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8 04:44최종 업데이트 23.06.08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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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동안 행복했습니까?"

월요일이었으니, 늘 그러하듯 의례적으로 물었을 뿐이다. 학생들의 답 역시 의례적일 것이 뻔했다. 지난 17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니오"라는 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왜 그토록 행복했냐고 물으면, 사실 별 이유가 없다. 가족과 시간을 보냈거나 늦잠을 잤거나 개 혹은 고양이와 많은 시간을 놀아줄 수 있었거나, 아무리 봐도 별 이유 없는 행복이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학생 한 명의 반응이 유별났다. 책상을 두드리고 발을 동동 구르고 '매우'와 '너무'를 반복해가며 진심으로 행복했다고 답했다. 어라? 나는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호세(학생 이름)! 왜 그렇게 행복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지난 주말에 퇴직했어요."


헐~. 순간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몰라 나의 반응이 한 박자 늦어지는 사이 이번엔 호세를 둘러 싼 동료들로부터 축하가 이어졌다. 호세의 아버지가 퇴직하신 덕분에 다소 우울한 월요일 강의실 분위기가 금요일처럼 살아났다. 그 와중에 내 입에서는 "호세 아버지, 퇴직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가 튀어나올 뻔했다.
 

멕시코 연금은 1997년 7월 1일 개정됐다. 연금법 개정 이전 가입자들의 퇴직 이후 수령 연금은 근무 기간 자신의 마지막 급여와 큰 차이 없는 반면, 이후 가입자들은 자신의 마지막 급여의 30% 정도를 수령하게 되는 차이를 보인다. 또한 개정 이전 가입자들이 퇴직 이후 연금을 수령하기 위해 최소 500주(약 10년)의 연금 납입 기간을 필요로 했던 반면, 이후 가입자들은 최소 1250주를 납입해야 하는 조건이다. 퇴직자 상당 수가 1250주를 채우지 못해 연금 수령으로부터 소외되는 상황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자, 현 정부는 2021년 1997년에 개정된 연금법 일부를 조정하였다. 연금 수령을 위한 근무 주 수가 최소 1250 주에서 750주로 일시 하향 조정되었고 2031년까지 점차 증가하여 1000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덕분에 기존 1250주를 채우지 못해 연금 수령 대상자가 되지 못했던 퇴직자들 상당 수가 적은 액수이지만 연금 수령 대상자로 전환될 수 있었다. ⓒ 멕시코정부

 
한국의 퇴직과 멕시코의 퇴직

그간 살아오면서 이곳 멕시코가 한국과 '다르다'고 느낀 점 중 하나가 퇴직에 임하는 마음이다. 한국에서 봐왔던 퇴직은 뭔가 우울하고 막막하고 씁쓸한 느낌인데 이곳의 퇴직은 우중충한 월요일의 기분을 금세 금요일 오후 정도로 전환시켜버릴 수 있을 만큼의 막강한 해피파워를 갖는다.

한국에서의 퇴직이 소진, 박탈, 상실 정도의 의미라면 멕시코의 퇴직은 곧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한국에서의 퇴직이 싫음에도 맞이해야 하는 일이라면 멕시코에서의 퇴직은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 누리는 달콤함이다. 퇴직은 드디어 일을 하지 않고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국에서의 퇴직은 하고 싶은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음과 그에 따른 급여의 중단 혹은 감소에 중점이 맞춰진다. 반면 이곳 멕시코에서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해방감과 연금 수급 개시에 방점이 찍힌다. 직종 별로 퇴직 가능 연령이 다르지만 빠를수록 좋다. 모든 노동자들이 퇴직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는, 퇴직이 권리로 인식됨과 동시에 여전히 연금 시스템이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퇴직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연금법이 개정된 1997년 7월 이전 직장을 통해 연금 납부를 개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퇴직 전 마지막 5년간 받았던 기본 급여 평균 정도에 달하는 연금을 수령한다. 매년 물가상승률이 반영되고 12월에는 연말 보너스도 더해진다. 최초 납입 시점 당시 정규직이었든 비정규직이었든 상관없다. 아르바이트생이라도 1997년 7월 이전 직장에서 단 한 번이라도, 그리고 아무리 작은 소액이라도 급여를 받고 이를 통해 사회보장 번호가 발급되었다면 개정 이전 연금법 적용 대상이 된다.

