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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고 몰입해야 할 일에 대하여

자기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진짜 필요한 것

등록 2023.05.26 16:29수정 2023.05.2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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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저는 지난 일을 곱씹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어떨 땐 저도 모르게 입을 앙다물어 입안 양쪽에 치아를 따라 가로선이 생긴 적도 있었죠. 주로 해야 할 말을 못 했을 때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일로 곱씹지는 않지만(하하하), 어쩌면 곱씹던 버릇이 글을 쓸 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에 한 적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하는 어느 그림책 원화전을 보고 말이죠.

일주일에 한 번, 드로잉을 배우러 가는 도서관 칠판에 눈길을 끄는 문구 하나가 적혀 있었는데요.

'이세 히데코 그림책 원화전 - 그림책, 특별한 하루, 특별한 길, 부산 도서관, 5/28일까지'

처음 들어보는 작가명이라 찾아봤더니, 직접 가서 보고 싶은 그림이었어요. 게다가 모르는 길을 걸어, 새로 지은 도서관으로 가서, 그림 전시회를 본다는 것은 저에게 '어서 와'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죠. 평소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즐겨보지는 않았지만 그림과 색감에 반해 먼 길을 다녀왔습니다.

단어 하나를 곱씹어 작품을 완성하다


잡지에서나 볼 것 같은 멋진 도서관 모습에 두리번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니 전시장이 보였어요. 들어가서 하나하나 꼼꼼히 읽고, 또 봤지요. 직접 가서 보니 더 맘에 들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감상하고 나오는데 도슨트가 있다는 작은 안내판을 발견했어요. 책을 보며 기다리다가 도슨트분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와닿았던 것은 이세 히데코 작가님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었어요. 작품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고 자료 조사를 하다 모티브가 될 단어 하나를 만나면, 작가님은 그 단어를 곱씹은 후, 오랫동안 천천히 몰입하여 그림을 완성한다고 했어요. 그 방식이 너무 멋져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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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히데코 그림책 천 개의 바람 출판사에서 제공한 이미지 ⓒ 천 개의 바람


특히 작가님이 모티브로 삼는 주제는 생명과 연관된 것들이 많았는데요. <나무의 아기들>이라는 그림책은 손자를 돌보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 이 아이를 꼭 지키겠다고 다짐하다가, 내 가족만 지키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지진 현장으로 달려가 그곳 아이들의 마음을 살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책을 그려야겠다는 결심을 하셨답니다.

작가님은 그곳에서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는 나무를 아주 오랫동안 관찰하셨다는데요. 훗날 그 나무 주변에 쓰나미로 밀려온 흙에서 가지각색의 싹이 다시 자라나는 것을 보며 앞으로도 그곳에서 살아갈 아이들이 자기만의 싹을 잘 틔워 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완성하셨다고 합니다.

연필로만 그려진 그림은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책을 보는 동안 점점 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곱씹고 몰입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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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그림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 ⓒ Unsplash

 
이세 히데코 작가님의 작업 방식을 듣자, 최근에 읽은 책이 또 생각났습니다. 황농문 교수님의 <몰입>(알에치코리아, 2007)이라는 책인데요. 몰입은 예술가나 수험생 같이 특별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것 같지만, 우리도 살면서 한번씩은 몰입의 순간을 경험하곤 하지요. 그런데 교수님이 몰입하게 된 계기는 좀 독특했어요. 
 
연구가 어렵든 쉽든, 논문을 쓸 수 있든 없든 간에 재료공학 분야에서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연구한다는 론 박사의 태도는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중략) 나는 연구에 대한 노력을 논문 편수 늘리는 데 쏟았고, 그러다 보니 논문을 쓰기 어려운 연구는 피해 가고 있었다. 나의 모든 아이디어는 논문을 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깨달았다. 살아오는 동안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느냐 못하느냐에 삶의 질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중략) 더 이상 논문 쓰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게 아니라 내가 연구하는 분야에서 정말 중요하고 해결해야 할 주제를 선택해,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내 능력을 모두 발휘하기로 했다.  <몰입>, 황농문,  pp. 53~56

이런 결심을 하고 난 다음 교수님은 어떻게 하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계속 생각하는 것(몰입)'이 두뇌를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고, 그런 방식으로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국적도, 성별도, 연령대도 다른 두 분이지만 어쩐지 비슷한 모습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자기 일을 통해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모습 말입니다.

곱씹고 몰입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일이어야 할 텐데요. 요즘 새로운 일을 시작한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시도하면서, 빨리 결과를 얻고 싶은 마음에 정작 중심에 둬야 할 것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 두 분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빨리'라는 단어에 끌려가지 말고, 천천히 하더라도 꼭 해야 할 일을 찾아 몰입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두 분처럼 더 큰 그림을 그리며, 더 큰 마음으로 살자고 마음속으로 크게 되뇌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제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부산 지역 시민기자들이 일상 속에서 도전하고, 질문하고, 경험하는 일을 나눕니다.
#모티브 #몰입 #소명의식 #이세 히데코 #황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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