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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던 학교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온 마을 힘 모아 세운 옥천 삼화초등학교의 30여년 추억... 폐교 이후 남겨진 과제

등록 2023.05.27 11:26수정 2023.05.27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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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 체육대회 모습 ⓒ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군의 안남면 청정리, 도농리, 화학리. 어느 날 세 개의 마을이 손을 잡았다. 500여 명 어린이들의 앞날을 위해서였다. 지금은 폐교돼 문을 닫았지만, 삼화초등학교는 과거 그 화합의 증거로 자리에 남아있다. 

1968년 문을 연 후 1999년 안남초등학교에 통폐합돼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화초등학교는 무엇을 보고 또 들었을까. 삼화초등학교가 품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세 개 마을이 힘 합한 이유

'삼화', 그 명칭부터 세 개 마을의 화합을 뜻하는 이름이다. 학교가 문을 연 것은 한창 마을에 학생 수가 많던 1968년의 일이다. 당시 전교생이 525명으로, 학급수만 10개, 한 반에 50명가량이 모였다. 

학교가 자리한 곳은 청정리 마을 안쪽(청정리 510-1번지). 지금은 대부분 1인 가구로 70호가량 거주하고 있지만, 청정리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면 소재지였으며 1960년대에도 주민 수가 800명에 달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청정리 마을 중심지에서 안남초등학교까지는 약 2km(도보 25분 거리).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인 이곳에 분교가 생겨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학생 수가 늘어나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지만, 장마 때마다 마을 앞 하천에 물이 넘치는 게 문제가 됐다. 지금은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청정교)가 놓였지만, 당시만 해도 징검다리뿐이어서 홍수 때면 학생들이 등교하기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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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순씨 ⓒ 월간 옥이네

 
"비가 많이 오면 또랑을 못 건너갔어요. 나는 1학년 때 안남초등학교 입학해서 다니다가 2학년 때 잠깐 삼화초등학교 다니다 서울로 전학 갔는데, 아무래도 집 가까이 새 학교가 생겨서 가기 수월했지요." - 정진순씨(66)

인근 마을 도농리, 화학리의 상황은 더했다. 거리도 더 멀었고 학교에 가기까지 넘어야 할 장애물도 더 많았다. 삼화초 4회 졸업생인 조태호(65)씨는 도농리에서 평생을 살아왔는데 3학년 때까지 안남초등학교로, 4학년 때부터는 삼화초등학교로 등교했다. 그는 삼화초등학교가 생기기 전까지의 기억을 회상했다.


"안남초등학교까지는 도농리에서 1시간 거리였지요. 또랑에 물이 불어나면 저수지 뒤편 산길로 학교를 다녔어요. 가끔은 동네 청년들이 나와서 학생들 물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고... 산길로 다닐 땐 학생들 40-50명이 줄 맞춰서 새마을 노래나 군가를 부르면서 걷던 기억도 있지요."

조태호씨는 삼화초등학교가 생긴 이후 "30분이면 (학교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 좋았다"면서 과거 과밀했던 안남초등학교의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안남초등학교 때에는 인원이 넘쳐서 오전반과 점심 이후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다는 것. 세 개 마을의 학생이 500명 정도로 많았던 터라 학생들의 상황을 고려해 분교를 건립하자는 목소리가 마을 내에서 커졌다. 

당시 분교는 마을에서 부지를 마련하면 교육청이 지원해 설립을 인가하는 방식이었는데, 여기에는 지역 주민들의 많은 봉사와 헌신이 있었다.

세 개 마을의 어른들(유정봉, 정수영, 유동신, 유병국, 유동수, 유태봉, 신성용)은 1968년 삼화초등학교 설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해 의지를 다졌다. 도농리 유정봉 씨가 1124평의 땅(화학리 민병춘 땅)을 내놓아 학교 부지를 마련했고 이후 청정리 신태만씨가 실습지 250평을 희사했다. 학교 역사 기록(<삼화초등학교 역사 찾기>)상 괄호 속에 '화학리 민병춘 땅'이라 쓰인 것이 의아한데, 화학리 민상규(90)씨를 만나 그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학교 부지가 이전에는 우리 아버지(민병춘) 땅이었는데, 유씨네 문중 토지가 우리 마을(화학리)에서 더 가까워서 서로 토지를 교환했어. 삼화초등학교 건립 이야기가 나오면서 유씨네 문중이 그 땅을 내어준 게지." 

