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나는 아동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인터뷰] 30년 전 피해 공개한 지안씨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건지려고요"

등록 2023.06.05 04:39수정 2023.06.05 09:18
4
원고료로 응원
a

지안씨의 아픈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 unsplash

 
지안(가명, 37)씨는 그곳을 '추운 집'으로 기억했다. 

그녀는 발바닥에 닿던 차가운 감촉, 읽던 책을 모아놨던 작은 방, 그 방안에서 나던 입김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방에는 다홍색 큰 꽃이 그려진 이불이 깔려 있었고,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이불 안에서 TV를 봤던 일곱 살의 자신을 기억했다. 그리고, 이불 아래로 자신을 만졌던 축축하고 뜨거운 손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행동도 못 하고 그저 얼어붙은 뻣뻣한 나뭇가지처럼 앉아있었던 게 기억이 나요. 처음 겪는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웠던 일이라... 그때가 첫 피해였어요."
  
1992년 서울 신정동의 추운 집에서 시작된 성폭력은 사당동 아파트, 그 사람이 살던 단칸방까지 이어졌다. 강제추행과 준강간의 성폭력은 가해자의 딸이 태어난 즈음에야 멈췄다. 지안씨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된 1994년 9월경의 일이다.

가해자는, 엄마가 가장 사랑하던 여동생의 남편이었다.

피해 사실 알리자 돌아온 엄마의 반응 "이 얘기는 비밀로 하자"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에게 피해사실을 처음으로 얘기했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해보라'는 질문에 튀어나온 말들이었다. 선생님은 바로 엄마에게 전화했다. 집에 돌아온 지안씨는 엄마에게 "모두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엄마는 "어디를 만졌는지, 몇 번이나 그랬는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모 두 번째 결혼인데 잘못되면 큰일 난다, 이 얘기는 엄마와 비밀로 하자. 아빠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

그때만 해도, 이 모든 사실이 '비밀'이 돼버리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작 열 한 살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분했다. 엄마가 전혀 문제 삼지 않는 일에 대해 '전혀 괜찮아지지 않은' 자신이 이상한 사람 같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친한 친구에게 털어놨지만 오히려 "비밀이 알려져 이모의 두 번째 결혼이 불행하게 될지 모른다"는 죄책감마저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엄마는 그 후에도 이모 부부와 만나는 자리에 지안씨를 데리고 다녔다. 항의하자, 지안씨를 놔두고 이모 부부를 만났다. 마음속에 불길이 일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자 심장에 통증을 느꼈다. 숨을 쉬기 어려웠다. 죽을 것만 같아 병원에서 검사를 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심장전문의는 신경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이때, 아빠도 지안씨의 피해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누구도 지안씨 옆에 서주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안씨네 가족은 이민을 떠났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 악몽을 꿨고, 이유 없이 몸이 아팠으며, 살아있는 것 자체에 비참함을 느꼈다고 했다. 1년 후, 그녀는 부모에게서 독립했다. 그리고 삶을 끝내려 했다. 자살을 시도했던 딸을 향해 엄마는 말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지안씨는 "아직도 성폭력 당하는 악몽을 꾼다"고 했다. 며칠 후 가해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미안하다고 했다.

"2006년 9월 11일 일이에요. 가해자가 '네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줄 몰랐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뭐가 미안하냐니까 거듭 '미안하다'고만 했어요. 전화기를 붙들고 짐승처럼 울었어요."
 

침묵을 강요받은 삶 "차라리 정신이 나가버렸으면 좋겠어"

아침저녁으로 정신과 약을 먹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삶을 끝내려 했다. 병원에 실려 간 지안씨를 향해 "죽을 생각도 없었지?"라고 말하던 엄마. 입버릇처럼 이모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말하던 엄마. 지안씨는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를 들으면 침을 흘리듯, 피해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차라리 정신이 나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날이었다.
  
