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7 04:48최종 업데이트 23.06.0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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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싱가포르에 처음 왔을 때의 일입니다. 가족과 함께 이민을 온 거라 제일 먼저 한 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학비가 국적에 따라 달랐습니다. 싱가포르 국민이 제일 싸고, 그 다음은 영주권자, 제일 비싼 건 외국인이었습니다. 외국인도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아세안 소속 국가에서 온 외국인이면 좀 싸고, 그 밖의 외국인들은 싱가포르 국민에 비해 거의 100배 가까운 학비를 냈습니다.
 

싱가포르의 초등학교 학비. 국적별로 금액 차이가 큰데 외국인도 아세안과 비아세안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 MOE

 
전 '아세안(ASEAN)'을 아시안(ASIAN)으로 잘못 읽고 한국에서 온 우리를 같은 아시아인이라고 좀 더 싸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학비를 낼 때가 돼서야 그 아세안이 아시아 사람이 아니라 동남아국가연합(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을 뜻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럼 아세안이 뭐기에 싱가포르 학교에선 그 나라 국민들에게만 학비를 깎아주는 걸까요? 17년 전의 저처럼 아세안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 아세안에 대한 간단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아시안 말고, 아세안

아세안은 동남아시아 10개국의 지역 경제 공동체로, 유럽연합에 비해서는 좀 느슨한 국가간 연합입니다.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베트남, 브루나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태국, 필리핀이 회원국이며 이들 나라의 인구를 모두 더하면 6억 7천만 명이 넘고, 2021년 기준으로 GDP (국내총생산)가 3.3조 달러가 넘는 거대 공동체입니다.


1961년 태국·필리핀·말레이시아 3개국이 공산주의 확대 저지 및 국제정세 공동 대응을 목표로 창설한 동남아연합 (ASA :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이 아세안의 뿌리입니다. 이후 베트남전 발발과 싱가포르 독립 등 역내정세 변화에 따라 동남아 연합의 확대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자 1967년에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가 동남아 연합에 합류하여 아세안이 된 것입니다.

이후 브루나이가 독립 후 가입했고, 좀 더 시간이 지나 1990년대에 냉전이 종식되고 공산주의 확대 저지 같은 초기 목적이 의미를 잃자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잇달아 가입하면서 지금과 같이 10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후 2015년에 아세안 정치‧안보 공동체(APSC), 아세안 경제공동체(AEC), 아세안 사회・문화 공동체(ASCC)로 구성된 아세안 공동체(ASEAN Community)를 출범시켜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세안의 상설 사무국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있고,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정상회의는 매년 개최됩니다.
 

아세안 개황. 아세안 10개국의 인구를 더하면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많습니다. ⓒ 한-아세안 센터

 
한국은 1989년 아세안과 부분 대화관계(Sectoral Dialogue Partnership)를 수립한 이후 1991년에는 완전대화상대국 관계(Full Dialogue Partnership)로 격상되었습니다. 참고로 아세안의 완전대화상대국은 10개뿐입니다.

1997년에 '한·아세안 정상회의'와 '아세안+3(한국, 중국, 일본) 정상회의''가 동시에 개최 되면서 한국과 아세안은 좀 더 가까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역대 정부는 한-아세안 FTA 협정 체결, 한-아세안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공동선언 채택, 아세안 특사 파견, 부산에 아세안문화원 개원 등 아세안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특히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신남방정책'을 천명하고 ''한·아세안 미래공동체 비전''을 발표하면서 아세안과의 거리는 급격하게 가까워졌습니다. 그 때까지의 우리 외교는 한반도를 둘러싼 4강(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게 우선이었지만, 신남방정책 천명으로 아세안과의 외교를 기존의 4강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함께 우리나라 외교의 큰 변화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중국 다음으로 큰 우리의 수출시장

역대 우리 정부의 이 같은 외교적 노력은 경제적 성과로 나타났습니다. 1989년 82억 달러에 그쳤던 한-아세안 교역규모는 2022년에 2074억 달러로 25배나 늘었습니다. 아세안을 상대로 한 무역수지는 2000년 이후 연간 단위로 한 번도 적자를 본 적이 없어서 우리나라 전체 무역수지 472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던 2022년에도 아세안을 상대로는 423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2000년 이후 아세안과의 무역 규모. 전체적으로 큰 성장 추세이며 2022년 무역금액이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 이봉렬

 
아세안은 경제권역 단위로 보면 미국을 제치고 중국 다음으로 큰 우리의 수출 시장입니다. 제 2의 해외투자 대상지역이며, 제 1의 건설수주 시장이기도 합니다. 양측간 교류인원은 연간 12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교류가 활발합니다.