학교 부지가 유씨네 문중 토지인 동시에 과거 민병춘씨의 땅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외에 교기와 의자, 천막, 축구대, 풍금, 게시판 등 각종 기자재도 여러 주민이 기증했다. 그뿐일까, 건물을 지을 때도 주민들이 나서 땅을 파고 벽돌을 날랐다. 어린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들도 학교 짓는다고 일했어요. 나도 4학년 때 곡괭이 들고 땅 다지고, 나무 심고 그랬는걸. 그때 심은 나무 가만히 두었더라면 아주 크게 자랐겠죠." - 조태호씨

"나도 삽 들고서 땅 파고, 지게 지고 이것저것 날랐어요. 지금 같으면 상상 못 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주민들이 발 벗고 나서서 학교 짓는 데 나섰어요. 부역이라 그랬지. 그때는 사람들이 일도 참 잘했어요." - 이흥주씨(77) 

마을에 활기 일으킨 삼화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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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0월 6일 신축교사 준공식 및 개교기념식 광경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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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선생님으로부터 학교부지 희사에 대한 감사장을 받는 유씨중종 대표 ⓒ 월간 옥이네

 
삼화초등학교에 대한 기록은 현재 안남초등학교에 남아있는데, 2003년 '삼화초등학교 역사 찾기 총동문 협의회'의 수고 덕분이다. 삼화초등학교 역사 찾기 협의회 위원 9명을 중심으로 삼화초 1~30회 졸업생이 흩어진 학교 자료를 한데 모아 정리했던 것. 과거 학교의 설립 과정과 설명, 사진이 비교적 충분한 편이라 옛 삼화초 풍경을 생생하게 되돌아볼 수 있다. 

중장비가 산과 비탈밭을 평평하게 깎아 정리하고, 학생과 학부모를 포함한 마을 주민·군인들이 힘을 모아 땅을 정돈하는 모습, 운동장 자리에 위치했던 전신주가 옮겨지는 모습, 학생들이 줄지어 벽돌을 나르며 건물을 짓는 모습, 1969년 10월 6일 주민들이 운동장에 모두 나와 개교기념식을 치르던 모습도 남아있다.

그중에는 임영진 초대 교장이 개교기념식에서 유씨 종중 대표에 학교 부지를 희사한 것에 대한 감사장을 전달하고, 살림살이를 도맡아 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장면과 행사가 끝난 뒤 학부모들이 다과를 나누며 그간의 노고를 회상하는 장면도 있다. 그야말로 '모두가 세운 학교'임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1968년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한 이후로 삼화초등학교는 1970년까지 교실을 증축하며 10개 교실을 완성했다. 매년 가을이면 운동회를 열었는데, 마을 전체가 왁자지껄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전체 학생들이 풍물패 옷차림에 소고를 들고 등장하는가 하면 여학생들은 고운 한복을 입고 단체로 부채춤을 선보였다. 흰 옷차림의 마을 어르신들과 어린 학생들이 함께하는 활동도 눈에 띈다. 

"운동회 할 때는 세 개 마을 사람들이 다 참여했지. 나도 학부모로 계주 뛰러 갔던 기억이 나. 규모도 대단히 크고 재밌었어." - 민상규씨

삼화초등학교에는 유난히 육상 부문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이 많아 소년체전, 육상경기대회 등 체육대회에서 각종 수상을 휩쓸기도 했다.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1000m 1위를 한 정훈기 선수를 환영하는 모습, 단복을 입은 '옥천 선수단'을 격려하는 모습도 사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뛰어노는 것이 일이었으니, 다들 운동을 잘했어요. 저수지 둑이 잔디밭이니까, 거기서 친구들이랑 100m 달리기 시합도 하며 놀고 축구, 배구 안 해본 운동이 없었지요. 나도 옥천군 학교 대항 달리기 대회에 선수로 나간 적 있지요." - 조태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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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호씨 ⓒ 월간 옥이네

 
삼화초등학교의 존재는 마을의 상권을 활성화하는 역할 역시 했다. 문구점이 생겨나고 슈퍼에도 학생들의 발길이 늘어났던 것. 면소재지가 아니고선 작은 상점 하나도 찾기 어려운 지금으로썬 상상만으로도 낯선 풍경이다. 이흥주·이순덕씨 부부는 세 자녀의 학부모인 동시에 과거 삼화초등학교 앞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며 학교의 변천사를 지켜봐 왔다. 

