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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에게도 재생산권 보장이 필요하다

[모임넷 연속기고] 모두를 위한 유산유도제 도입을! (1)

등록 2023.05.31 10:59수정 2023.05.3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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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후 4년, '낙태죄'의 법적 효력이 사라진지 3년차가 되었다. 세계보건기구는 모든 국가가 조건 없이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 마련, 건강보험 보장, 유산유도제 도입을 미루고만 있다. 임신중지에 사용하는 약인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지정한 필수핵심의약품이며, 올해 약을 승인한 아르헨티나와 일본을 포함해 현재 전 세계 95개국에서 안전하게 사용하고 있다. 유산유도제의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은 특히 비용이나 노동 조건, 연령, 장애, 국적 등의 이유로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성이 낮거나 폭력 피해에 처한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에서는 6월 15일까지 진행되는 '유산유도제 도입 촉구 다수인 민원 보내기 캠페인'을 앞두고 "모두를 위한 유산유도제 도입을!" 기고글을 연재한다.[기자말]
2021년 1월 1일자로 '낙태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한국에서 임신중지를 하는 것은 더 이상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가 이미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유산유도제는 아직 국내 도입이 되지 않았고 병원이 부르는 임신중지 비용은 천차만별이다. 시민들이 이런 일상에서 과연 '낙태죄' 폐지를 실감할 수 있을까?

'낙태죄' 없는 세상은 이전과 달라야 하지만 실질적인 재생산권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상에서 시민들의 체감하는 바는 크게 다르지 않다. 변화가 없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폭력 피해로 임신해서 임신중지를 결정한 경우, 피해자는 성폭력상담소, 해바라기센터 등을 통해 임신중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여성가족부 운영지침(2023)은 "성폭력으로 임신한 태아의 낙태 또는 출산"을 성폭력 피해자 의료지원의 범위로 명시하고 있는데 모자보건법 제14조를 아직도 근거 규정으로 두고 있다. 모자보건법 제14조는 과거에 '낙태죄'가 존재했을 때 "강간 또는 준강간으로 임신되는 경우" 등 제한적으로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허용한 조항으로 '낙태죄'가 폐지되면서 함께 법적 효력이 상실된 조항이다. 현재 이 조항의 경우에 한해서만, 임신중지 의료행위에 건강보험이 적용되고 있는데 더 이상 '낙태죄'가 없어진 지금, 모든 경우의 임신중지에 대해 건강보험이 적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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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환호하는 사람들 ⓒ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 네트워크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임신중지 지원의 한계

성폭력 피해자는 어차피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가 기관을 통해 임신중지 지원을 받는 것은 쉽지 않다. 지원을 받기까지 수많은 판단과 고민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성폭력 피해자로서 임신중지 지원을 받으려면, 먼저 성폭력 피해를 인지해야 하는데 이 과정부터가 쉽지 않다. 실제 성폭력의 약 85%는 아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 성폭력 가해자는 평소 내가 친밀하게 생각하고 아끼던 데이트상대, 친구, 또는 신뢰하고 존경했던 직장 상사, 선생님, 또는 나의 법적 보호자인 친족이다.

성폭력 가해자는 자신의 위력, 피해자의 신뢰, 친밀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성폭력을 가한다. 데이트 성폭력은 때로 '애정'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피해자가 술이나 잠에 취한 상태를 이용하는 성폭력도 매우 흔하다. 이렇게 직접적인 폭행이나 협박 없이 발생하는 성폭력은 전체 성폭력의 약 71.4%에 달한다(2019 전국성폭력상담소 상담사례 분석).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평소 신뢰하고 친밀하게 생각했던 사람을 가해자로 명명하고 피해 경험을 곧바로 성폭력이라고 재해석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피해자는 그때의 경험이 성폭력인지 아예 생각지 못할 수도, 자신을 먼저 책망하기도, 성폭력 피해를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잊고 있다가 몇 년이 흐른 후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고 다른 성폭력 피해자의 고발을 보고 문득 몇 년 전의 내 경험도 혹시 성폭력이었나를 질문하기도 한다.


성폭력 피해를 인지한 이후에는 임신중지 지원을 제공하는 기관을 찾아야 하는데 성폭력 피해자가 임신중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를 수도 있고 피해자가 거주하는 지역에 임신중지 지원을 제공하는 기관이 없을 수도 있다. 거주지나 인근에 성폭력상담소나 해바라기센터가 있다면 임신중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모든 성폭력 피해자가 임신중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상담, 의료, 법률, 수사 지원을 제공하는 국가기관인 해바라기센터는 지원 대상을 "형법,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 특례법,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로 명시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직접적인 폭행과 협박이 없는 성폭력이 대다수인데 현재 형법 강간죄의 구성요건이 "폭행 및 협박"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임신중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피해자는 한정적이다.

예를 들어, 데이트 상대와 합의하에 성관계를 시작했는데 상대가 동의 없이 콘돔을 빼서 임신이 된 '스텔싱(stealthing)' 같은 사례도 성폭력 피해자로서 임신중지 지원을 받기 어렵다. 스텔싱은 영국, 독일, 캐나다 등에서 성폭력 법으로 처벌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를 규정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해바라기센터 사업안내에 따르면, 범죄 구성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도 피해자를 가급적 지원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상 해바라기센터에서 경찰 진술이 함께 진행되기 때문에 피해자가 사건을 신고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면, 기관 방문을 망설일 것이다.

유산유도제 도입과 건보 적용, 피해 지원 넘어 권리 보장으로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의 임신중지 지원이 한계적인 상황에서 임신중지 의료행위에 대한 건강보험 도입과 유산유도제 도입은 임신중지에 대한 다양한 선택지를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약물을 통한 임신중지는 수술실에서 진행되는 임신중지 수술과 달리 마취, 항생제 등이 필요 없고 원하는 공간에서 원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수술이 부담되거나 성폭력 해결을 지지하는 지지자와 임신중지 과정에서 함께 있고 싶은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성폭력은 통제력이 상실된 경험이기도 하다. 성폭력 피해자는 성폭력 해결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일상을 단단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임신상태 유지 여부, 임신중지를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선택지가 있어야 하고 그 결정이 존중받아야 하고 이 모든 정보를 공식적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유산유도제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 등 재생산권 보장이 곧 성폭력 피해자의 치유, 회복과도 연결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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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이상 비밀이고 싶지 않다" 2023년 4월 9일 '낙태죄' 폐지 2주년 공동행동 "우리는 더 이상 비밀이고 싶지 않다 국가는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하라!"에 참여한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 ⓒ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 네트워크

덧붙이는 글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는 6월 15일까지 식약처에 보낼 다수인 민원을 모으고 있다. 진정서를 https://bit.ly/미프진진정서 에서 내려받아 서명한 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17길 14 엘림빌딩 3층)에 우편으로 보내면 된다.

*이 글을 쓴 유호정씨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입니다.
#낙태죄 #임신중지 #재생산권 #유산유도제 #건강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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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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