미·중 갈등 속에서 중국과의 무역수지는 적자전환한 지 오래고, 일본과는 늘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세안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우리의 무역수지를 끌어 올리는 일등 공신입니다. 아세안은 젊은층의 비중이 높은 세계 3위의 인구를 가진 거대한 소비 시장, 풍부한 천연자원, 빠르게 자리 잡은 글로벌생산거점, 경쟁력 높은 관광산업 등을 고루 갖추고 있어 앞으로도 한국 수출의 매력적인 대안입니다.

거기에 한류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대한 인식도 긍정적입니다. 넷플릭스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늘 최우선 순위에 오르고, 얼마 전 블랙핑크의 공연은 5만 5천명의 동남아 팬들로 가득 찼습니다. 싱가포르 최대 맥주브랜드인 타이거는 한국 소주를 섞은 맥주를 만들어 팔고, 맥도날드는 한국 이름을 붙인 햄버거 메뉴를 따로 만들어 팝니다. 인도네시아는 BTS 팬인 아미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나요?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닙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불편한 일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다른 10개 국가가 모여 연합체를 이룬 아세안은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못사는 나라가 맞습니다. 그런 나라들을 상대로 무역을 하고 또 엄청난 수익을 거둬 들이고 있다면 외교를 할 때 좀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내외의 섬세하지 못한 행보
  

2022년 11월, 대통령실에서 배포한 김건희씨 사진. 캄보디아 국민 입장에서 이 사진을 보면 그 심정이 어떨까요? ⓒ 대통령실

    
그런데 지난해 11월, 캄보디아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 함께 간 윤 대통령 부인 김건희씨는 주최국인 캄보디아가 주최하는 정상 배우자 프로그램에는 불참한 채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캄보디아 소년을 안고 사진을 찍어 배포했습니다. 당시 이 사진은 "오드리 헵번 코스프레"아니냐는 논란도 있었고, "빈곤 포르노" 발언으로 정쟁의 대상이 되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김건희씨의 행태에 대한 캄보디아의 입장입니다. 아세안 정상회담 주최국으로서 세계 정상을 불러서 자국의 밝은 면을 보여 주고 싶었던 캄보디아로선 병약한 캄보디아의 소년이 한국의 대통령 부인의 품에 안겨 있는 불쌍한 모습이 더 크게 보도되는 걸 어떻게 봤을까요? 그들의 입장에선 윤 대통령 부부를 초청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상황이 됐다고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가 열렸던 2022년 11월 15일.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각국 정상을 맞이하는 모습과 윤대통령 부부가 뒤늦게 행사 중에 자리를 찾아 가는 모습 ⓒ YTN보도화면 갈무리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11월 15일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주최한 G20 정상회의 환영 만찬장에서 행사 각국의 정상들이 자유롭게 담소를 나누는 중에 자리에만 앉아 있는 윤 대통령을 향해 김건희씨가 일어나 나가라는 듯한 말과 손짓을 하는 장면이 영상에 잡혀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윤 대통령 부부는 행사가 시작되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입장하는 각국의 정상을 일일이 맞이한 후 환영사를 마칠 때까지 나타나지 않다가 행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중에 자리를 찾아 가는 모습으로 행사를 어수선하게 만든 겁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윤 대통령은 그 다음날 열린 맹그로브 모종 식수 행사에는 박진 외교부 장관을 참석시키고 귀국했습니다. 그 행사는 주최국인 인도네시아가 지구 차원의 기후위기에 대한 공동 대응에 앞장서고 있다는 걸 과시하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바이든 대통령과 인도 모리 총리,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등 G20정상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정상들이 함께 식수를 하고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눴는데 윤 대통령은 그 자리에 없었던 겁니다. 행사의 주최국으로서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국민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2022년 11월 16일(현지시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이 인도네시아 발리 덴파사르의 맹그로브 파종구역에서 삽질을 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 연합뉴스

   
윤 대통령의 외교는 어디로 가나

지난해 11월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을 계기로 배포한 '아세안 경제협력의 중요성과 신정부 추진 전략' 보도자료에서 "현재 협력 관계가 베트남, 싱가포르 등에 편중돼 있다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등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살펴본 바 대로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이 두나라와는 시작이 썩 좋지 않습니다.

