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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성폭행한 친부에게 "1억 3807만원 지급" 판결 나온 이유

'스포츠계 첫 미투' 김은희 재판 이후 달라진 아동 성폭력 손배 소멸시효... 'PTSD 진단', 기준점

등록 2023.06.05 04:42수정 2023.06.0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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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방송된 < SBS 스페셜>에서 김은희씨는 15년 만에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며 "제2의 김은희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재판을 결심했다고 고백했다. ⓒ SBS

 
[이전 기사] 나는 아동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2001년 7월부터 2002년 8월까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김은희씨는 테니스 코치에게 성폭행 당했다.
2016년 5월, 테니스 대회에서 우연히 가해자와 마주쳤고, 성폭력 피해 기억이 되살아났다.
2016년 6월, 김은희씨는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2016년 7월, 가해자를 형사 고소했다.
2018년 7월, 대법원까지 간 2년여의 소송이 끝났다.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가해자에게 징역 10년 형이 확정됐다.
2018년 6월 (항소심 판결 직후),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19년 11월, 가해자가 김은희씨에게 1억 원의 손해배상액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2021년 8월, 대법원은 1억 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스포츠계 첫 미투' 사건으로 알려진, 테니스 코치 김은희씨 재판 경과다. 성폭행을 당한 2001년, 김은희씨는 열 살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뒤에야 가해자를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 

형사 소송에 이은 민사 소송, 이 손해배상 소송에는 쟁점이 있었다. 소멸시효의 기산일(일정한 동안의 날수를 계산할 때 첫날로 잡는 날)을 언제로 볼지가 문제였다. 민사상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권에는 시효를 정해두고 있는데, 재판에서 양측 변호사는 이 시효가 지났는지 여부를 두고 다퉜다.

민법 제766조는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를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또는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김은희씨가 성폭행당하고 17년 후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에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것이 가해자 측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기각됐다. 항소심과 대법원 모두 김은희씨의 손을 들어줬다. '손해를 안 날'은 가해자에게 강간치상 유죄판결이 선고된 때를 기점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불법행위를 한 날'은 손해의 발생이 현실화 된, PTSD 진단받은 때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례적' 재판이 가져온 '이례적'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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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법원 전경. ⓒ 이주연

 
항소심(의정부지법 조규설 판사) 재판부는 말했다.

"성범죄 피해의 영향은 피해자의 나이, 환경, 피해 정도, 가해자와의 관계, 피해자의 개인적인 성향 등 구체적 상황에 따라 그 양상, 강도가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보통 외상 후 짧게는 1주에서 3개월 이내에 증상이 시작되지만 길게는 증상이 나타나기까지 30년이 걸리기도 하며, 진단기준 이하로 관해(寬解, 증상이 감소한 상태)되었던 증상이 재발하거나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

성범죄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뒤늦게 나타나거나, 성범죄 직후 일부 증상들이 발생하더라도 당시에는 장차 증상이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그것이 고착화되어 질환으로 진단될 수 있을 것인지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성범죄 당시나 일부 증상의 발생일을 일률적으로 손해가 현실화된 시점으로 보게 되면, 피해자는 당시에는 장래의 손해 발생 여부가 불확실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고, 장래 손해가 발생한 시점에서는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게 되는 부당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특히 피해자가 피해 당시 아동이었거나 가해자와 친족관계를 비롯한 피보호관계에 있었던 경우 등 특수한 사정이 있는 때
에는 그 인지적·심리적·관계적 특성에 비추어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위와 같은 경우 법원은 전문가로부터 성범죄로 인한 정신적 질환이 발현되었다는 진단을 받기 전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손해의 발생이 현실적인 것으로 되었다고 인정하는 데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


재판부가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손해배상 소멸시효를 폭넓게 인정한 결과다. 재판이 끝난 후, 김은희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가해자) 이런 잘못을 저질렀잖아요. 그걸 한 번이라도 인식시켜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작했고 저 스스로 확신이 있었어요. 10명이면 10명 다 안 된다고 했는데, 제가 확신이 있으니 할 수 있었어요. 도가니 사건, 신안군 초등교사 집단 성폭행 사건, 도봉구 성폭행 사건 등 여러 사건들의 조각을 모아서 준비했어요. 소송에서 꼭 이겨서 저와 같은 피해를 겪고 있는 사람들도 제 사건에서 힌트를 얻고, 용기와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그는 언론을 통해 "유사 사건의 피해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판례를 남기는 것"이 소송의 목적이었고, "재판부에 1억 원을 안 받아도 좋으니 소멸시효에 대한 판결을 제대로 해달라 호소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이후 진행된 아동 성폭력 손해배상 소송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김은희씨 재판은 이후 아동 성폭력 손해배상 소송에서 하나의 기준점이 됐다.

가해자에게 '1억 3807만 5553원' 손해배상액 지급하라 명한 재판부 

2021년 10월 광주고등법원(이창한 판사)에서 진행된 손배 소송. 2004년 열 살에 불과했던 피해자를 고모의 아들이 강제 추행했고, 이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었다.

재판부는 "성범죄 피해의 영향은 ~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위 판결문을 그대로 인용했다. 재판에서 피고(가해자) 측은 피해자가 성년이 된 2014년으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소송을 제기(2018년 5월 고소)하였기에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피해자가 강제추행 사실을 알린 2014년 8월에 '강제추행으로 인한 PTSD'라는 손해의 발생이 현실화된 것까지 알게 됐다고 보기 부족하다"라며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2018년 6월 PTSD를 진단 받은 때를 '손해의 발생이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고 판단할 시점이라고 보았다.

