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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십 넘어 계란 삶는 법 배웁니다... 잘 살아보려고요"

[노인의 집- 장성 누리타운①] 문턱 없애고 곳곳에 안전바... 월 5만원의 공공실버주택

등록 2023.06.09 13:27수정 2023.06.1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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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은 2025년이면 65세 이상 비중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합니다.  65세 이상이 1000만 명을 넘어섭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곳에서 살아가야 할까요. 고령인구가 30%를 넘은 전남 장성의 누리타운을 통해 지자체가 주도한 '어르신 돌봄'의 실험과 현실을 2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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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어르신들이 5월 30일 오전 전남 누리타운 내 생명숲 100세 힐링센터 교육실에서 열린 스마일 교실에 참여하고 있다. 이날 어르신들은 웃음 체조 치료와 더불어 감정 오일 만들기, 모기 퇴치제 등을 만드는 시간을 가졌다. ⓒ 김혜리

 
"원옥아, 사랑한다. 고맙다. 원옥아, 그동안 잘 살아줘서 고맙다. 내가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살게 나 좀 잘 부탁한다."

평균 연령 80대, 홀로 사는 노인 14명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을 토닥인다. 이내 강사를 따라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더니 어깨를 툭툭 털며 "웃자, 웃자, 웃자"를 외치며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웃는다. 

두 시간여 수업을 이끈 김미경 웃음강사는 "할머니보다 할아버지들은 어떻게 감정표현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술·담배가 아니어도 맺힌 마음을 푸는 방식을 함께 찾아가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30일 전남 장성군 누리타운에서 만난 평균 연령 80대 어르신들의 일과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빼곡했다. 건강을 관리하려 애썼고,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삶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웰다잉(well dying)을 배웠다. 

이곳에 거주한 이들은 "맞춤옷 같은 누리타운에서 친구와 수업도 듣고 건강도 관리하며 살아 오히려 건강해졌다. 나이 드니 안전한 주거 공간이 제일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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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군은 지난 2019년 광주·전남권 최초로 공공실버주택 누리타운 150세대를 건립했다. 누리타운은 준공 1년 만에 고령자 복지주택 사업의 성공 모델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김혜리

  
"내 집에서 늙어가는 건 행운"

지난 2019년 1월에 완공된 장성 누리타운은 광주·전남지역 최초로 65세 이상 어르신들에게 영구임대 형식으로 제공된 공공실버주택이다.

2015년 국토교통부 공모사업에 선정돼 추진됐으며 건강관리실·경로 식당 등 일반 주거단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노인을 위한 맞춤 서비스를 운영한다. 임대료는 월 3만~5만 원, 5만~7만 원 선으로 공공주택 특별법 최저 수준이다. 현재 150세대, 180여 명의 어르신들이 거주하는데, 이들의 평균 연령은 80세다. 


당시 정부는 주거와 복지, 보건 서비스를 한 곳에 제공하는 원스톱 시스템을 갖춘 공공실버주택 사업을 시범적으로 추진했다. 장성을 포함해 전국 11곳이 선정됐는데, 설계변경과 예산 확보 등의 문제로 아직도 입주가 안 된 곳도 있다. 반면 5년째 운영을 이어가는 장성 누리타운은 준공과 입주까지 차질 없이 진행돼 지역사회 주체로 어르신 돌봄이 이뤄진 모범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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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타운 내에는 낙상 방지를 위한 안전 손잡이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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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타운 내에는 낙상 방지를 위한 안전 손잡이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 김혜리

  
'어르신 우선'인 주택인 만큼 10층 높이 150세대 규모의 누리타운 곳곳은 고령층의 움직임을 고려해 만들어졌다. 누리타운은 출입문을 시작으로 복도, 집안 어디에서도 문턱을 찾아볼 수 없다. 걸음이 느리고 휠체어 등 보조기구를 사용하는 어르신의 이동 안전을 배려한 설계다.

복도의 이동로 벽면을 포함해 엘리베이터 앞까지 이어진 안전손잡이는 각 세대의 화장실에도 설치돼 일상 속 낙상을 예방한다. 또 휠체어 사용을 고려해 화장실에는 높이 조절이 되는 세면대를 설치했다. 각 세대는 단독세대(A형, 25㎡), 부부세대(B‧C형, 35㎡)로 나뉜다. 

입주 초기부터 남편과 부부세대에 거주한 김길자(81)씨는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근육이 약해져 화장실에서 씻고 나면 지탱할 것이 필요하다. 또 예전 살았던 집 대문 앞이 조금 경사졌는데 눈이 오자 바로 미끄러져 한참을 고생했다"면서 "욕실 물기에도 미끄러지기 쉬운 우리 나이에는 안전바는 필수 안전장치"라고 말했다. 

누리타운의 안전 설계는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장애물 없는 생활 환경(배리어 프리) 본인증'에서 우수등급으로 평가받았다. 배리어 프리 인증은 장애인, 노인, 임산부, 아동 등 모든 이용자가 공공건축물을 이용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설계단계(예비인증)와 준공단계(본인증)를 평가‧인증하는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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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영-김길자 부부가 5월 30일 장성 누리타운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혜리

  
"누리타운에서 남은 생을 살다 갈 것"이라는 김길자·황수영 부부는 중년 이후 단독주택, 아파트 등 여러 주거 형태에서 살아본 후 이곳에 정착했다. 서울에서 50년 넘게 살던 부부는 텃밭을 가꾸며 전원생활을 할 목적으로 단독 주택을 짓기도 했다. 황수영(83)씨는 "노부부에게 필요한 게 뭔지 모르고 환상만 갖고 집을 만들었다"라며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덥고 벌레 많고 수리할 곳이 수시로 생겼다. 오래 살면 무슨 일 생기겠다 싶어 바로 팔았다"고 말했다. 

