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희생자인 고 진세은씨가 지난해 아버지 생일을 기념하며 떠난 강릉 여행에서 아버지와 함께 손잡고 걷고 있다.
유가족 제공
아빠는 딸이 떠난 이후 '왜 이렇게 말랐냐' 소리를 자주 들었다. 농담으로 "이 상황에서 찌면 이상하죠" 하고 넘기곤 했다. 경찰에서 알려준 트라우마 치료 지원을 신청해 봤지만, 여섯 차례 통화하며 '유가족 증명'을 해야 했을 때는 마음의 병이 더 쌓이는 것만 같았다. 이후 한 시민단체에서 지원하는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차츰 안정을 찾았다.
처음에는 괜히 가족들 마음 다칠까 걱정 돼 카메라 앞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는 가족들과 상의 끝에, 세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참사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알려야겠어요."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묻는 말에 돌아온 답변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아빠는 참사 당일과 그 이후 벌어진 국가기관의 면면들을 보며, "이게 대한민국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112) 사고 신고가 70 몇 건이 넘었다잖아요(참사 당일 오후 6시부터 4시간가량 이태원 일대의 신고 건수는 총 79건이었다-기자 말). 그 때 뭘 했으며... 누군가 하나 가서 제대로 봤다면... 비상긴급문자도, 압사 위험이 있으면 오후 6시, 아니 10시가 됐든... 그때 문자 하나라도 보냈다면. (세은이가) 오후 10시 5분 마지막으로 카드 결제한 기록이 있어요. 겁이 많은 아이예요. 그런 위험이 있다고 하면 움직이지도 않을 애였고..."
진씨는 사회적 참사를 겪고 대응 매뉴얼까지 갖췄던 국가 기관의 시스템이 "왜 교육도 안 되고, 이런 식으로 처리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평소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고 아이들과 함께 여러 집회 현장도 가봤지만, 사회적 재난 문제만큼은 '그래도 정리가 됐겠지' 생각했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누구 하나 나와서 잘못했습니다, 무릎 꿇고 사과하는 사람도 없고, 기록 지웠다고 죄송하다 말도 한 번 안 하고... 유가족들이 모여서 '이런 법 필요 합니다, 만나주십시오' 요청해도 만나주지도 않고. 이게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무너질 수가 없다. 녹사평역 시민분향소에서 2차 가해를 저지르며 악다구니를 쓰는 일부 유튜버들에게 대화도 시도해봤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우릴 욕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대화를 통해 풀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부 모진 소리를 쏟아내는 인터넷 뉴스 아래 댓글도 다 읽어본다고 했다. 이를 꽉 깨물고.
"전 원래 제 몸 관리를 잘 안 했어요. 술 담배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그 이후로, 몸 관리라는 걸 하기 시작했어요. 술도 줄이고 약도 챙겨먹고." 정호씨는 "오래 오래 살아서" 이 모든 참상의 결말을 보고 싶다고 했다.
"혼자 아니다" 느끼는 이유
같은 슬픔을 공유하는 유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면, 어느 때보다 힘을 받는다. 농담을 하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같이 대화가 되고, 이야기가 된다는 게 정말 힘이 많이 된다"고 했다.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의 말 없는 지지와 응원에 가슴이 뭉클해질 때도 많다고 했다. 대전지역 유가족협의회 대표를 맡은 세은이 고모와 싱어송라이터로 집회 현장에서 추모곡을 부르는 조카 예람이까지. 친척들도 함께 힘을 모았다.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인사 한 번 하시더니 손을 이렇게 잡아주시는데... 그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 손이 이렇게 있으면 국화꽃을 포개서 손을 잡아 주시는데, 정말 따뜻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 혼자가 아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아빠는 진상규명을 외치는 길 위에 다시 선다.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맞닥뜨린 외면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한 국민의힘 의원에게 유가족 어머니가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동참을 요청하며 한 말도 떠올렸다. '여러분 자식들은 위험한 나라에 살지 않게 하도록, 우리가 열심히 유가족으로서 한 번 해보겠다'는 말.
"대화를 하자는 겁니다. 국회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다치기도 하고, 병원에 가신 분도 있고 한데... 우리는 폭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합법 시위만 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자꾸 우릴 밀어내려고만 하시는지..."
아빠의 휴대전화 케이스가 더러워지면 세은씨는 잊지 않고 새 케이스를 선물했다. 참사 이후 낡고 닳은 케이스를 아빠는 아직 바꾸지 못하고 있다. 시골집 옆 밭에서 수영장을 만들고 아내와 세은, 셋이 물놀이를 하며 삼겹살을 구워먹던 어느 여름 날. 면허를 갓 딴 딸은 기분 좋게 취한 엄마, 아빠를 태우고 시골길을 달려 에스코트했다. 주말마다 차를 몰고 시골로 갔던 일상. 뒷좌석 세은이의 빈 자리가 헛헛해 이제는 쉽지만은 않다고 했다. 종교가 없었다는 아빠는 이제 "사후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아래는 정호씨가 딸 세은에게 남긴 메시지를 정리해 옮긴 것이다.
[아빠가 세은에게]
"사후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아빠가 세은이한테 갈 때까지 언니, 동생들이랑 재밌게 놀고 있어! 아빠는 좀 천천히 가야할 것 같아. 언니랑 엄마랑 조금만 놀다 갈 테니까 조금 기다리고 있어줘.
꼭 다시 만날 때까지... 여기에서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길 바란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인 고 진세은씨가 초등학교 당시 예쁜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찍은 사진.
유가족 제공

▲이태원 참사 희생자인 고 진세은씨의 아버지 진정호씨가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유성호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공유하기
집안의 웃음 포인트, '아빠 쏘주 콜?' 외치던 막내딸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