호세네 가족이 아버지의 퇴직을 기뻐하며 지난 주말 이틀 간 성대한 파티를 벌인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호세의 아버지는 시내에 있는 작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을 했고 60세가 되어 퇴직할 수 있었다. 호세 아버지는 앞으로 일을 하지 않고도 자신이 최종 5년 동안 받았던 평균 기본급 수준을 연금으로 받게 될 것이다. 성대하게 축하할 만한 일이다.

글쎄, 대한민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일을 계속 한다면 기본급 이외에 수당도 받을 수 있으니 굳이 퇴직을 꿈 꿀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기도 할 텐데, 멕시코 사람들의 입장은 다르다. 조금 덜 받더라도 하루 모두를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퇴직 이후의 삶을 선호한다.

사실 1997년 연금법 개정으로 이후 가입자들은 이전 가입자들에 비해 한참 불리한 수준으로 연금을 수령한다. 몇 년 만 지나면 퇴직자 대부분은 1997년 이후 법 적용을 받게 되고 이 때 어떤 사회적 변화가 발생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퇴직이 기대되고 즐거운 일이다.
 

멕시코의 경우 1997년 7월 1일을 기해 기존 1973년 연금법이 개정되었는데 이전과 이후 연금 가입자들 사이에 퇴직 이후 연금 수급액 차이가 너무 크고, 최소 근무 년 수가 대폭 증가하면서 연금 수령 대상에서 소외되는 퇴직자들이 속출했다. 정부는 2020년부터 기존 연금법 일부 조정을 통해 퇴직 이후 연금 수급자를 늘리고 수급액 또한 점진적으로 향상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1997년 연금법이 개정된 이후 연금 납입 기여분은 고용주 5.15%, 노동자 1.125%, 정부 6.225%로 각 노동자 기본급의 총 6.5%였으나 조정 이후 2030년까지 점진적으로 고용주 기여분이 13.875%까지 증가하고 이에 노동자 기여분 1.125%가 더해져 각 노동자 기본급의 총 15%가 연금으로 적립될 예정이다. ⓒ 멕시코정부

 

퇴직을 꿈꾸지 아니할 이유가 없다

멕시코에서 일부 직종은 50대에도 퇴직이 가능하다. 그야말로 꿈의 직종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교사를 포함한 교육기관 종사자들이다. 퇴직하기 위해 필요한 근속 연수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20년 혹은 25년만 일을 하면 나이와 상관없이 퇴직이 가능했다. 이후 퇴직의 조건이 점점 까다로워져 2023년 현재 남녀 구분 없이 28년을 근속함과 동시에 여성의 경우 나이 53세, 그리고 남성의 경우 55세에 이르러야 퇴직이 가능하다.

50대 초반에 퇴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멕시코에서는 분명히 감사한 일이다), 다니던 직장에서 별도의 연금을 운용하고 있다면 금상첨화다. 국민연금에 더해 직장연금을 받는 경우인데, 멕시코의 경우 각 정부 기관뿐 아니라 대학교를 포함한 교육기관 그리고 비교적 인기 있는 직장으로 여겨지는 전기국이나 석유국, 그리고 전화국을 포함한 많은 직종이 직장연금을 별도로 운용한다. 퇴직한 선배 동료들에 따르면 퇴직 후 받게 되는 국민연금과 직장연금을 합하면 퇴직 직전 받았던 기본 급여의 190%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니 퇴직을 꿈꾸지 아니할 이유가 없다.

