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5 20:19최종 업데이트 23.05.25 20:19
  • 본문듣기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한국 방송사가 비정규직을 대하는 태도는 윤석열 정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와 매우 흡사하다. 그 무엇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언론과 방송에선 책임을 덮어주기만 하고 어떤 정부기관도 잘못된 점을 제기하지 못한다. 국회도, 국회의원도, 문체부나 방통위나 고용노동부도 방송사의 잘못을 바로잡으라고 말하는 것에 눈치를 본다. 방송사는 누군가에게 그런 얘기를 듣고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방송사의 타이틀을 걸고 나가는 방송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소수의 특권층인 정규직이 모든 과실을 다 가져가는 게 현실이다. 비정규직들은 노동시간 대비 턱없이 적은 급여만을 받아갈 수 있을 뿐이다. 왜 이런 불합리하고도 불공정한 행태가 방송사에선 관행으로 당연히 여겨질까?


흔히들 방송사를 비정규직 백화점이라고 부른다. 비정규직은 방송을 만드는 거의 모든 단계와 과정에서 일하고 있고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고용노동부의 연구보고서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2021'에 따르면 그나마 정규직이 많이 일하는 시사교양국과 보도국에서도 정규직이 비정규직·프리랜서보다 적었다. 방송사와 계약을 맺은 외주제작사의 비정규직은 아예 계산에 넣지 않고도 그렇다. 비정규직 비율이 월등하게 높은 드라마제작국 등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방송사 내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비정규직 작가와 PD와 AD, FD들부터 무기계약직 그래픽 담당, 편집 담당뿐만 아니라 파견직으로 일하는 오디오 담당까지 비정규직은 직무를 가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역시 파견직으로 일하는 경비와 청소, 운전 담당이 있고, 방송 출연 일일 아르바이트도 있다. 거기에 방송사 밖에서 일하는 PD와 작가, 카메라 감독 등의 외부 스태프들에 드라마, 광고를 제작하는 제작진까지 포함하면 방송 제작 현장에서 비정규직은 절대다수이고 그들 없이는 제대로 방송을 내보낼 수도 없는 지경이다.

하지만 아직 방송 비정규직에 대한 제대로 된 규모 파악도 못 하고 쉬쉬하고 있는 상황이다. 방송사에선 사회의 비정규직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만, 정작 그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규직들이다.

10년 일한 작가, 부장 한마디에 잘려
 

방송 제작 현장에서 비정규직은 절대다수이고 그들이 없이는 제대로 방송을 내보낼 수도 없는 지경이다. ⓒ 셔터스톡

 
방송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우는 차이가 크다. 정규직들은 초봉 3천만~4천만 원에서 시작해서 10년 차 정도 되면 8천만~9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비해 비정규직들은 대부분 초봉이 최저급여 수준에서 시작하고 10년, 20년이 돼도 4천만 원을 넘어가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정규직이 받는 수당과 상여금, 사내복지 등도 비정규직은 대부분 아예 해당되지 않는다.

프리랜서로 분류되는 비정규직들은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노동법과 최저임금법의 적용이 배제된다. 고용도 불안정해서 일반적인 계약직은 1년짜리 계약이 가장 흔하다. 프리랜서는 프로젝트별로 계약하거나 아예 작업물 당 급여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한다. 턴키 계약으로 본인이 팀을 꾸려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돈을 받는 경우도 있고, 번역한 작업량에 따라 돈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일당으로 받는 사람도 많으며, 방송 제작 편당 급여를 받는 경우도 많다. 한마디로 그때그때 방송사가 편하게 생각하는 방식으로 급여를 지급받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는 방송을 제작해놓고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국가행사 등으로 방송이 나가지 않는 경우 아무런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나마 이제는 예전처럼 협찬으로 들어온 상품권을 급여의 일부로 지급받는 일은 거의 없어져서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정도이다. 그래도 방송이 송출되고 나서 정직원에 의해 프로그램 정산이 올라가는 약 2~3달 후에 급여를 받는 관행은 여전한 편이다.

이런 차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고용의 안정성이다. 외주제작사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PD와 작가들은 여전히 아무런 계약서를 쓰지 않고 일하는 경우가 대다수고, 방송사 내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들도 언제든 계약을 해지당할 수 있다. 10년을 일해온 방송작가가 부장의 말 한마디로 잘린 경우도 있고 2달 만에 해고를 당하기도 한다. 방송 제작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계약직들도 계약 연장을 안 하면 몇 년을 일했든지 상관없이 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방송산업은 젊은 산업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오래 일해도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늘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하니 많은 방송인들이 방송계에서 오래 일하고 싶어도 오래 할 수가 없다. 방송 비정규직은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나이가 다가오면 얼마나 더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한 비정규직 PD는 오래 만난 여자친구로부터 방송 일을 계속할 경우 결혼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10년 넘게 일해온 방송일을 계속 해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다. 고용의 안정성이 없으니 은행에서 대출도 받기 힘들어 월세로만 살고 있는 작가들도 있다.

헌법보다 강력한 '방송 스케줄'
 

노동인권 시민단체들이 2022년 11월 4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KBS에 근로시간 준수 등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희망연대본부

 
노동시간도 역시 문제다. 정규직들은 주 52시간 제도가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하지만 비정규직들에겐 오히려 윤석열 정부의 주 69시간 제도도 반가울 지경이다. 방송이 나가는 것에 모든 스케줄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하루 24시간을 다 채워서 며칠 밤을 새우는 노동이 매우 흔하다. "방송이 나가야 한다"는 명제는 현장에서 그 어떤 노동법, 방송법, 또는 헌법보다도 강력하다.

