 오히려 그게 어떠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여긴 늘 물이 있잖아."

그렇다. 늘 물이 있고, 침실과 가깝다. 그래서 원하는 순간에 쉽게 꺼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 물을 먹느냐고 물었더니, 이 물이 뭐가 문제냐는 반응이었다.

물론 화장실 세면대에서 나오는 물이나, 싱크대에서 나오는 물이나 다 같은 파이프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화장실 물을 틀어서 목으로 넘길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물이 어때서? 그 물로 양치도 하잖아?"

그렇다. 양치도 한다. 그렇지만 삼키지는 않는단 말이다. 나만 유난스러운가 싶어서 주변의 한국 지인들에게 물어봤는데 다들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정말 그 물을 마시느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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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먹기 위해 물이 필요하다. ⓒ pexel JESHOOTS.com

 
우리는 그냥 싫다. 그 물은 먹기 싫다. 애초에 수도꼭지의 물을 바로 틀어서 마시는 일도 거의 없지만, 끓여서 먹든 정수기에 거르든, 그 물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마치 그들이 두루마리 휴지로 입을 닦기 싫은 것처럼, 우리도 화장실 물이 먹기 싫다. 깨끗한 휴지이고, 깨끗한 물이지만, 우리와 서양인들의 청결 개념이 확 차이가 나는 순간이었다. 

물론 서양의 욕실은 한국과 달리 건식이어서, 약을 보관한다고 해서 금방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화장실 안이 전혀 습하지 않다. 거울장 안에 넣고 문을 닫는다면 그뿐인 거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자진해서 내 약을 화장실에 보관하고 싶지는 않다. 

결국 우리는 합의점을 찾았다. 아, 일부러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암암리에 합의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독하는 빨간약이나 밴드 같은 것들은 화장실 서랍에 여전히 두되, 매일 먹는 약들은 부엌으로 이동했다. 영양제도 부엌 찬장 안으로 이동하고, 물도 부엌에서 마신다. 

남편은 여전히 화장실에서 물을 떠서 침실 탁자에 갖다 놓기도 하지만, 어쨌든 약들은 화장실에서 탈출했으니 두 문화의 타협이었다. 
덧붙이는 글 기자의 브런치에도 같은 글이 실립니다
#화장실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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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거주하며, 많이 사랑하고, 때론 많이 무모한 황혼 청춘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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