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부여 옛 땅에 후예들이 <부민단> 창설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 12] 만주의 허허벌판은 흰옷 입은 우리 민족들로 하얗게 덮여갔다

등록 2023.05.24 15:41수정 2023.05.24 15:41
0
원고료로 응원
경술국치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로 옮겨왔다. 왜적의 종살이를 거부하는 우국충정의 이주민들이 있었고, 그냥 먹고살기 위해 떠나온 유랑민들도 있었다. 다달이 다르게 이주동포 숫자가 늘어나면서 곳곳에 한인촌이 생겼다. 허은 여사의 기록이다. 

만주의 허허벌판은 이 때부터 흰옷 입은 우리 민족들로 하얗게 덮여 갔다. 멀리서 서로 쳐다만 봐도 든든했다. 이렇게 되자 애국지사들이 한인자치단체를 만들어 엄중한 규율을 세우고 학교도 세웠다.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을 때까지 만주땅에다 한 개의 작은 나라를 만들어 운영한 셈이었다. 
 
a

중국 지린성 광화 합니하의 옛 신흥무관학교 옛 터, 지금은 벼논과 포도밭으로 변해 있었다. ⓒ 박도

 
소학교는 거리따라 많이 세우고 중학교는 드문드문 세웠다. 자연히 집과 거리가 먼 사람이 많았지. 집이 멀거나 다른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애국지사들이 각 집에 나누어 맡아 하숙을 시켰다. 우리나라 사람 자식 가르치는 일에 대한 열성은 그때도 여전해서 여기저기에 크고작은 교육기관들이 많이 생겨났다. 어쨌든 많이 배워야 사람된다고 했다.

서간도에만 해도 학교가 200여 개는 된다고 들었다. 북간도에도 서간도 못지않게 학교들이 세워졌다고들 했다. 북간도는 서간도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들었다. 동홍중학교, 대성중학교 등이 들어본 이름들이다. (주석 3)

이상룡과 한인지도자들은 이주한인이 많아지면서 풍화시엔(通化縣)을 중심으로 서간도 일대에 본격적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서둘렀다. 경학사가 해체된 이후 한인사회의 자치와 산업의 향상을 지도할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12년 가을 부민단(扶民団)이 조직되었다. "부여의 옛 영토에 부여의 후손들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뜻"이 담겼다. 이와 다른 의미의 기록도 있다.

'부민단'을 처음 창설하기는 성산어른[(性山)은 허로(許魯)의 호, 왕산 허위의 동생, 의병투쟁에 이어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 중이었다. - 필자 주]이 하셨다. 신흥무관학교의 창립 핵심인물인 석주어른과 이회영 형제분이 만든 '경학사'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조직을 더 강화하여 새 단체를 만들려고 할 때였다. 

성산할아버지가 식구들 다 있는 자리에서 "새 단체 이름을 뭘로 하면 좋을까" 하셨다. 옆에 계시던 왕산할머니께서, 그러니까 성산어른의 제수씨가


"부민단이 어떻겠는가? 백성을 부양한다는 뜻으로."

라고 하자 다들 좋다고 하여 그 이름이 지어졌다. 2대 단장은 석주어른이 했다고 들었다. 나중에 석주어른께 들으니 백성을 부양한다는 뜻도 의미 깊은데다 만주땅에 세운 부여(扶餘) 민족, 즉 우리 민족의 단체라는 의미도 된다고 하셨다. (주석 4)
a

합니하 옛 신흥무관학교가 있는 오늘의 광화 모습 ⓒ 박도

 
부민단은 본부를 통화시엔 합니하(哈泥河)에 두고 활동하였다.

초대 총장은 의병장 허위(許蔿)의 형인 허혁(許赫)이 맡았으며, 곧 이어서 이상룡이 선임되었다. 부민단에는 서무·법무·검무(檢務)·학무·재무 등의 부서가 있었으며, 중앙과 지방의 조직이 마련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단장 1인과 각 부서 주임을 두었다. 지방에는 천가(千家) 및 큰 촌락에 조직되며 천가장(千家長) 1인을 두었다. 구(區)에는 약 1백가(百家)로 구단(區團)을 설치하여 구장(區長) 혹은 백가장(百家長) 1인을 두었다. 그리고 패(牌)에는 10가호(家戶)에 패장(牌長), 혹은 십가장(十家長)을 두었다.

1914년 류허시엔 부민단의 경우 현(縣) 내를 4개구로 나누어 제1구 부민단은 대사탄(大沙灘)에, 제2구 부민단은 대화사(大花斜)에, 제3구 부민단은 대두자구(大肚子溝)에 그 소재지를 두었다. 한편 제4구 부민단의 경우 존재는 확인할 수 있으나 소재지는 알 수 없다.(중략)

부민단의 표면적인 사업은 재만 한인의 자치를 담당하고 재만 한인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분쟁을 재결(載決)하는 것과 재만 동포들을 대신하여 중국인 또는 중국관청과의 분쟁사건을 맡아서 처리해 주는 것, 재만 한인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재만 한인의 토대 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한편 부민단에서는 신흥강습소를 통하여 독립군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신흥강습소의 이러한 활동은 그 지역 토민들의 오해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부민단에서는 "나의 동포 잃었으니 이웃동포 내 동포요", "나의 형제 잃었으니 이웃 형제 내 형제라"라고 하는 표어를 내걸고 토민들에게 양해를 구하였다. (주석 5)  


주석
3> 허은, 앞의 책, 67쪽.
4> 앞의 책, 82쪽.
5> 박환, <부민단>, <한국독립운동사사전(3)>, 626~62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상룡 #석주이상룡평전 #이상룡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 주도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