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법 폐기에 간호협회 '참담'... 눈물 흘린 간호사도대한간호협회 회원들이 지난 5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에서 간호법 제정안 재의의 건 표결 결과를 지켜본 뒤 참담한 표정으로 퇴장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두 번째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간호법 제정안은 이날 다시 국회 본회의 표결에 부쳐졌으나 부결돼 결국 폐기됐다. 간호법 제정안 재의의 건에 대한 무기명 투표 결과는 재석 의원 289명 중 찬성 178명, 반대 107명, 무효 4명으로 부결이었다.
남소연
"간호사들이 의사에게 항명한 거잖아요."
한 아이가 이른바 간호법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짐짓 두둔하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법안은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발의되기 마련이라며, 이번 간호법도 의사들이 독식하는 이익을 나누자는 요구일 거라고 단정했다.
'항명'이라는 두 글자가 귀에 꽂혔다. 그는 의사와 간호사, 간호조무사 등을 직역의 차이라기보다 '위계질서'로 이해했다. 의사는 간호사 위에 군림하고, 간호사는 간호조무사에게 지시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법안의 취지나 구체적인 내용은 관심 밖이었다.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지는 의료인에 대한 아이들의 인식은 참으로 납작하다. 의사는 '치료'하고, 간호사는 '보조'하며, 간호조무사는 '뒤치다꺼리'한다는 것. 지금껏 기성세대로부터 배운 대로, 병원엘 다니며 보고 느낀 대로 이해한 것이니, 딱히 그들을 나무랄 일도 아니다.
의사와 간호사를 마치 기업체의 '사장'과 '직원'처럼 이해하는 상황에서 간호법의 제정은 백년하청일 듯싶다. 아이들의 입에서 "아니꼬우면 의대를 가지"라는 비난이 스스럼없이 튀어나온다. 서열화한 학벌 의식이 그대로 투영된 셈이다.
의사에 맞설 수 있는 직업은 없다?
요즘 아이들은 학벌에 의해 신분이 결정된다는 것에 수긍한다. 고등학교까지 서열화한 데다 가정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대학의 간판이 순서대로 정해지는 현실을 두고 선선히 '현대판 골품제'라고도 말한다. 아이들은 '헬조선(지옥 같은 대한민국의 현실)'과 '이생망(이번 생애는 망했다)'이라는 섬뜩한 말에 더는 충격조차 받지 않는다.
공고한 신분제 사회에서 '순응'은 불가피한 생존 전략이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저항하는 건 '패배자의 지질한 몸부림' 정도로 격하된다. 같은 패배자의 입에서조차 어김없이 전가의 보도처럼 "아니꼬우면…"이라는 말이 뒤따른다. 신분 상승의 통로인 시험은 그렇게 우상화된다.
졸지에 의사와 간호사는 시험을 통해 일렬로 줄 세워진 경쟁의 장에서 승자와 패자로 규정된다. 아이들의 인식 속엔 이겼으니 군림하고 졌으니 무릎 꿇라는 경쟁의 규칙이 작동한다. 둘의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환자의 건강과 생명이 우선이라는 당위도 곁가지로 치부된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재의결 부결로 간호법은 끝내 폐기됐고, 의사 단체의 파업 계획도 철회됐다. 몇 해 전 전공의까지 합세한 의사 단체의 집단 파업 때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당시 의사 단체의 요구는 사실상 몽니에 가까웠지만, 정부가 대폭 수용하면서 갈등이 마무리됐다.
정부조차 무릎 꿇게 만든 의사 단체의 '승리'는 아이들에게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용인하는 신호로 작동했다. 우리 사회에서 의사에 맞설 수 있는 직업은 없다는 사실을 체득한 것이다. 취지야 어떻든 간호법이 의사에 맞서는 모습으로 비치면서 아이들은 이미 실패를 예견했다.
지금 전국의 모든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전개되는 '의치한약에 다걸기 현상'은 이로 인한 결과다. '대학 입시가 평생을 좌우한다'는 생각은 이미 종교가 됐다. 최상위권 아이들의 진로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의치한약'이다. 흥미도, 특기도, 적성도, 성적 앞에 죄다 무시된다.
'다걸기'라는 말마따나, 공부를 인생을 건 도박처럼 여긴다.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어느 자사고에서는 입학식 때부터 대놓고 "우리 학교의 진정한 졸업식은 '의치한약' 합격증을 받을 때"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의치한약' 진학을 위해서 재수, 삼수도 불사하자는 뜻이다.
알다시피, 지금 의치대 합격생 중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입학한 경우는 고작 열에 한 명뿐이다. 서울과 지방대 가릴 것 없이 재수는 기본이고, 삼수, 사수로 합격한 사례도 드물지 않다. '일확천금을 위해 목숨 걸고 신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의 심정'이었다고 눙치는 아이도 봤다.
그렇게 '의치한약'에 합격한 아이들은 전문직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보장받는다. 그것도 평생 유지되는 특권이다. 정년퇴직도 없고, 자격을 박탈당할 위험도 거의 없다.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된 이른바 계약학과에 합격하고도 재수를 고민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최근 학교마다 최상위권 아이들의 자퇴가 늘어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어떻게든 내신 성적 1등급을 얻기 위해서 학교를 옮겨 다니고, 내신과 비교과 활동에 신경 쓰기보다 오로지 수능을 대비하기 위해 학교를 미련 없이 떠난다. '의치한약 다걸기'에 공교육이 붕괴 직전이다.
대학에서도 '의치한약 다걸기'는 계속된다. 대한민국 최고 학부라는 서울대 이공계열의 별칭은 '의치대 사관학교'다. 합격증을 받는 순간 재수가 시작되고 대학의 강의실은 텅 빈다. 진로 담당 교사조차 노벨상을 탈 게 아니라면 과학자보다 '돌팔이'라도 의사가 백배 낫다고 말한다.
인문계열의 변화도 눈에 띈다. 이공계열 아이들의 최종 목적지가 '의치한약'이라면, 인문계열의 경우는 로스쿨이다. 전공을 불문하고 입학과 동시에 로스쿨 대비반이 꾸려지고, 대학 주변에 사교육도 성업 중이다. 로스쿨 합격률은 신입생 유치를 위한 대표적인 홍보 수단으로 활용된다.
'의치한약'을 향한 경쟁이 고등학교 때부터 졸업 후까지 이어진다면, 로스쿨은 대학에 가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나마 나은 편이다. 요즘엔 열 살도 안 된 초등학생을 상대로 의치대 대비반이 생겨나는 현실이다. 1등 직업은 의사이고, 법조인이 2등이라는 그들의 말이 당혹스럽다.
특권을 줄이지 않으면, 다 소용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