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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 역사든 승리의 역사든 기록으로 남겨야"

[이영광의 '온에어' 243] 시철우 YTN 촬영기자

23.05.21 12:46최종업데이트23.05.22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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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한 장면 ⓒ 이영광

 
최근 일제 강제동원 문제가 핫이슈로 떠올랐다. 시작은 윤석열 정부가 2018년 강제 동원 대법원 판결에 대해 제3자 변제안을 내놓으면서다. 강제동원 피해자는 물론 국민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대통령은 안보를 이유로 한일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 문제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지난 13일 보도전문채널인 YTN에서는 < YTN 탐사보고서 기록 > '강제동원-피해자 없는 시대' 편이 방송되었다. 1992년 광주 1000인 소송에서 시작해 2018년 대법원 승소 판결까지. 일본과 한국에서 있었던 26년 법정 투쟁을 짚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의견을 담았다. 다큐멘터리 제작 이야기가 궁금해 '강제 동원-피해자 없는 시대' 편을 제작한 시철우 YTN 촬영기자와 지난 19일 전화 연결했다. 다음은 시 촬영기자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 지난 13일 방송된 < YTN 탐사보고서 기록 > '강제동원-피해자 없는 시대' 편 제작하셨잖아요. 방송 끝났는데 소회가 어떠세요?
"항상 방송 끝나면 느끼는 것이지만 취재 내용 전부를 담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피해자 한 분 한 분의 삶에 담긴 이야기, 또 일본에서 만난 강제 동원 피해자를 지원하는 분들의 삶과 역사, 한국에서 시민단체 활동하고 계신 분들의 사연이 모두 한 편의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내면서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 아쉽게 느껴집니다."

- 강제 동원 문제는 어떻게 취재하게 됐나요?
"'공백 - 10.29 이태원 참사 100일의 기록' 편이 방송된 게 2월 4일이잖아요. 그때 이후에 <탐사 보고서 기록>이 회사 차원에서 한 달에 한 번 정규 편성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시작됐어요. 그래서 아이템을 바로 정해야 됐고요. 때마침 또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외교부의 강제 동원 해법안이 뉴스에 많이 회자가 됐어요. 그래서 시의적절한 내용이고 우리가 방송 준비 하고 4월 말 혹은 5월 중순 방송 할 텐데 그 문제 해법 안이 나오더라도 분명히 사회 문제로 대두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서 아이템으로 선정하게 됐어요."

- 원래 강제 동원 문제에 관심이 있었나요?
"2019년 한일 관계가 경색될 때 한일청구권협정 관련해서 '인터뷰' 시리즈를 만든 적이 있어요. 그때 일본 현지 취재 통해서 일제 강제 동원 문제 해결 위해 일했던 일본 시민과 변호사, 교수님 몇 분을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섭외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근데 직접 취재를 시작하자마자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너무나 협소한 부분이었고 저는 정말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죠.

전반적인 역사 흐름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지, 강제 동원 피해자 한 분 한 분 개개인의 역사 그리고 시민단체가 어떻게 지원했고 언제 시작했고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일본 내에서 1990년 이후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재판이 시작된 게 쭉 이어져 와서 2018년 대법원 판결까지 간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

- 처음에 취재는 뭐부터 하셨어요?
"처음 취재는 저희가 내용 자체를 잘 알고 있지를 못하니까 공부부터 시작했어요. 그래서 예전에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가 있었잖아요. 약칭 '일제 강제 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죠. 거기서 11년 넘게 조사를 직접 담당하셨고 지금도 일제 강제 동원과 평화연구회 대표로 활동하고 계시는 정혜경 박사님 만나 뵙고 조언 얻었고요. 또 2018년 대법원 판결 때 법률 대리인으로 활동하셨고, 지금도 강제 동원 피해자 여러분들의 법률대리인을 맡고 계시는 임재성 변호사님 만나 뵙고 조언 들었고, 또 오랫동안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지원해 왔던 시민단체가 있어요. 일제 강제동원 시민모임이라는 곳인데 거기에 계시는 이국언 이사장님 이 세 분을 만나 뵙고 조언 듣기 시작했죠."

- 1992년 5월 30일 광주에서 있었던 대일 진사 및 배상 청구 재판에 관한 한일 공동 설명회로 시작하셨던데 왜 이렇게 시작하셨어요?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도에 증언을 시작하셨잖아요. 그즈음부터 국내에서 일제 강제 동원 피해에 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움직임들이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일본에서 제기된 소송이 총 55건이에요. 그중에서 1992년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에서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한 1000인 소송이라는 소송이 있어요. 원고가 1,273명이에요. 당시에 가장 많은 원고단이 참여한 소송으로 기록이 됐는데 이게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이 소송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면 광주 1,000인 소송을 이끈 중심에 이금주 당시 태평전 전쟁 희생자 광주 유족회 회장님이 계시는데 이분이 당시 나이가 일흔 정도가 되셨어요. 이분이 한 분 한 분 만나면서 피해자분들을 광주 유족회로 가입시키고 피해 사실 적고 일지와 기록 남기면서 피해 사실을 모두 다 일본에 보낸 소장 직접 손으로 작성하셨어요."

