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더럽혀진 '서울의 흰옷'

30년 흘렀지만 불평등과 사회 모순 더 심화돼

23.05.24 09:40최종업데이트23.05.2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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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어느 퀴퀴한 자취방. 술 한잔 걸친 선배가 기타를 들고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한 다발의 삐라와 신문 감추어진 가방을 메고 행운의 빛을 전하는 새처럼 잠든 사이공을 날아다닌다"로 시작하는 노래는 2절이 시작되면 함께 불렀다.

"어느 날 사라진 내 모습 어머님의 슬픔과 눈물~" 곡조와 노랫말을 좋아했지만 따라부르지 못하는 '음치'의 슬픈 애정곡이었다. 노랫말처럼 자취방에 있던 선배들은 어느 날 말 없이 사라졌고, 한참 후 어느 공단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20대에 좋아했던 노래 '사이공의 흰옷'은 소설이기도 한데, 베트남 작가 응우옌반봉이 1972년에 출간한 소설 <흰옷>이 원작이다. 베트남 시인 레안쑤언이 소설 속 주인공의 실제 인물인 응우옌티쩌우에게 '사이공의 흰옷'이라는 시를 헌사했고, 이후 노래로 만들어져 1980~90년대 한국에서 널리 불렸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서 일할 때는 '내 사랑 민주노조'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한동안 잊고 있던 '그때 그 노래'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을 만나 다시 불렀다. 김소연 분회장이 좋아했다. 투쟁만큼 술과 노래를 좋아했던 기륭전자 조합원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동지들과 거나하게 술에 취하면 내가 먼저 부르자고 졸랐다. 술에 취해 음정 틀린 줄 몰랐고, 음치의 노래를 목청껏 불러도 흔쾌히 따라불러 준 친구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7년 여름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을 짓고 지하 강당에서 빔프로젝터에 금영노래방을 연결해 "방울방울 흐르는 선혈 속에 이 흰옷 언제까지나"를 열창하기도 했다.
 
30년이 흘러 권좌는 군인에서 변호사와 검사로 바뀌었지만, 불평등과 사회 모순은 더 심화됐다. 부자나라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불평등한 나라이며, 비정규직 비율, 노동시간, 자살률, 산업재해율, 합계 출산율, 행복지수 등 모든 통계에서 불행한 국가다.
 
<사이공의 흰옷> 소설을 읽고 노래를 애창했던 소위 '386 운동권'들은 권력을 향해 부나방처럼 날아갔다. '서울의 흰옷'을 꿈꾼 정치는 비리로 더럽혀져 누더기가 됐다. 그들이 집권한 시절 정리해고제, 파견법, 기간제법 등 노동 악법이 통과됐고,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 5년도 비정규직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도 그들은 일본을 향해선 목소리를 높이지만, 베트남에서 벌인 한국의 학살은 침묵한다.
 
민주노조운동 40년, 1980년대 '공순이 공돌이'는 '킹산직'으로 불리는 부러움의 대상이 됐지만, 노조에 가입한 대한민국 상층 노동자 이야기다. 대기업-정규직-노조원과 중소기업-비정규직-비노조원의 거리는 '사이공의 흰옷'을 부르던 시절 관리자와 생산직의 거리만큼 멀어졌다.

직장갑질119 카톡방(gabjil119.com)에는 오늘도 전두환 시절 공단에서 벌어진 해고와 갑질 사연이 쉴 새 없이 올라와 그때 그 시절 '삐라'처럼 일터의 현실을 폭로한다. '사이공의 흰옷' 앞에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이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5,6월호 '그때 그 노래' 꼭지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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