재판부는 피고(가해자)는 원고(피해자)에게 치료비와 위자료로 7138만 4390원을 지급하라고 명했다.

2021년 의정부지법(이우용 판사)에서 열린 손해배상 소송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동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는 친부였다. 해당 사건은 2001년 9월 이미 유죄판결을 받아 형이 확정됐다. 당시 피해자의 법정대리인이었던 어머니는 3000만 원을 받고 가해자와 합의했다. 합의서에는 '원고는 합의서 작성일 이후 지급받은 3000만 원 외 어떠한 명목으로도 피고에게 금전을 청구할 수 없다'는 내용이 적혔다.

그러나 피해자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합의시점으로부터 19년이 흐른 2020년 피해자는 성폭력으로 인한 PTSD 진단을 받았다. 피고(가해자) 측은 "원고가 주장하는 손해배상 청구권은 이 사건의 합의일(2001년) 또는 늦어도 원고가 성인이 된 날로부터 3년이 경과하여 시효로 소멸하였다"고 주장했다.

이 재판부 역시 "성범죄 피해의 영향은 ~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위 판결문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PTSD 등은) 사건 합의 당시 모친이 예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손해였다"라며 "사건 합의 당시 17세에 불과한 미성년자였던 원고 또는 원고를 대리한 모친이 이를 예상했다면 3000만 원으로 화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더불어 "위 3000만 원이 온전히 피해자인 원고에게 지급됐는지 여부도 불분명하다"고 짚었다.

의정부지법 역시 PTSD를 진단받은 시점을 기산일로 판단했고, "원고는 피고에 대해 후발손해를 원인으로 하는 위자료의 지급을 구할 수 있다"며 3000만 원의 위자료 지급을 명했다.

판결문을 직접 인용하진 않았어도 아동 성폭력 손해배상 소송에서 '불법행위를 한 날'을 손해가 현실화된 즉, PTSD 진단 받은 날로 인정한 재판은 손쉽게 찾을 수 있다.

2021년 대전지방법원(서봉조 판사)에서 진행된 손해배상 사건의 경우, 원고(피해자)에게 1억 3807만 5553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났다. 해당 사건 피고(가해자)는 친부였다. 피해자가 열 살이던 2008년 시작된 성폭행은 2011년까지 이어졌다. 2016년 형사소송이 진행됐고 2017년 1월 항소심에서 가해자에게 징역 13년형이 선고됐다.

피해자의 어머니가 2011년 성폭행 사실을 알게 됐기에, 가해자 측은 '법정대리인이 안 때부터 소멸시효가 진행돼 이 사건 소가 제기되기 전 원고의 손해배상채권은 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2016년 피해자가 PTSD 진단을 받아 그제야 '손해가 현실화됐다'고 보고 소멸시효가 완성돼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재판부는 위자료(1억 원)에 향후 치료비, PTSD로 원고가 노동능력을 상실한 점을 들어 총 1억 3807만 5553원을 지급하라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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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대전지법은 친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고가 원고에게 총 1억 3807만 5553원을 지급하라고 명했다. ⓒ 이주연

 
"진실이 빛 가운데 훤히 드러나길 바라요"
 

그리고, 재판부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사건이 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이모부로부터 강제추행과 준강간 피해를 겪었다는 지안(가명, 37)씨가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다(관련 기사 : 나는 아동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현재 수원지법 안산지원에 소장이 접수된 상태다. 

지안씨 변호를 맡고 있는 김나윤 변호사(법무법인 예율)는 "현재 피고 측은 답변서도 제출하지 않은 채 다른 가족들을 동원해 '소를 취하하라', '일가족의 진술서를 받아 지안씨를 괴롭게 하겠다'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하고 있다"라며 "불법행위가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지안씨가 이길 수 없는 소송이라고 자신하고 있는 상태"라고 전했다. 

그는 "지안씨는 피고의 진정한 사과를 원하는데, 피고는 법률적으로 빠져나갈 구멍만 찾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최근 아동 성폭력 손해배상 재판 결과에 따르면, 불법 행위 그 자체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불법 행위로 인해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침을 함께 고려해 판단하고 있는 추세"라며 "지안씨 역시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피해를 입었지만 2022년에 PTSD 진단을 받았기에 해당 진단서를 추가적으로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언제 마무리 될 지 모르는 손해배상 소송에 임하는 지안씨의 바람은, 김은희씨의 바람과도 맞닿아있었다. 지안씨는 말했다.

"진실이 빛 가운데 훤히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사회적으로는 가족 내 성폭력을 놀라워하고 가십으로 삼기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또 왜 계속해서 일어나는지, 어떻게 하면 피해자를 보호하고 2차 가해를 예방 할 수 있을지 모두가 함께 고민하게 되길 바라요. 법적으로는 제 사건이 좋은 선례가 되어 친족 성범죄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처벌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편, 여성가족부가 지난 3월 발표한 '2022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발생 추세와 동향 분석' 결과에 따르면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로 유죄판결이 확정된 가해자는 2671명에 달한다. 피해자는 3503명이다. 가해자를 기준으로 범죄 유형을 살펴보면 강제추행이 35.5%, 강간이 21.1%로 조사됐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가족 및 친척인 경우는 9.2%였다. 피해자의 25.6%는 13세 미만이었다.
#아동 성폭력 #소멸시효 #손해배상 #친족 성폭력 #2차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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