- 이금주 할머니는 직접 피해자가 아니고 유족인 것 같은데.
"이금주 할머니는 일제가 벌인 태평양 전쟁 당시에 남편이 일본에 징집이 돼요. 징용돼서 끌려가서 남태평양 타라와섬에서 전사해요. 그러니까 일제가 끌고 가서 징용 피해자의 유족이죠. 일제 강제동원은 피해의 종류가 진짜 다양해요. 군인이나 군속으로 끌려가거나 노무자로 동원되거나 위안부로 끌려가거나 근로정신대로 끌려가죠 그래서 일을 하든 노역하든 전쟁에 참여하든 성 착취를 당하든, 엄청난 인권 탄압을 받은 거죠. 다양한 사람들을 1000명 넘게 규합해서 일본 정부로부터 사죄받아야 한다는 소송을 낸 게 1000인 소송이거든요."

- 이금주 할머니 나이면 한글도 모를 것 같은데 기록하고 소장 일본에 보내신 건 대단한 것 같아요.
"이금주 할머니는 결혼 전 학교 선생님을 하셨습니다. 일본어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직접 소송 준비를 하실 때나 일본 언론과 인터뷰를 하실 때도 일본어 사용에 문제가 없으셨죠. 본인도 피해자이고 여러 피해자분의 사정을 다 들으면서 이 소송으로 연결했는데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님 말씀을 인용하면, 이분의 기록이 없었으면 일본에서 1000인 소송의 시작은 할 수 없었다고 해요.  왜냐하면 이 소송으로 가려면 변호사가 붙어서 변호사 한 분당 피해자 여러분들이 인터뷰하고 피해 사실 기록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한국과 일본 오가면서 할 수 있는 변호사님은 없다는 거죠. 그걸 이 70대 할머니가 전부 손으로 소장을 직접 써서 일본에 계신 시민단체분에게 우편과 팩스로 보내요. 그러면 이분들이 또 변호사님께 보내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기록이 처음이자 끝이라는 거예요.."

- 나고야 고등 재판소 판결문 보면 강제 동원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사과와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는데 안 맞는 것 같아요?
"소장에 기록됐고 재판 과정에서 증인과 거기에 벌어진 기록으로 남았던 여러 정황 그리고 이 피해 사실들이 일본에도 다 기록이 돼 있거든요. 소송이 갖고 있는 의미가 그런 거예요. 소송 할 때는 우리들의 기억만 있었던 거잖아요. 그러나 소송 거치면서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자료 요구했고 이 자료들을 찾아낸 거예요. 그래서 피해 사실들을 일본이 기록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일본 시민단체 분들이 여러 백방으로 뛰면서 밝혀낸 사실들도 있고 일본 정부가 제공한 정보 중에서도 밝혀질 만한 내용들이 있었고요. 그래서 나고야 고등재판소 판결에서는 피해자 개개인의 강제 연행, 강제 동원이죠. 그리고 강제 노동 이런 것들이 인정됐어요. 사실로 확정이 된 거죠. 하지만 이런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피해를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서 해결했다는 게 일본의 입장인 거예요."

-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할 때 강제 동원 문제는 나왔나요?
"우리가 국내 재판 통해 일본 기업을 상대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낸 소송을 2012년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한 내용을 보면 '식민지 지배는 불법이었다. 그래서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있다'는 걸 명시했거든요. 1965년 천일 청구권 협정에서 8가지 조건을 한국 정부가 제시해서 이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은 앞으로 해결된 것으로 한다고 얘기를 했는데, 이 부분에 안 담겨 있는 부분들이 있어요.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이 언급이 안 돼 있고요. 개인 청구권 문제도 나와 있지 않아요. 그래서 2012년 우리 대법원은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관련해서 개인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청구권은 살아있다고 인정해요."

- 양금덕 할머니 댁에 가셨는데 어땠어요?
"양금덕 할머니 댁은 되게 작아요. 할머니가 얼마나 넉넉하지 못하게 살아오셨는지 딱 대변하고 있는 집이에요. 비탈에 반듯하지 않은 집에서 살고 계시는데 할머니 성격답게 엄청 깔끔해요. 그리고 근처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의 며느님이 식사를 계속 챙겨주고 계시고요. 일제 강제 동원 시민모임에서도 항상 들여다보시고 거기에 회원분들이 의료지원도 해주시고 관리를 해주고 계세요. 할머니 자체가 건강하시고 깔끔하세요. 그리고 말씀도 너무 재밌게 하시고 저희가 총 할머니를 세 번 찾아뵙는데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노래도 함께 부르고 음식도 나눠 먹고 그랬죠."