이후 우연히 지인에게 장성군에 누리타운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주를 신청해 5년째 살고 있다. 황씨는 "6.25를 거친 우리 세대는 먹는 것만큼 사는 곳이 중요하다는 걸 안다. 주거 안정이 그만큼 소중하다"면서 "지금 이 나이에 바라는 건 다치지 않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라고 전했다. 

"어르신 돌봄, 지자체가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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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옥 어르신이 5월 30일 전남 장성 누리타운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 어르신은 현재 전남 장성 누리타운에 거주하고 있다. ⓒ 김혜리

   
"아내가 죽고 여기(누리타운)로 왔어요. 밥도 주고 아프면 요 앞 보건소에 가면 되고. 아무것도 가진 거 없어 막막했는데, 구십 넘은 이제야 좀 살만하다 싶어요."

김원옥(91)씨는 3년 전 누리타운에 왔다. "혼자 먹고 자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누리타운 내에 있는 장성군 노인복지관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이다. 이날 오후에는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에서 지원하는 홀몸 할아버지를 위한 요리 프로그램에 참여해 고기를 손질하고 튀김옷을 입혀 탕수육을 만들었다. 

그는 "평생 아내가 만든 음식을 먹다 보니 다른 건 입에 맞지 않더라. 그런데 어떡하나. 살려면 먹어야지"라면서 "여기서 계란 삶는 법부터 콩나물 무치는 법까지 하나하나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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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수 할아버지가 5월 30일 전남 장성 누리타운 요리실에서 진행한 탕수육 만들기 요리교실에 참여하고 있다. ⓒ 김혜리

     
매주 요리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친해진 이들도 생겼다. 삼총사라 불리는 박장수(78)·이징오(84)씨다. 누리타운에 거주하지 않는 이징오씨는 "누리타운에 살지 않아도 복지관 프로그램은 이용할 수 있어 찾아왔다. 동네에 여기 좋다고 소문났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온다"라며 "누리타운에 자리가 나면 들어와 살고 싶다"고 말했다. 

누리타운 입주 조건은 장성군에 주소를 두고 있는 무주택 세대구성원 중에서 영구임대주택 자산 기준을 충족하는 만 65세 이상 노인이다. 우선순위는 ▲수급자(생계‧의료급여) 소득 수준의 국가유공자 ▲수급자 가구 ▲도시근로자 평균소득 50% 이하 순이다. 

누리타운 내에 있는 장성군 노인복지관 관계자는 "5년 동안 자발적 퇴소 사례는 10%도 되지 않는다. 작은 평수(25㎡)는 열 가구 이상 대기 중이다. 큰 평수(35㎡)는 최대 2년여 기다려야 방이 나온다"며 "어르신들이 오래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생각이 있는데, 환경이 좋으면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누리타운 1층에서 30여 걸음 거리에 장성군보건소가, 5분~10여 거리에 도서관·병원·주민센터·마트 등 편의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장성군청 관계자는 "어르신 돌봄을 지자체가 책임지는 게 누리타운의 목적이다. 누리타운 옆에 위치한 보건소에서는 지역사회통합건강증진사업 등을 활용해 노인 대상 건강관리 및 예방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장성군보건소는 누리타운에서 정기적으로 정신건강·몸 건강과 관련한 프로그램도 운영하는데, 이날은 원예치료사의 꽃 비누 프로그램 시간에 어르신들의 스트레스 수치를 체크했다. 1분여 두뇌 뇌파 측정기로 체크한 후 스트레스 수치에 따라 간단한 상담을 이어가는 식이다. 

혼자 사는 여동생의 우울증이 걱정돼 3개월 전 장성에 와 동생과 함께 산다는 김영자(77)씨는 집중력과 스트레스 수치는 나쁘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 "동생의 쾌유를 위해 남은 인생을 살기로 했다"는 김씨는 보건소 관계자와 상담하며 정신건강복지센터 프로그램 등 동생을 위한 여러 조치를 문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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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순(왼쪽), 문대봉씨가 기자와 인터뷰 도중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신인순 할머니는 2019년에, 문대봉 할아버지는 2021년 장성 누리타운에 각각 입주했다. 두 분은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고 있다. ⓒ 김혜리

  
22년여 제주에 살다 고향으로 온 신인순(76)씨는 누리타운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해준 곳"이라고 했다. 신씨는 이곳에서 문대봉(78)씨를 만나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누리타운의 일상을 전하던 할머니는 "몸과 마음이 늙을수록 덜컥 겁이 나고 성격이 소극적으로 변하는데, 매일 안부를 묻고 건강을 챙기는 짝꿍을 만나 좋다"면서 "늙으면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편하고 안전한 내 공간과 말벗, 그리고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병원이다. 누리타운은 이 모든 걸 다 갖췄다"고 말했다. 
#장성 누리타운 #고령층 #돌봄 #공공실버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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