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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는 다르지 않다

[모임넷 연속기고] 모두를 위한 유산유도제 도입을! (2)

등록 2023.06.07 17:50수정 2023.06.0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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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후 4년, '낙태죄'의 법적 효력이 사라진 지 3년차가 되었다. 세계보건기구는 모든 국가가 조건 없이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 마련, 건강보험 보장, 유산유도제 도입을 미루고만 있다. 임신중지에 사용하는 약인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지정한 필수핵심의약품이며, 올해 약을 승인한 아르헨티나와 일본을 포함해 현재 전 세계 95개국에서 안전하게 사용하고 있다. 유산유도제의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은 특히 비용이나 노동 조건, 연령, 장애, 국적 등의 이유로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성이 낮거나 폭력 피해에 처한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에서는 6월 15일까지 진행되는 '유산유도제 도입 촉구 다수인 민원 보내기 캠페인'을 앞두고 "모두를 위한 유산유도제 도입을!" 기고글을 연재한다.[기자말]
건강은 개인이 일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일 뿐 아니라 일자리 유지와 삶의 질을 높이는 요소이기도 하다. 노동조합에서도 노동자들이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요구하고 싸워왔다. 그러나 노동자의 '재생산권'이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문제로 여겨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간 여성노동정책은 대부분 '임신' '출산'에만 초점을 두었다. 1970년대 생산직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부녀복지 정책을 보면, 순결 교육, 임신, 출산, 가족계획에 대한 교육이 주를 이룬다. 반면 야간근무, 장시간노동, 독성물질 등 열악한 노동환경이 임신한 여성노동자와 태아에게 유해하다는 사실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인정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알린 대표적인 사건이 제주의료원 간호 노동자들의 태아 산재인정 투쟁이다. 이 투쟁을 시작한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지난 2009년, 제주의료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임신한 간호사 15명 중 5명이 유산을 하였고,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낳았으며, 건강손상 없이 태어난 아이가 6명으로 3분의 1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통해 업무상 연관성이 분명해 보이는 유산과 선천성 심장질환에 대해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유산만을 산재로 인정하고, 자녀의 건강손상에 대해서는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뒤 요양급여 청구, 재청구, 행정소송 등 10년의 지난한 싸움이 이어졌다. 그 사이 간호사뿐 아니라 반도체 사업장 노동자들도 같은 피해를 호소하며 함께 싸웠다.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난 지 10년이 지난 2020년에서야 대법원은 산재를 인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올해 1월 12일부터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개정되어 여성노동자의 임신 기간 중 유해 노동환경으로 손상을 입고 태어난 자녀에게도 산재 보상을 적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태아의 건강손상에 영향을 주는 유해요인을 극히 일부만 적용하고 어머니의 유해요인 노출만을 인정하는 한계가 남아있지만 이 싸움으로 생리불순, 난임, 아이의 선천적 장애/질병, 유산·사산·조산 등은 여성 노동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일터에서부터 원인을 찾고 개선해 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회에 알렸다.

유산을 해도 휴가도 건강보험 적용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반면 낙태죄가 폐지된 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공유산에 대한 유급휴가보장과 건강보험적용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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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하고 있는 김영애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여성위원장 지난 4월 9일 열린 '낙태죄' 폐지 2주년 공동행동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영애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여성위원장 ⓒ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 네트워크


"개인적 사정으로 인공 임신중절 수술을 하였습니다. 수술 후 몸이 좋지 않아 회사에 유·사산 휴가를 신청하였는데 회사에서 이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회사가 이렇게 휴가를 받아주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이 글은 지난달 모 법률 상담 사이트에 올라온 질문이다. 이 글에 달린 답변은 '회사가 휴가를 주지 않아도 됩니다'였다. 인공임신중지를 포함해 모든 유·사산은 여성에게 출산 못지않은 정신적, 신체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출산에 준하는 회복기간이 필요하다. 하기에 근로기준법 제74조제3항에도 '사용자는 임신 중인 여성이 유산 또는 사산한 경우 그 근로자가 청구하면 유산·사산 휴가를 주어야 한다' 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다만, 인공 임신중절 수술(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에 따른 경우는 제외)에 따른 유산의 경우 유산·사산 휴가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단서조항이 있는 것이다.

또한 2017년 9월부터는 임신·출산과 마찬가지로 유산·사산·조산의 경우에도 건강보험 적용을 통해 치료비 지원이 가능해졌지만 인공임신중절은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다. 형법상 '낙태죄'가 폐지된 지 2년이 지났지만, 정부와 국회가 권리 보장을 위한 정책과 보건의료체계, 대체입법을 마련하지 않아 여전히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결국 이렇게 건강보험 적용도 받지 못하고 휴가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은 인공임신중절을 선택해야만 하는 여성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더욱 위협한다. '작은 사업장이라 휴가를 쓸 수 없어 점심시간을 이용해 수술을 하고 왔다'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이런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쉴 권리가 없으니 사후관리도 할 수 없다. 2018년 정부에서 발표한 실태조사를 보면 수술 후 적절한 휴식을 취했다는 여성은 47.7%에 불과했고, 8.5%가 자궁 천공, 습관유산, 불임 등 신체적 증상을 경험했지만 60%가량이 치료를 받지 않았다. 특히 인공임신중절수술 경험자의 절반 이상이 죄책감, 우울감, 자살 충동 등 정신적 증상을 경험했지만, 치료를 받은 경우는 10명 중 2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의료기관의 임신중지 거부나 경제적 부담 등의 이유로 비공식적으로 판매되는 검증되지 않은 유산유도제를 복용해 부작용을 겪거나 임신중지 시기를 놓쳐 건강에 더 큰 무리를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임신중지를 공식 의료체계에서 보장하고 유산유도제의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을 반드시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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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생산 건강에 대한 권리는 모든 노동자들의 기본권입니다 4월 9일 '낙태죄' 폐지 2주년 공동행동에서 ⓒ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 네트워크

 
여성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유산유도제 도입이 시급하다

지난달 31일 출산을 원하는 비혼 여성이 관련한 보조생식기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비혼출산지원법이 발의되었다. 모든 여성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환경에서 '낳을 권리'와 원치 않는 환경에서 '낳지 않을 권리'는 다르지 않다.

여성 노동자에게는 '건강하게 낳을 권리'와 '건강하기 위해 낳지 않을 권리' 모두가 중요하다. 정부는 여성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고려하여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제도적 조치들을 빠르게 마련하고, 노동환경에서도 이를 보장해야 한다. 유산유도제의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은 이를 위한 첫번째 과제이자 정부의 책임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2005년 '유산유도제(미프진)'를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하였고 현재 일본을 비롯한 95개국이 공식적으로 승인하여 사용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식약처가 유산유도제의 필수의약품 지정과 도입을 시급히 추진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는 6월 15일까지 식약처에 보낼 다수인 민원을 모으고 있다. 진정서를 https://bit.ly/미프진진정서 에서 내려받아 서명한 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17길 14 엘림빌딩 3층)에 우편으로 보내면 된다.

*이 글의 필자는 엔진(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여성부장)입니다.
#낙태죄 #건강보험 #유산유도제 #여성노동자 #재생산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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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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