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8 11:47최종 업데이트 23.06.0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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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 ⓒ 고정미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딸들의 다짐, 그 기원은 어디일까. 살림은 물론 집안의 대소사를 주관하고도 엄마는 늘 아버지의 등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퇴근 후 식구들의 끼니를 차리고 다음 날 새벽같이 출근했다. 등본에는 배우자로 돼 있지만 생활을 책임졌으므로 세대주나 다름없었음에도 친지가 모이는 자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사양했다. 소주가 오가는 자리에서 한 잔 같이 걸쳐도 시원찮을 판에 안주를 깔았다. 아비들은 늘 잘 먹었고 엄마는 자리 하나를 앉더라도 따뜻한 구석은 남편과 남자 형제에게 양보했다.

어쩌면 딸들은 자라면서 온갖 수고를 감내하는 엄마처럼 도저히 살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정 내 엄마의 위치가 견고하지 못했기에 의식화된 가부장제를 학습한 탓도 클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또한 일하며 살아가는 삼십 대 중반인 나는 퇴근 후 밀린 집안일을 반려자와 함께하며 녹초가 되곤 한다. 세탁기를 돌리고 2인분의 밥을 하고 설거지만 해도 밤 열 시가 훌쩍 넘는 일을 엄마는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했을까.


자녀가 없는 나와 달리 퇴근 후 엄마는 삼 남매를 먹이고 재워야 했을 텐데, 퇴근 후 나는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한다. 엄마를 따라잡을 자신이 없다고. 엄마만큼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에겐 퇴직금을 후하게 줘야 한다고. 그리고 엄마에게 초월적인 능력을 강요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사이좋게 나눠줘야 한다고(애초에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발언은 한 인간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 왜 그녀의 삶을 함부로 단정 짓는가).

단련된 근육으로 일해온 '이웃 어른' 이야기
 

책 <새 마음으로> ⓒ 헤엄출판사


일곱 명의 주변 어른을 인터뷰한 기록 <새 마음으로>에 오랫동안 꽂힌 건 나의 부모님을 닮은 사람들이 이 책에 여럿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 이슬아가 인터뷰어가 되어 첫 챕터로 소개하는 순덕님은 오랫동안 청소일로 한 가족을 지탱해온 나의 엄마와 닮아 있다. 순덕님은(작가의 표기를 따라 이하 '순덕님'이라 하겠다) 이대목동병원에서 27년간 청소를 해온 베테랑이다.

순덕씨의 공식 직책은 '미화원'. 그는 삶과 죽음이 지극히 종이 한 장 차이로 오가는 응급실로 1993년부터 출근했다. 환자들이 위급한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무균실과 같은 의료현장을 단련된 근육으로 유지해왔다. 팬데믹 당시엔 마스크, 가운, 비닐장갑 등 각종 쓰레기가 즐비했고 그가 하루치 치운 쓰레기통만 해도 열다섯 통.

작가는 인터뷰에 앞서 여는글에 "청소 노동자들이 사라진 도시는 하루 이틀 만에 디스토피아를 닮아갈" 거라고 밝힌다. "이 도시를 무탈히 굴러가게 하는 주요한 인물 중 하나"가 청소 노동자라고 힘주어 말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에 근거한 말이다.

여성 노동에 관한 이야기이자 일하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큰언니들'의 인터뷰집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에서는 순덕님과 같은 근로자를 '필수 노동(재난이 발생한 경우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보호 또는 사회 기능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업무)'에 종사한다고 명명한다. 책에 따르면 2021년 상반기 기준 임금근로자 2064만 6569명 가운데 60세 이상 여성은 153만 3410명. 이들이 사라지면 국내 노동력 7.4%가 '증발'한다.

이들이 사라지면 필수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 4분의 1이 사라진다. 돌봄과 노동, 보건의료, 환경 미화 등 분야에 대다수 여성들의 노동이 집약돼 있는데(67.4%), 이들의 노동 덕분에 팬데믹 아래 많은 사람들이 불안의 터널을 안심하고 나올 수 있었다. 작가는 그중 한 사람인 순덕님의 업무 일과를 꼼꼼하고 성실하게 책에 옮겼다. 그리고 오전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응급실의 모든 청소를 혼자서 담당하는 순덕님의 언어에는 매번 따라붙는 말이 있다.
 
이슬아 "다 치우고 난 다음에 그 자리를 돌아보시나요?"
이순덕 "돌아보죠. 내가 치운 데를 한번 이렇게 둘러보는 거예요. (중략) 저는 일하면서 실수 잘 안해요. 의사 선생님들은 기술이 어려우니까 실수할 때가 있을지 몰라도 나는 청소일이니까 완벽하게 해요. 남의 자리에서는 일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그저 내가 맡은 일만은 완벽하게 하는 거예요."
 
새 마음으로 여는 아침

'철저하게', '완벽하게'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순덕님은 27년간 한자리에서 일하며 쉬는 날에는 독거노인 집에 돌봄 봉사를 다녔다. 그만치 봉사를 다닌 세월이 20년. 일찍 남편을 여읜 이후 "혼자 사는 사람들한테 마음이 쓰인다"는 그는 어려서부터 "돈을 벌면 꼭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도와야지" 다짐해왔다. 그리고 사이사이 작가에게 구술한 삶의 고비들은 한 편의 영화와 같다.

농업인 윤인숙, 아파트 청소 노동자 이존자‧장병찬, 인쇄소 기장 김경연, 인쇄소 경리 김혜옥, 수선집 사장 이영애. <새 마음으로>에 나오는 인터뷰이들의 직업과 이름이다. 작가가 경청한 일곱 사람의 일과 삶은 제각각 한 편의 영화이자 드라마다. 내 부모님 그리고 할머니와 삼촌의 자화상이기도 하여 몰랐던 어른들의 비애와 다짐을 엿보는 것 같다. 장르는 모두 다르다. 액션에 가까운 삶도, 로맨스에 가까운 삶도 이 책에 고루 맛있고 풍부하게 담겼다.