조부상을 당하고도 장례식장에 가지 못한 PD, 바뀐 방송 스케줄 때문에 섭외를 새로 해야 하는 작가, 태풍이 오고 산불이 나도 촬영을 나가야 하는 스태프들은 너무 흔한 얘기이고, 코로나에 걸려도 드라마 제작이 멈출까봐 얘기를 안 하고 버텼던 경우도 있었다. 방송 비정규직, 특히 프리랜서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방송 스케줄에 차질을 빚으면 안 된다. 바로 밥줄이 끊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기의 몸을 갈아 넣어가면서 방송을 만들 수밖에 없다.

산에서 촬영하다 다리가 부러졌던 한 PD는 자기가 다쳐가면서 만들었던 방송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자신이 마무리를 못 하고 다른 사람이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산재보험도 적용받지 못하고, 치료받는 2~3달가량 일을 못 했기에 돌아올 직장도 없어졌다. 방송작가들은 퇴근하고 집에 가서도 계속해서 자료 조사와 섭외 전화 때문에 손에서 일을 놓을 수가 없다. 사무실에서 9 투(to) 6를 지킨다고 해도 업무는 24시간 계속된다.

방송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첫 채용에서 갈라진다. 1년에 100여 명을 뽑는 방송사 직원 채용에 정직원으로 채용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 또는 부서별로 경력직을 뽑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기존의 정규직이 물갈이될 뿐이다. 종합편성채널이 처음 생겼을 시기, 외주업체에서 경력을 쌓은 프리랜서들이 정규직으로 옮겨간 경우가 있었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쉽게 말해 방송사는 정규직 문 자체가 좁다. 필요로 하는 제작 인력은 많은데 뽑을 수 있는 정규직은 적은 수로 정해져 있으니 방송사에서는 프리랜서 제작 인력을 쓸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핑계로 계속해서 젊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쓰이고 버려진다. 많은 수가 화려한 방송계를 동경해서 들어오지만 처음부터 정규직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비정규직으로 형광등보다도 짧게 쓰이고 버려지곤 한다.

외국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방송계에선 전 세계적으로 비정규직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한국만큼 차별이 극대화된 곳도 흔치 않다. 영국의 경우 비정규직의 평균임금은 정규직과 비교했을 때 약 87%로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는 정확한 데이터가 없지만 40~50%로 추산된다. 해외의 방송 비정규직들은 정부의 관리 또는 (노동)조합의 협상으로 권리를 보호받고 있지만 한국에선 아직 먼 이야기이다.

이러한 방송 비정규직의 현실에 정부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국회가 국정감사에서 요구한 자료도 방송사는 불성실하게 제출한 경우가 많고, 아예 제출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방송사는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에도 협조하지 않는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아예 손을 댈 수도 없는 지경이다. 그나마 방송통신위원회가 방송채널 사용 사업자의 재승인권을 가지고 압박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정치권의 입김으로 힘을 잃은 지 오래다.

방송 현장의 비정규직 문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그 어떤 정부 조직이나 국회도 단독으로 나설 수가 없다. 방송사들이 '언론의 자유'를 휘두르며 방패막이 삼아 숨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해외 하청기지 되면..."
 

방송사에서 방송 스케줄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방송 스태프들은 며칠 밤을 새우는 일이 예사다. ⓒ 셔터스톡

 
방송사의 정규직들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선 무관심하고 무력하다. 바른 언론, 공정한 언론을 외치던 노조 출신 사람들도 경영진이 되고 나면 정치적 방향과 관계없이 비정규직들을 가차 없이 밟아버리고 고용노동부, 노동위원회, 법원의 명령에도 행정소송을 걸어 몇 년씩 소송전을 끌고 간다.

방송사들은 현재 자신들이 사용하는 비정규직의 현황을 전부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부서에서 다양한 형태로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있다. 갈수록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다양화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갈수록 기존 방송의 수익성은 낮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모바일과 온라인 미디어로 옮겨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몇몇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제작비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제작비가 줄어들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것이 인건비이다. 제작여건은 갈수록 악화되고 인건비도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신규인력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아우성을 현장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이미 중간층만 남고 연차가 높거나 낮은 인력들이 오히려 적은 분포를 여러 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방송에서 일하는 만큼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면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10년을 일하든 20년을 일하든 급여 인상에 대한 기대도, 고용안정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오래 일해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한국 방송계가 망하고 다른 나라의 하청 기지화되면 오히려 더 나은 노동조건이 될 거라는 한탄까지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드라마 제작에서는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등을 통해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의 방송계가 살아남기 위해선 현재의 이중적인 구조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방송사의 비정규직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방송사는 이미 자정능력을 잃어버렸다. 언론에 흔들리지 않을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사회 전반에 걸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분배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김기영 /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장 ⓒ 김기영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기영은 약 20년 차 프리랜서 PD이고 방송 비정규직들이 모여 2018년도에 만든 공공운수노조 방송스태프지부의 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KBS 다큐멘터리, MBC <뉴스데스크>, SBS <물은 생명이다> 등 여러 방송사의 방송을 제작했습니다. 현재 드라마 제작 스태프들의 주 52시간 근로 적용, 프리랜서 PD와 작가들의 결방 대책 등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