"학교가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에서 문구점을 운영했지요. 여기 말고도 문구점이 한 군데 더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우리 문구점이 제일 가까웠죠. 간판 없이 창고 형식으로 지은 건물이었어요. 학용품이니 체육복, 과자를 내다 놓았죠. 연필 하나에 10원, 노트 하나에 50원 하던 시절이네요." - 이순덕씨(73) 

학생들은 이들의 문구점에 드나들며 정을 쌓았다.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면 특히 어린이들로 문구점이 바글바글했을 테다. 청정리 마을 입구에 자리한 삼화슈퍼와 옥천상회 역시 이들의 발걸음이 향했던 곳이다. 옥천상회 신옥순(73)씨는 학생들로 북적이던 옛 풍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많이 사 가지는 않았어도 우리 가게 많이 들렀지. 학교 끝나면 요 앞에 사람이 말도 못하게 많았어."

학생 수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다. 한 해 졸업생이 많을 때는 66명(1976년)에 이르렀던 삼화초등학교지만 1992년부터는 15명 내외로 그 수가 줄었다. 1980년대 산아제한정책으로 출생률이 감소하고 도시로 떠나는 가족이 부쩍 늘던 시대 흐름 의 결과였다. 

그 흐름에 따라 교육청에서는 학생 수가 적은 농촌지역 학교를 통폐합해 '정상적인 운영'을 하도록 권고하기 시작했다. 옥천에서는 추소초(군북면), 대동초(안내면), 군동초(옥천읍)가 앞서 통폐합되며 불안감이 커졌고 삼화초등학교에도 결국 1999년 안남초등학교와 통폐합이 예고됐다.

통폐합을 앞둔 1998년 10월, 삼화초등학교에서는 마지막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수 놓이고 전교생 44명과 주민들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응원을 외쳤지만, 그 소리는 이전과 달리 어쩐지 쓸쓸하게 울려 퍼졌을 테다. 

35명의 학생을 마지막으로 안남초에 통폐합된 삼화초등학교. 학교가 지어진 지 30여 년 만의 일이었다. 통폐합 이후, 삼화초등학교에 다니던 학생 24명은 안남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다. 학교 앞 문구점 역시 통폐합과 함께 그해에 문을 닫아 지금은 그 흔적마저 사라진 상태다. 

텅 빈 학교, 텅 빈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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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기념식이 끝난 뒤 그간의 노고를 회상하고 담소를 나누는 내빈 학부형들 ⓒ 월간 옥이네

 
학교가 사라진 마을은 큰 상실감을 감내해야 했다. 모교를 잃은 1300여 명의 졸업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남초등학교가 남아있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이곳 역시 2023년 현재 전교생이 15명. 학생 수가 줄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마음을 달래보려는 듯, 안남초·삼화초 총동문회는 매년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졸업생 200여 명이 모여 모교와 고향의 정을 나누는 자리다. 

삼화초등학교는 통폐합된 1999년 서울 샬롬교회에 매각돼 지금껏 교회 수련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삼화초등학교의 졸업생인 정진성 목사가 부지를 매입한 것. 샬롬교회에서 1년에 두세 차례 교인들이 이곳에 방문해 행사를 진행하는데, 덕분에 삼화초등학교는 타 폐교에 비해 잘 정돈된 모습으로 남아있는 편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문이 굳게 닫혀있어 주민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한다.

"폐교될 당시에는 다른 지역에 있었지요. 아직 졸업생들이 사회에서 자리잡기 이전이었을 거예요. 만일 졸업생들이 힘을 모아서 공동의 땅으로 남겨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요. 사유지가 된 이상 마음대로 가서 추억을 회상하기 어려우니까요." - 주민 A씨

"삼화초등학교는 주민들이 땅을 희사하고 직접 벽돌을 쌓아 만든 학교잖아요. 그런 것을 생각해서 교육청에서 학교를 개인에 매각할 것이 아니라, 마을에 돌려주었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했다면 마을 복지 시설로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요. 지금 개인이 학교를 매수한 이상, 관리를 위해 문을 걸어 잠그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폐교 이후 마을 주민들이 함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면 좋았을 텐데 교육청이 학교를 매각한 것이 아쉽습니다." - 주민 B씨

졸업생들과 주민들의 수많은 기억을 담고 있는 학교 건물이기에 남다른 애착이 있을 테다. 이제 개인의 소유가 되어 학교를 공공의 장소로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헛헛한 마음으로 남는 듯하다. 

인구 감소로 문을 닫는 학교가 점차 늘어나는 지금, 비어버린 학교 건물은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많은 이들의 사랑이 묻어있기에 더욱 신중하게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학교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동시에, 미래를 위하는 방법은 없을까.

월간옥이네 통권 71호(2023년 5월호)
글‧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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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폐교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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