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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만 산다는 목숨이 16년을 더 살게 만든 기적

[리뷰] 나태주 지음 <약속하건대, 분명 좋아질 거예요>

등록 2023.05.21 15:16수정 2023.05.2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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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프기만 할까?"

한숨이 일상인 요즘 자주 내뱉는 말이다. 지독한 비염이 내 몸을 비루하게 만든 데다, 나이가 너무 많아 회사에서는 눈칫밥 먹는 게 일상이다. 그렇다고 사표를 쓰자니 남은 인생은 뭘 할지 암담하다. 치매 걸린 아버지도 걱정이다.


그런 내 심정을 읽은 것인지, 어느 날 아내가 책 한 권을 건넸다. 아무 말 없이 책상 위에 툭 놔둔다. 나태주 시인의 수필 <약속하건대, 분명 좋아질 거예요>. 제목을 보자마자 심통이 났다. 이런 말, 누가 못하나. 아내가 나를 약 올리나 싶어 화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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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하건대, 분명 좋아질 거예요 표지 ⓒ 더블북

 
하지만 아니었다. '약속하건대, 분명 좋아질 거예요'는 그냥 아무나 던지는 말이 아니라,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역대 광화문 글 판 중 가장 사랑받은 시구 '풀꽃'의 작가 나태주가 아니라, 예순이 넘어서야 이기는 것만이 인생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인간 나태주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책은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언제나 예쁜 것만 보고 사랑 넘치는 말만 할 것 같은 나태주 시인은 끝도 모를 복통을 느껴 응급실을 찾는다. 의사는 말했다.

"사흘밖에 살지 못합니다."

급성췌장염. 시인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동안 밖에서는 장례 준비가 한창이었다. 빈소와 장지가 정해지고 영결식은 현직 교장이기에 초등학교 교정에서 시인협회장으로 하는 걸로 결정, 영정사진도 두 개나 준비되었다. 그런데 그의 늙은 아버지가 중환자실을 찾아온다. 죽어가는 아들의 손을 붙잡고 말한다.

"세상은 아직도 징글징글하게 좋은 곳이란다. 부디 살아서 나오도록 하려무나."


여기까지 읽으면 이 책이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다시 살아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삶의 희망을 노래하는 병상 일기쯤으로 오해하겠지만, 나태주 시인은 오히려 쿨하다.
 
"이 책은 내가 아파서야 배운 것에 대한 기록이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사는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쁨과 긍정의 메시지다. 그러나 나 역시 여전히 진다는 것도, 사랑도, 기쁨도 서툰 사람이니 어쩌면 이 책은 지금 그대로도 괜찮다는 권유다." - 6쪽
 
한참 후배인 나태주 시인이 힘들 때마다 다가와 꼬박꼬박 높임말을 쓰며 조언을 해주던 어떤 선배의 따뜻한 마음, 분위기 삼엄한 대형 병원에서 작은 음악회가 가능하게 힘써준 이해인 수녀의 마음의 향기, 본인도 휠체어를 타야 할 정도로 아픈 몸이지만 병원까지 찾아와 시인을 힘껏 안아주고 용기를 북돋아 준 김남조 시인의 사랑.

그중에서도 1927년생 김남조 시인이 나태주 시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누구나 새겨들으면 좋겠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으리라."

그렇게, 3일만 산다는 목숨이 16년을 더 살았다. 기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지만, 기적이란 그 속에 있을 때는 아무도 모른다. 잠시 멈춰 마음을 우두커니 바라보면 그때야 보이는 게 기적이라 한다.

나태주 시인의 데뷔 에피소드도 짠하다. 이름도 없는 작가의 시집을 내주는 데가 없어서 첫 책은 자비로 찍어야 했다. 당시 쌀 열여섯 가마니 값에 해당하는 출판비 16만 원은 아버지한테 빚져서 충당했다. 첫 번째 구매자는 어머니로, 시인에게 700원을 지불했다.
 
"시집 뒷면에 정가로 찍힌 칠백 원.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그 돈이 얼마나 내게 크나큰 용기를 주는 돈이었던가. 첫 시집 <대숲 아래서>는 어머니를 소재로 삼은 시들이 여러 편 들어 있다. 그때 어머니가 그 시들을 읽고 나에게 시집 값을 주셨는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다." - 51쪽
 
남들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길을 걸었지만, 이제는 이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나태주 시인.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이번 생은 망했어'란다. 엄청난 축복으로 각자의 자리까지 온 인생인데 말 한 마디가 계획은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인이 좋아하는 말은 따로 있다.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라." 넘어지면 일어서서 천천히 가면 된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온 나태주 시인은 일이 안 풀리고, 하루 사는 일이 힘들고 그래서 꽃이 피고 지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말 한 마디를 전한다.
 
"사는 일에는 항상 가능성이 열려 있답니다."


어쩌면 지금의 시간이 내게 가장 어두운 순간일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을 것으로 예견되는 시간들. 늙어감과 그로 말미암은 육체의 퇴화와 여러 가지 자격 상실, 관계의 상실이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을 두려워 말고 지금 순간순간에 집중하며 살 뿐이다. 꽃이 예쁘게 필 때, 구름이 멋지게 피어오를 때, 미세먼지 하나 없는 파란 날이 계속될 때 그 사소한 기쁨을 누리며 살 일이다.

<약속하건대, 분명 좋아질 거예요>를 건네준 아내에게 고맙다.

약속하건대, 분명 좋아질 거예요

나태주 (지은이),
더블북, 2023


#문학 #에세이 #수필 #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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