작가가 순덕님 다음으로 인터뷰한 인숙씨는 온 대지를 키우는 마음으로 버섯과 오이, 감자, 고구마 등을 수확해 왔다. 요리를 해도 농장을 지나가는 이가 들를 수 있으니 넉넉히 완성한다. 오십대 중반에 면허를 따 오토바이와 트럭을 몰고 딸에게 멘탈 관리법도 아낌없이 전수한다. "스트레스를 안고 꿍해있으면 나 자신이 너무 상해버리잖아. 새 마음을 먹는 거지. 자꾸자꾸 새 마음으로 하는 거야."

작가의 인터뷰 기록을 읽다 보면 인숙씨의 새 마음을 다른 말로 '버티는 마음'으로 호명할 수 있다는 걸 배우게 된다. 천자문을 떼고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시집가라는 부모의 말에, 자식 같은 오이 하우스에 불이 났을 때도 그는 버티는 마음으로 새벽을 깨트리며 밭으로 건너가 근심을 털었다. 40년 동안, 툭툭 씻어내듯이.

고백하자면, 인숙씨의 '버티는 마음'을 따라해 보며 취침 전 독서로 마음을 다잡았던 것 같다. 인숙씨는 말한다. "식물한테도 새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어쩌면 우리는 '최선'이라는 말을 그동안 낡은 단어로 치부해왔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작가가 듣고 기록한 이야기로 '최선'을 새롭게 발견하고 발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힘 빼고 나를 바라보는 것. 새 마음으로 용기 내는 하루가 모여 내가 되는 것. 최선은 요일 하나의 근육을 기르는 일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수호신은 멀리 있지 않다

작가의 조부모이기도 한 세 번째 인터뷰이의 이야기는 세월을 좀더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생 이존자씨, 1947년생 장병찬씨는 부부로, 그중 이존자씨는 아파트에서 청소일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산다. 2008년에 청소일을 시작한 존자씨는 20층짜리 아파트 계단과 복도를 닦기 위해 "빠께쓰에 빗자루랑 걸레랑 세척제랑 담아가지고" 한 층씩 내려오며 정진하듯 삶을 닦아왔다. 그 길의 끝, 퇴근한 뒤엔 아픈 남편과 살림을 지켜왔다.

손끝이 야무진 존자씨와 너그러운 병찬씨가 결혼 이전의 시절을 회고하는 장면은 이 책의 백미다. "결혼 해보니까, 안 한 것만 못햐" 하고 웃는 존자씨는 여관 청소일은 물론 건축 현장에서 시멘트를 짊어지고 나르는 일도 해낸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당시 존자씨는 삼십 대 후반이었는데, 40킬로그램에 달하는 포대를 두 대씩 지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병찬씨 역시 쓰레빠 공장 등 노가다 일을 수없이 해 왔는데, 그는 아내 존자씨를 처음 만난 시점을 이렇게 회고한다.
 
장병찬 "일단 나는 우리 집 형편이 어렵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야 될 것 같았어. '나한테 시집을 오면 조밥을 잡수실 거예요'."
이슬아 "청혼 멘트 빡세다. 조밥(잔잔한 좁쌀)을 잡수시게 될 거라니…"
장병찬 "그랬더니 할머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냐? 그 말은 난 지금도 생생햐. '밥사발에도 눈물이 있고 죽사발에도 웃음이 있으니, 죽을 먹어도 웃을 수 있다면 살겠다'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 열아홉에 할머니헌티 그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아 버린겨."

퇴근 직후 쌀통에서 쌀을 꺼내는 일조차 억겁의 마음으로 해낸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열여덟 존자씨가 한 말은 상당한 펀치로 다가왔다. 물론 그 신선한 언어가 오간 이후 삶의 희로애락이 온 생애를 관통했겠지만. 작가는 "이들이 나의 수호신인 중 하나였음을 이제는 알겠다"고 두 사람의 인터뷰 끄트머리에 고백한다. 그리고 나의 수호신도 서로를 살리며 나를 지켜왔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고 개운하게 고백해본다.

이후 이어지는 인터뷰에는 자연에 가까운 색을 유독 잘 다루는 인쇄소 기장 김경연과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될 때 좋은 느낌을 간직하는" 인쇄소 경리 김혜옥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창신동 시다 시절을 거쳐 손끝 맵기로 유명한 수선집에서 재능을 떨치며 사는 사장 이영애의 삶이 다른 색채의 파도로 펼쳐진다.

일곱 명의 이야기에서 공통으로 발견된 주제어는 다음과 같다. 잘 산다는 것, 나의 자리에 타인이 들어올 수 있게 양보한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하는 일의 이유는 종국에는 무언가를 돌보기 위함이라는 것.

순덕씨와 인숙씨, 존자씨와 병찬씨 부부 그리고 경연씨와 혜옥씨, 영애씨가 해온 일들은 모두 회복하며 먹고 채우는 성질을 갖고 있다. 나는 이웃 어른들의 손을 거친 노동 끝에 나의 척추를 바로 세울 수 있음을 비로소 이해한다. 출근과 퇴근의 시간들, 곡진한 부모와 나의 하루를 접하며 새 마음으로 점프해본다. 의지하고 싶은 닮은 사람의 이 이야기들이 더 많이 읽히길 바란다. 나의 엄마, 그녀의 다짐을 닮아가는 새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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