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5 11:11최종 업데이트 23.06.0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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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어공주>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야말로 콘텐츠의 왕국이라 불리는 회사이기에 가능한 일일까. 2010년대에 들어 디즈니는 자사의 고전 애니메이션 영화들의 본격적인 실사화를 추진했다. 성공을 향한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늘 이 작업이 양날의 칼 혹은 독이 든 성배라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는 공유하는 문법이 많지만 명백한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가령 애니메이션에서 살아 움직이는 주전자나 말을 하는 동물과 같은 비(非)인간 캐릭터의 존재는 무척 자연스럽다. 이들을 극도로 의인화하여 사람처럼 표정을 짓고 감정을 표현하게 만드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실사 영화에서 이들을 묘사할 때 적정한 선을 찾지 못하면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 섞인 것 같은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혹은 인간과 너무나 유사하지만 명백히 인간이 아닌 대상을 볼 때 느끼는 '불쾌한 골짜기'에 빠지거나. 원작의 인기만 믿고 제작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실사화 작품들이 실패했던 이유다.

하지만 누적된 실패는 교훈을 남기기도 한다. 특히나 '실사화의 무덤'으로 불렸던 게임 원작 영화들이 어느 순간 준수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전문가들은 원작 애니메이션 혹은 게임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이를 실사 영화의 문법에 맞게 각색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물론 그럼에도 작가와 연출자들의 역량은 천차만별이라 망한 영화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성공한 영화'를 만들 최소한의 발판을 찾은 것에 불과하다. 넘어야 할 더 큰 언덕이 있다. 바로 원작의 아성이다. 누군가는 그것 때문에 굳이 원작이 있는 영화를 만든 게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맞다. 하지만 원작이 보유한 인기가 실사화 작품으로 바로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다. 오히려 사람들의 기대를 밑도는 작품이 나오면 원작이 없는 영화보다도 더욱 혹독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한다. 상업적 실패는 말할 필요도 없다.

영화 <인어공주>는 정말로 원작을 파괴했나

때문에 인기 원작을 기반으로 한 실사 영화가 제작될 때, 작품이 공개되기도 전부터 논쟁이 벌어지는 건 익숙한 과정이다. 때로는 그 소란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깊은 애정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공감할 수 없는 논쟁도 분명히 있다. 최근 개봉한 <인어공주> 실사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설화에 휩싸였다. 주된 이유는 캐스팅이다. 영화 <인어공주>에서 주인공인 에리얼의 역할을 맡을 배우로 핼리 베일리가 발탁되었다. 배우보다는 가수의 경력이 더 긴, 영화계에선 신인에 가까운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정한 건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반발한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캐스팅에 반발했던 이들은 주로 핼리 베일리가 흑인이라는 점에 불만을 표했다.
 

캐스팅에 반발했던 이들은 주로 핼리 베일리가 흑인이라는 점에 불만을 표했다.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들의 주된 주장은 '우리가 아는 에리얼은 붉은 머리의 백인인데 어째서 흑인을 캐스팅 했느냐'이다. '원작 파괴'라는 반응도 있었고 비교적 온건하게 코멘트를 한 이들은 '원작을 무리하게 바꿔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영화 <인어공주>가 안데르센의 동화보다는 이를 재해석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삼고 있으니 그 작품을 '원작'이라고 부르는 건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원작의 파괴 혹은 무리한 변형'이라는 주장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 말이 타당하려면 에리얼이 백인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야기의 중심이자 핵심 메시지를 구성하기에 절대 손을 댈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가령 에리얼이 백인으로서 인종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뿌리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그것이 <인어공주> 주제 중 하나라면 디즈니의 캐스팅은 원작 파괴가 맞다.

인어공주에게 중요한 건 피부색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1989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버전 인어공주에 그런 내용은 없다(인어들의 세계에 인종 개념이 있는지조차도 나는 잘 모르겠다). 심지어 에리얼의 외모조차 애니메이션에서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극중 에리얼이 구조한 왕자 에릭은 에리얼의 모습을 보지 못하지만 그녀가 부른 노래 소리를 기억하고 거기에 매료된다.