와중에 그녀는 부모님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다. 제발 사랑해달라는 호소였다.

"미국에서 사는 내내 물심양면 최선을 다해서 효도했어요.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어요. 온몸을 갈아 넣어 부모님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어요. 그래도 끝내 누구도 저를 돌아봐 주지 않았어요. 부모님 앞에서는 늘 웃었어요. 제 감정이, 불행이, 괴로움이, 고통이 부모님에게는 너무 가볍게 여겨지는 거 같아 더 이상 진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어요."
 
a

현행법상 친족성폭력은 4촌 이내의 혈족과 인척, 동거하는 친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말한다. ⓒ freeimages


2018년부터는 사회생활이 힘들어질 정도로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심해졌다. 원인 모를 신체적 아픔과 싸워야 했다.
  
"몸이 아프니까 검사를 많이 했어요. 그러고는 집에 오면 들떴어요. '이제 끝이구나.' 살아있는 게 너무 힘들었으니까요. 검사 결과가 나와요, 정상이래요. 너무너무 절망스러웠어요."  

2019년 한국으로 돌아간 엄마는 이전보다 더 자주 이모 얘기를 했다. 이모가 얼마나 착한지, 얼마나 행복할 자격이 넘치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그럴 때마다 지안씨는 "난 이미 불행하니까, 내가 어떻게 되든 남들까지 불행하게 만들면 안 된다"고 느꼈다고 했다. 2022년 1월, 또 다른 이모 윤희(가명)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다. 윤희 이모는 다음 날 가해자에게 연락해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했다. 그러나 지안씨는 가해자와 통화할 자신이 없었다.

"정신적으로 엄마에게 너무 종속된 상태였고, 엄마가 한국에 있는 동안 이모와 잘 지내려면 결국 제가 용서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가해자에게 카카오톡으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잊겠다'는 말도 안 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정말 잊고 싶었어요. 나도 다 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어요. 그때는 정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착각했어요. 그랬더니 엄마는 정확히 이렇게 말했어요.
  
'네가 그런 마음이 생겨서 좀 더 성숙해진 마음으로 이모까지 감싸는 어른이 된 걸, 미움으로 독이 된 마음을 접을 수 있게 된 우리 딸을 진심으로 두 팔 벌려 축복해'."
 

"내 탓이 아니"라는 자각, 이후 결정한 소송
 
a

한국YWCA '미투 운동' 지지 장미행진 3.8 여성의 날 '미투 운동' 지지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YWCA행진이 2018년 3월 8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한국YWCA연합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 권우성


엄마는 이제야 지안씨의 삶을 축복한다고 했지만, 지안씨는 스스로를 축복할 수 없었다. 2022년 4월, 아동학대와 트라우마에 대해 전문적으로 심리 상담을 해 온 박사님과 심리치료를 시작했다.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도 이때 받았다. 그제야 "성폭력 피해사실이 인생의 근간을 흔들어 너무 많은 부분을 뒤바꿔 놓았음을" 지안씨 스스로 알게 됐다. 
 
"저도 저를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수많은 자해와 자살 시도, 만성적인 우울증, 과잉경계, 지속적인 불안장애, 불면증, 폭식증, 대인기피증 등 정신적인 문제들에 대해 제가 이상한 사람이라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박사님께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내가 그런 일을 당한 것,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것, 정신증상이 신체증상으로 발현돼 몸이 아픈 것, 모두 제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제가 앓고 있는 병증 가운데 목구멍과 혓바닥이 계속해서 경련을 일으키며 말리는 증상이 있어요. 박사님이 '너의 목소리를 너무 오래 잃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고소장을 접수하고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혓바닥 경련 증상이 나아졌어요."
 
 
지난해 10월, 그녀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13세 미만의 미성년자에 대한 강간, 강제추행 및 친족관계에 의한 강간 등),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위반(아동·청소년에 대한 강간·강제추행 등) 혐의로 가해자를 고소했다. 그리고 지난 5월 가해자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했다. 5월 19일 이후 여러 차례 <오마이뉴스>와 서면·전화인터뷰를 진행한 것도 '목소리 내기'의 일환이었다. 지안씨는 말했다.