- 양금덕 할머니는 속아서 강제 동원 피해자가 되셨나 봐요?
"할머니가 나주에서 초등학교에 다니셨는데 할머니가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반장을 맡을 정도로 똑똑했대요. 그래서 집안 사정은 별로 좋지 않은데 학교에서는 일본에 가면 중학교도 보내주고 공부도 하게 해주겠고 배부르게 먹고 돈도 많이 벌게 해주겠다고 유인한 거죠. 6학년이니 12살, 13살, 14살 아니에요. 그때는 우리나라가 너무나 힘든 때니까 공부를 아예 꿈도 못 꾸던 사람들 더 많았는데 공부하게 해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갔죠, 가보니까 공장에서 계속 일만 하고 밥도 조금 주고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배고프겠어요. 거기서 비행기만 들어서 시너로 비행기 닦고 페인트칠하고 녹 벗기는 일들을 했죠."

- 일본 시민단체도 강제 동원 해결하라는 시위 하나 봐요?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나고야에 계신 분들 나고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소송 지원 모임 이분들은 1988년부터 이 운동을 시작했었고요. 그리고 시위는 2000년대부터 시작을 했고 저희가 갔을 때 4월에 총 522회 차 예전에는 매주 나고야와 도쿄를 오가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운동을 했었는데 이분들이 연로하셔서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하시고 있고 이 분들은 연극도 만들고 있고요. 또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계세요. 후지코시 문제는 도야마에 계신 분들이 1990년대부터 이 소송 지원을 시작하셔서 실제로 결과물을 내신 것도 있고. 후지코시 주주총회에 참석하고 계시고 또 마찬가지로 미쓰비시 히로시마 일본 제철 문제 이런 걸 돕는 시민단체가 대단히 많아요."

- 우리나라에도 강제 동원 현장이 있나 봐요?
"현장 우리나라에 되게 많습니다. 밝혀지지 않은 곳도 많고요. 일단 강제 동원 현장은 우리나라가 이런 특수한 점을 지니고 있는데, 일본이 들어와서 무기 생산을 한다거나 일본 군사시설로 개발된 곳들이 되게 많아요. 이런 부분들을 일단 무기공장이라든지 군사시설이 있잖아요. 군사시설은 해방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미군이 다 그쪽을 다 그대로 사용해요. 미군 기지가 대규모로 있는 부분들은 거의 다 강제 동원의 현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셔도 돼요.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때 그 시설을 만드는데 우리 여기 젊은이들이 가서 건물 만들고 땅 파고 참호 만들고 한 부분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요. 또 광산 광업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려면 광물이 대단히 많이 필요했잖아요. 이걸 다 공급하기 위해서 국내 광업을 광산 개발한 게 되게 많아요. 그 현장이 거의 대부분 강제 동원의 현장이었다고 보시면 돼요."

- 제작하며 느낀 점 있을까요?
"피해의 역사든 승리의 역사든 기록이 상당히 중요하니 남겨놔야 된다는 거예요. 글로 남겨놓을 필요도 있고 인터뷰를 통해서 영상과 구술 자료로 남겨둘 필요가 있고요. 이걸 기억으로 유지 하고 기록으로 남겨두는 건 역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일이죠. 우리가 이런 현장과 피해를 모르고 지나간다면 나중에 이건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역사가 될 가능성이 높잖아요. 그리고 알아야 우리가 피해 피해의 어떤 슬픈 역사더라도 알아야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방법들을 또 연구하잖아요. 이게 교육해야 되고 기록해야 되고, 기록과 계승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들을 또 절감하게 되는 계기가 됐죠."

- 취재할 때 어려운 점이 뭐였나요?
"이게 역사가 오래됐고 피해도 방대하잖아요. 종류도 다양하고요. 그러니까 어떤 거를 어떻게 다뤄야 시청자들과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알기 쉽게 혹은 소통을 할 수 있을지 갈피를 잡기가 되게 힘들었어요. 현재 이야기만 해야 되는 건지 소송의 이야기만 해야 되는 건지 피해 종류에 대한 이야기만 해야 하는 건지 이걸 지원하신 분들의 노력을 얘기해야 되는 건지 이게 방향이 되게 여러 갈래잖아요. 여러 갈래의 방향에서 이야기를 네러티브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시청자분들과 수월하게 소통할 수 있는 흐름을 만드는 어디로 나가야 할지 방향을 정하는데 되게 힘들었고 그렇지만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또 많이 배우면서 저희도 취재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됐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전북의소리'에도 중복게재합닏다.
시철우 YTN 탐사보고서 기록 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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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와 이영광의 '온에어'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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