6월 1일, 산업통상자원부는 2023년 5월 수출 실적을 발표했습니다. 자료를 보니 아세안을 상대로 한 수출이 지난해 10월 이후 8개월째 전년 동기 대비 줄어들고 있습니다. 8개월 연속으로 동기 대비 수출이 줄어든 건 2008년 금융위기 때 이후 처음입니다. 코로나 때도 없었던 일입니다. 중국의 대 아세안 수출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과도 비교되는 결과입니다.
 

아세안에 대한 수출과 무역수지가 전년 동기 대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아세안과의 전년동기 대비 무역수지가 10개월째 감소하는 건 2000년 대 들어 처음 있는 일입니다. ⓒ 이봉렬

 
무역수지 추세를 보면 더 심각합니다. 아세안을 상대로 한 무역수지는 아직 흑자이긴 하지만 그 규모가 계속 줄어 들고 있습니다. 한 때 월 47억 달러에 이르던 무역수지 흑자가 올해 1월에는 18억 달러도 채 안 됐고, 5월에도 21억 달러에 그쳤습니다. 전년 동기 대비 무역수지를 보면 10개월 연속으로 줄고 있는데 이런 역성장은 금세기 들어 처음 있는 일입니다.

산업통산자원부는 5월 수출입 동향 보고서에서 "글로벌 수요 약세 등으로 아세안 내 최대 무역 파트너인 베트남의 對세계 수출입이 줄어"든 게 아세안을 향한 수출이 줄어드는 주요 원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반도체나 전기전자 부품 등의 중간재를 베트남으로 수출한 후 그 곳에서 완제품을 만들어 다시 세계로 수출하는데 코로나 이후 베트남에서 만든 완제품의 수출이 줄면서 베트남을 향한 우리의 중간재 수출 역시 줄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베트남 뿐만 아니라 다른 아세안 국가에 대한 수출도 마찬가지로 줄고 있습니다. 아세안 국가 중에서도 베트남, 싱가포르,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이 다섯 개 나라가 우리의 대 아세안 수출액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다섯 나라 모두 우리 수출이 전년 대비 적게는 5%에서 많게는 30%나 줄었습니다. 베트남의 수출이 늘기만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아세안의 다른 국가들과도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수출 감소의 원인을 찾고 새로운 수출품목 개발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대통령실은 "아세안과의 교역 규모가 이번 정부 내 2600억달러로 1.5배 성장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처럼 실상은 성장은 커녕 첫 해부터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교역 상대 가운데 무역규모가 가장 크고 지속적으로 흑자를 내오던 아세안조차도 이렇게 위험한 지경으로 향해 가고 있는데, 적극적인 교류는 커녕 오히려 헛발질만 하고 있으니 무슨 수로 성장을 할 거라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 폐기하고 '한국판' 인도·태평양 전략이란 걸 새로 들고 나온 거나, 윤 대통령 부부가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에서 벌인 미숙한 일들이 대아세안 수출 감소로 곧바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2022년 11월 11일(현지시간) 윤석열 대통령이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국-캄보디아 정상회담에서 훈센 캄보디아 총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대통령실

 
하지만 우리 외교가 중국과 러시아를 적대하고, 미국과 일본을 숭상하며, 아세안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을 홀대한다면 앞으로 우리 수출과 경제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건 확실합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외교부 제 1차관을 역임했던 최종건 교수는 최근 펴낸 책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인수위 시절에 주 한국 아세안 대사들이 단체로 찾아와 "제발 신남방정책이 유지되도록 다음 정부에도 제언해 달라"고 청원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아세안 대사들의 청원에 귀를 귀울였다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지 않았을까요? 아세안을 향한 세계 각국의 구애가 이어지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의 대 아세안 외교는 어디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17년 전 아세안이 뭔지 몰랐던 저는 예상보다 학비를 더 내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2대 교역국이자 최대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아세안에 대해 잘 모른다면 우리 경제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역대급으로 뒤로 가는 대 아세안 무역, 이쯤에서 돌려 세워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우리 수출,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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