"사는 내내 정말 죽고 싶었지만 이제는 살고 싶어서 사건을 공개하기로 했어요.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건져내려고요. 생존이 아닌 진짜 '삶'을 살려고요. 진실을 소리치고 싶어요. 아무도 은폐하지 못한다는 걸, 내 삶의 주인은 나고, 내 법적 권리는 내가 결정한다는 걸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어요. 저는 제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이거라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안 하면 제가 저한테 너무 미안하잖아요."

"지옥 같은 시간을 이겨내고 생존한 당신, 정말 강한 사람이에요"

2022년 4월 경 엄마와 연락을 끊었다.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며 지안씨에게 남겨준 박스를 2022년 3월 무렵 열어본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박스 안에는 가해자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을 발견한 순간 "고통이 쓰나미처럼 밀려온" 지안씨는 살기 위해 엄마와의 단절을 택했다.

대신, 상황을 지켜보던 지안씨의 사촌들이 지안씨의 지지자가 돼주었다. 그 중 가장 큰 언니는 지안씨 엄마에게 연락해 '피해가 그 순간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지안이 인생 전반을 망가트리고 있음'을 조금씩 이해시켰다. 엄마는 "아기 때라, 그 때 겪은 일은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더불어 엄마도 정신과 상담을 몇 차례 받아봤다고 했다. 엄마와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엄마에게 '이모보다 네가 소중하다, 그 때 잘못 판단했다, 미안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었어요. 그리고 며칠 전 그런 연락을 받았어요. 이제라도 제 편에 서서 싸워주겠다고요."

엄마는 열 한 살의 지안이 엄마에게 털어놨던 일들을, 진술서에 적었다.
  
"지안이는 이모부가 계속 자기를 만져왔었다고, 당시 자신이 처해있던 상황들과 장소들을 말했습니다. 만 여섯 살 때 추운집에서, 만 일곱 살 때 사당동 아파트에서, 만 여덟 살 때 가해자 집에서 계속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알고 있으며 증언할 수 있습니다. (중략) 지난 5월 11일 윤희가 전화해 '형부가 지안이한테 고소당했다, 형부는 지안이가 예뻐서 옷 위로 딱 한 번 만졌다는데'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엄마의 진술서 중)

그녀가 바라는 것은 하나다.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며, 고개 숙여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a

아동 성폭력 추방을 위한 시민모임 '발자국' 회원들이 2012년 9월 4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촛불집회를 열어 아동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 강화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살인은 사람을 죽이지만 가족 안에서 (성폭력 등의) 피해를 입은 피해자는 영혼이 살해되는 거 같은 기분을 느끼게 돼요."
  
30년 동안 영혼 살해를 겪어 온 지안씨는 친족 성폭력과 가족 내 2차 가해를 겪고 있는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당신은 가해자와 가족들을 용서하고 사과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요.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왜 이리도 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지, 왜 가해자 편에 선 가족들에게 대항하지 못하는지, 왜 가해자에게 그 잘못을 따져 묻지 못하는지, 왜... 왜.. .왜...

수많은 시간을 자책하며 얼마나 외로웠을지 그 마음을 잘 안다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내가 당신을 응원하고 함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남보다 못한 가족들도 많지만, 가족보다 나은 동지들이 있다고요. 지옥 같은 시간을 이겨내고 생존한 당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지금 살아 숨 쉬는 당신이 얼마나 기적 같은 존재인지 잊지 말라는 말도 하고 싶어요. 우리 죽지 말고 함께 살아요."
#아동 성폭력 #친족 성폭력 #PTSD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댓글4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배달하다 숨진 26살 청년, 하루 뒤에 온 충격 메일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