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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그날의 트라우마... 경계경보는 그냥 '소리'가 아니다

'현재진행형' 전쟁의 공포를 다시 체감하게 만든 오발령 소동...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등록 2023.06.01 15:12수정 2023.06.0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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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새벽에 울린 재난문자들 ⓒ 이희동


지난 5월 31일 새벽이었다. 휴대전화의 갑작스러운 긴급재난문자에 눈을 떴다. 그 전날 꽤 많이 술을 먹었음에도 번쩍 정신이 들만큼 예사롭지 않은 소리였는데, 확인해보니 서울시의 경계경보 발령으로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하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창밖에서도 확성기를 통해 누군가가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뭐지? 대피하라고? 뭔데? 대피는 어디로 하지? 당황한 마음에 휴대전화로 포털을 찾아보니 먹통이었다. 설마. 아무리 엄혹한 시대라지만 진짜 전쟁이 났으려고. 그리고 진짜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창밖의 풍경이 너무 평화롭지 않은가.

다시 열심히 인터넷을 돌아다녀 보니 내용인즉 북한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고, 이에 대해 서울시가 경계경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북한이 일방적이지만 어쨌든 인공위성을 쏘겠다고 예고를 했고, 추진체가 떨어지는 지점까지 알렸다는 것이다. 서해상으로 300km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

그런데 서울시는 아침부터 왜 이렇게 호들갑이지? 하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또 한 번의 재난문자가 울렸다. 행정안정부가 보낸 것이었는데, 서울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울리는 재난문자. 이번에는 다시 서울시였다. 북한 미사일 발사로 해 위급안내문자를 보냈는데, 경계경보가 해제되었으니 시민 여러분께서는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절대 오발령이 아니라 적절한 조치였으니, 억울하다는 속뜻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이후 서울시, 행정안전부, 수방사, 합참 등은 새벽부터 울린 경계경보와 관련해서 책임을 전가하느라고 하루 종일 바빴다. 가끔 있었던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와 관련해, 왜 이번엔 경계경보까지 울려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는지 누군가는 설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책임 있게 나서지 않았다.

그 와중에 대통령실은 안보상황 점검회의를 소집했는데, 역시나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무책임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행정안전부가 서울시의 오발령를 지적한 바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번 상황이 대통령이 참석할 만큼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실제로 대통령실은 상황별 대응 방안이 준비돼 있다는 입장이라고도 밝혔다.


그럼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서울시만 경계경보를 울렸을까? 정부와 서울시가 상황을 공유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같은 상황을 보고도 달리 판단한 채 서울시가 독단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건가? 요즘 거리의 현수막을 보면 튼튼한 안보를 강조하던데, 툭하면 경계경보 울리는 것이 안보를 위한 걸까?

이런저런 상념들은 나를 40년 전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40년 전, 그날의 기억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1983년의 어느 날. 당시 6살이었던 난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비상 사이렌 소리가 울렸고, 비행기 한 대가 우리 아파트 바로 위를 날아갔다.

김포공항 근처에 살았는지라 비행기 밑부분을 올려다보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그날 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 건 그 비행기가 전투기였기 때문이다. 다른 비행기와 달리 새까맣고 날렵한 모습으로 날개 밑에 폭탄을 매단 채 아주 빠른 속도로 굉음을 내면서 내 머리 바로 위로 날아갔던 전투기.

그렇게 넋을 놓고 전투기 날아간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파트 창문으로 어머니가 아주 긴박하게 집으로 빨리 돌아오라고 나를 불러댔다. 경보가 울려대고 전쟁이 난 것일지도 모르는데 뭐하냐는 질책과 함께였다.

집에 들어오자 어머니는 우리 같은 군경의 가족은 잡히면 죽음이라고, 전쟁이 나면 신분을 알 수 있는 주민등록증 같은 걸 태우거나 먹으라고 '진지하게' 가르쳐주셨다(참고로 당시 주민등록증은 카드가 아니라 종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아버지가 경찰임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도 덧붙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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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의 모습을 전한 1983년 2월 26일 동아일보 보도. ⓒ 동아일보 갈무리

 
그것은 전쟁을 겪었던 세대가 자식한테 할 수 있는 최선의 교육이었다. 부모님 세대에게 전쟁은 오래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었으며, 언제 어떻게 벌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전쟁은 나의 바로 옆에 있었으며, 나의 삶을 위협하고 있었다.

두려웠다. 다행히 그 소동은 1983년 2월 25일 이웅평이 미그기를 타고 내려와서 벌어진 것이란 걸 알게 되었지만, 난 그 뒤로 내가 아직 전쟁 중인 국가에 살고 있다는 걸 다시금 생생하게 깨달았고, 전쟁의 끔찍함을 절절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때의 기억이 나를 20년 뒤 북한학과로 인도한 건지도 모르겠다.

'오발령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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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운 서울의 아침 북한이 31일 오전 6시29분께 평안북도 동창리 일대에서 남쪽 방향으로 북한이 주장하는 우주발사체를 발사했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밝혔다. 이날 오전 서울역 대합실 TV에 서울 전역에 경계 경보가 내렸다는 뉴스속보가 나오고 있다. 이후 행안부는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이라고 정정했다. ⓒ 연합뉴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23년.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여전히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 조금 풀어질 것 같았던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되어 이제 말도 붙이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북한의 핵위협은 더욱 커진 상황이다.

그런데 갑자기 울린 경계경보. 정부는 오발령일 뿐이라며, 자신들의 책임 아니라고 이야기하느라 바쁜 모습이지만, 어쨌든 국가 안보를 맡고 있는 무한 책임의 주체로서 서울시는, 정부는, 대통령은 이 상황에 대해서 정확한 설명을 하고 향후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분단구조 하에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 경계경보 사이렌 소리는 그냥 소리가 아니다. 혹자에게는 잠을 깨우는 소음일 수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스위치이며, 악몽을 떠올리는 시그널일 수 있다. 그냥 실수일 뿐이라고, 행정적 착오라고 사과하는 차원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현실로 인지되기 시작한 시대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1년 넘게 전쟁 중에 있고 중국과 대만, 남한과 북한의 긴장은 고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잘못된 경계경보라니. 정부는 제발 튼튼한 안보를 말로만 챙기지 않길 바란다.
#경계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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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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