우르슬라가 에리얼을 잠시 인간으로 만들어주며 대가로 가져가는 것은 다름 아닌 에리얼의 목소리다. 마지막으로 우르슬라가 인간으로 변신하여 에리얼과 에릭의 사랑을 방해할 때 사용하는 것도 대가로 받은 에리얼의 목소리이다. 사실 이는 디즈니가 핼리 베일리를 캐스팅한 주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들은 핼리 베일리의 노래를 들었고 베일리가 에리얼을 맡을 최적의 인물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원작 애니메이션의 성우인 조디 벤슨도 '캐릭터의 정신과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캐스팅을 옹호했다. 인종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사례를 넓혀서 살피자면 캐스팅 과정에서 주인공의 인종이 바뀌는 일은 꽤나 자주 발생한다.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영화 <매트릭스>의 캐스팅 과정을 살펴보자. 주인공인 네오 역은 원래 윌 스미스에게 먼저 제안이 갔다. 하지만 윌 스미스는 당시 출연이 예정된 영화가 이미 있었고 스케줄의 문제로 결국 이 역할은 키아누 리브스가 맡게 되었다. 그렇다면 윌 스미스가 맡을 뻔한 네오와 키아누 리브스의 네오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가 되는 건가? 배우의 연기 방식에 따라 표현된 결과물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서사적인 차원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매트릭스에서 네오의 인종은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인어공주> 스틸 이미지.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블랙 워싱'? 이 표현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 

또한 각종 콘텐츠들이 국경을 넘어서 리메이크가 되는 일도 흔하다. 한국만 해도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아가씨>와 같은 작품들이 서구권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고 아예 배경이나 인물들의 인종과 국적을 모조리 바꾸기도 했다. 반대로 <시월애>나 <장화, 홍련> 같은 작품들이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되었고 마틴 스코세이지는 <무간도>를 다시 만든 <디파티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들 작품 역시도 배경과 인물의 인종을 아예 바꾸었다. 하지만 단지 이를 이유로 '원작 훼손'이라는 말을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작품들의 핵심에는 특정한 시대나 공간이 아니라 사랑과 갈등, 배신과 후회와 같이 매우 보편적인 사건과 감정들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즉 어디서 누가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인어공주>를 놓고 '블랙 워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매우 안일한 용어다. 이 표현의 원본이라 할 '화이트 워싱'은 명백히 다른 인종인 인물을 분장만 대충한 백인이 연기해버리거나 혹은 애초에 다른 인종으로 설정된 캐릭터를 아예 백인으로 바꿔버리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게 특히나 문제가 되는 건 미국 사회만큼이나 백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할리우드 영화계가 단순히 그들의 편협한 인종적 선호에 따라 비백인 영화인들의 자리를 빼앗아 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아시아계 배우들은 캐스팅 될 기회조차 부족하다는 호소를 할 판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북미 영화계가 흑인 영화인 중심으로 재편되어 개봉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죄다 흑인 배우 일색이고 이 때문에 백인 배우들이 백인인 캐릭터에 조차 캐스팅이 안 되는 일이 발생했나? '워싱'은 불균등한 권력이 전제된 개념인데 지금 흑인 영화인들에게 그런 게 있긴 한가?
 

영화 <인어공주> 관련 이미지.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인어공주>는 사랑, 우정, 용기와 같이 보편적인 가치를 다루는 뮤지컬 드라마이다. 에리얼을 잘 연기하여 이 가치를 탁월하게 전달할 수 있다면 인종에 상관없이 그 사람이 주연으로서 최고의 적임자다. 핼리 베일리는 스튜디오에 이를 입증했고 에리얼이 되는 성취를 이루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캐스팅이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이 인종 때문이라면 다시 한 번 떠올려보길 바란다. 우리가 기억하는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서 중요했던 게 에리얼의 피부색이었는지. 에리얼이 인종에 그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가치가 담겨있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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