물론, 멕시코에서도 가끔 퇴직의 달콤한 권리를 내려놓은 채 퇴직 가능 시점을 훌쩍 넘겨 일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이 또한 한국과 다른 점인데 한국의 경우 퇴직 연령에 이르면 예외 없이 퇴직을 해야 하지만 멕시코는 공공기관에서 일 하는 사람도 퇴직을 유예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잠시 미루는 것이니 오히려 국가와 기관에서 고마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퇴직을 할 수 있는 연령에 이르렀지만 각 직종이 요구하는 근속 연수를 완전히 채우지 못해 퇴직이 유예되는 경우도 있다.
 

멕시코의 경우 1997년 연금법 개정 후 각 노동자들의 연금은 국가 연금청 관리 하에 개인 투자기관들이 전담하여 운용한다. 2023년 현재 총 10개의 투자 기관이 있는데 투자 기관 선택은 개인의 결정이다. 국가 연금청은 투자 기관들로 하여금 매 분기마다 수익율 발표를 강제한다. 2023년 4월 멕시코 국가 연금청에 의해 발표된 각 투자기관 수익율은 6.21%부터 4.51%까지 다양하다. 각 개인은 매 분기마다 발표되는 각 투자기관의 수익 실적을 보고 판단하여 투자기관을 바꿀 수 있다. ⓒ 멕시코 국가 연금청

 

멕시코 역시 국민연금뿐 아니라 각 직장연금이 새로 진입하는 사람들에게 점점 박해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근속 연수의 증가인데 멕시코 사람들에게는 불만이다. 선배들은 25년만 일하면 퇴직이 가능했는데 자신들은 32년 혹은 35년을 일해야 퇴직이 가능하니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퇴직 이후 연금 수령 개시 시점이 점차 늦춰져 불만이 야기되는 한국과 또 다른 점이다.

한국과 멕시코 두 나라 간 퇴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토록 상이하기에 쌓여가는 근무 기간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다른 점이 있다. 퇴직이라는 희망의 고지를 향해가는 긴 여정에서 적어도 5년 혹은 10년에 한 번씩은 챙겨 축하하는 것이 이곳 멕시코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근속에 대한 기념과 축하가 없진 않지만 아무래도 이곳에선 훨씬 화끈하다.

수표 석 장... 화끈한 근속축하 파티

마침 나는 올해 근속 15주년을 맞이했다. 퇴직을 위해 32년을 일해야 하는 나로서는 아직 긴 여정의 반환점을 돌지도 못했고 이미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직장 선배들에 비해 근무 년 수나 연금수령에서 불리한 입장이다. 나의 퇴직은 지금의 여느 퇴직과 같이 장밋빛이 아닐 것이다. 하여, 나는 근속이나 퇴직을 호들갑스럽게 바라고 자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나 주변에서 나의 근속 15주년을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보내게 놔두지 않았다.

마침 올해는 우리 학과 비서가 근속 15주년, 청소원이 근속 2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이미 한 달여 전부터 올해 근속 축하 행사 공식 초청장이 전달되었다.

비서 아주머니는 이미 빚을 내 행사 당일 입고 갈 드레스를 맞췄노라 했고 청소원 아저씨는 당일 집안 잔치를 위해 술과 고기를 차곡차곡 사 모으고 있노라 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 나에게는 학과 동료들의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 5월 15일 근속 15주년, 20주년, 25주년에 해당하는 자들에 대해 메달과 근속 증서, 그리고 축하금이 수여되었다. 근속 포상 대상자들은 한 달 전 행사 초청장을 받고 행사 당일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가장 중요한 준비는 역시나 행사 당일 의상. 통상 30여 년 가까운 근무 기간 동안 가장 화려한 옷을 입게 되는 날이기도 하다. 포상은 노무직, 행정직, 교수직 직종 구분 없이 근속 년 수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근속 15주년에는 동메달, 20주년에는 은메달, 그리고 25주년에는 금메달이 수여된다. 포상금은 총 석 장의 수표로 구성되는데 총장실에서 한 장, 주 정부에서 한 장, 그리고 노조에서 한 장이 더해진다. 포상금은 근속 년 수에 따라 다른데, 올해 15주년 해당자들에게는 한화 약 150만원, 20주년 해당자들에게는 약 200만원, 그리고 25주년 해당자들에게는 약 250만원 상당의 포상금이 지급되었다. ⓒ 림수진

 
학교 공식 휴일로 지정된 당일, 학교 대형극장 진입 순간부터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어디서 구한 옷들인지 여자들이라면 어마무시하게 화려한 파티복을 입었고 남자들도 대부분 풀정장을 하고 있었다. 화학과 교수 한 명은 날 세워 다린 실험 가운을 입고 왔고 정원사 한 명은 밀짚모자까지 갖춰 쓴 복장을 하고 왔다.

근속 15주년, 20주년, 25주년 순서로 각각을 단상 위로 호명하여 메달과 근속 증서를 수여했다. 물론, 메달이나 증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근속 증서 앞면에 가지런히 붙은 수표 석 장. 한 장은 총장실에서, 또 다른 한 장은 노조에서 그리고 또 다른 한 장은 주 정부에서 주는 것이다. 근속 표창에 가는 사람들이나 행사장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날 근속 증서 안에 들어 있을 석 장 수표의 액수가 무척 궁금했을 것이다.

해마다 학교와 주 정부 재무 사정에 따라 포상금 액수가 달라지기에 매년 근속 표창 행사 당일에 가까워질수록 수표 석 장의 액수가 초미의 관심사다. 올해는 15년 근속자에게 약 150만원, 20년 근속자에게 약 200만원, 그리고 25년 근속자에게 약 250만원 상당의 수표 석 장이 수여되었다. 당일 그 곳에 모인 누군가에겐 한 달 월급 혹 다른 누군가에겐 대여섯 달 월급과 맞먹는 돈일 것이다. 화끈하지 않을 수 없는 돈이다.
 

뭐니뭐니 해도 근속 축하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근속 증서 폴더 안에 고이 자리한 수표 석 장. 총장실과 노조와 주 정부가 각 1장씩 갹출하여 총 3장으로 이루어지는데 포상 액수는 매년 학교와 주 정부 예산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포상금은 근속 년 수에 따라 다른데, 올해 15주년 해당자들에게는 한화 약 150만원, 20주년 해당자들에게는 약 200만원, 그리고 25주년 해당자들에게는 약 250만원 상당의 포상금이 지급되었다. ⓒ 림수진

 

행사 당일까지도 심드렁했던 나의 마음이 수표 석 장 앞에서 화르륵 살아났다. 행사가 끝나고 우리 학과 비서 아주머니와 청소원 아저씨를 만나 우리 5년 후에도 꼭 살아서 수표를 받자고 다짐했다.

15년이나 일 했음에 대한 축하와 앞으로 17년만 일하면 퇴직할 수 있음에 대한 축하가 쏟아졌다. 그 모든 축하의 말 앞에 '신이 원하신다면'이란 말이 빠지지 않았다.

그들의 염원대로 '신이 원하신다면', 이곳 멕시코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앞으로 17년 후에, 32년이란 근속 연수를 채우고 만 68세의 나이에 퇴직할 것이다. 20대 초반 일을 시작하고 25년의 근속 연수를 가볍게 채우고 50대 초반에 가뿐히 퇴직할 수 있었던 나의 선배 동료들을 엄청나게 부러워하면서, 32년이나 채워야 하는 나의 신세를 종종 한탄하면서, 그리고 매 5년 마다 근속 표창과 함께 석 장의 수표를 챙겨가면서, 신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매 학기 말 우리학교 관광학과와 조리학과에서는 실습 차원에서 전체 교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그 자리에서 교수들은 서로 다른 학과 교수들과 만나 여러 의견들을 나눈다. 지난 금요일(6월 2일) 전체 교수들이 모여 아침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총장은 교수들에게 '혹시 퇴직이 가깝거나 임박하였다면 심사숙고하여 퇴직의 의사를 잠시 접고 단 2년 혹은 3년이라도 학교를 위해서 더 일해달라'는 내용의 퇴직 유예를 간곡히 부탁했다. 이 또한 한국과 다른 점이다. ⓒ 림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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