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완도로 시집와... 논둑에 서서 밥 먹음서 일 했제"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이야기 - 양영자 해녀

등록 2023.06.09 10:07수정 2023.06.0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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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살찐 소가 누운 형상이라는 전남 완도 덕우도는 예로부터 어족자원이 풍부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주변으로 매물도와 솔섬 등 크고 작은 무인도가 여러 개 있어 해녀들의 물질어장 또한 다른 곳에 비해 아주 풍부한 편이다.

이곳에 47년 동안 쉬지 않고 물질을 하다, 3년 전 은퇴한 양영자 해녀(81)가 살고 있다. 양 해녀는 청산도 읍리가 고향이다.

″나는 제주 양씨 자자일촌인 읍리에서 태어나서 고생이라고는 안 해보고 컷어. 그란디 시집을 와서 고생을 말도 못하게 많이 했제. 21살에 23살짜리 신랑을 만났어. 친정에서 상산포까지는 가마를 타고 갔제.

그때는 읍리서 상산포까지 10리가 넘은디 길이 지금 같지 좋지 않고 좁디 좁고, 동부재를 넘어야 해서 가마꾼들이 고생했제. 거기 가니까 나를 싣고 갈 엔진배가 하나 있더라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목선 쬐금한 배였어. 그때는 다 노 젓고 댕긴 배인디 나는 신랑하고 엔진배 타고 친정식구들하고 다른 사람들은 노 젓는 배를 타고 덕우도로 왔당께″     


물질은 결혼 3년 후 시작했다. 

″원래 우리 친정동네도 마을 앞 개포에서 물질을 쪼금식 했거든. 나는 큰애기 때 천초(우뭇가사리)를 매었제. 18~19세 였어. 그 때 고모가 도청리서 나주식당이라고 유명한 식당을 했는디 나는 거기서 반찬을 해주고 하다가 21살에 시집을 왔제. 시집을 와서 본께 시댁에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시부모님이 계신디 둘 다 술을 그리 좋아 했었제. 손지들을 봤는데 손지들을 봐 줄라 생각도 안해. 먹을 것도 없지. 그래서 내가 물질을 나선 것이여 

애기들을 많이 낳어. 3남 3여 6남매를 낳았어. 왜 근고니 결혼해서 보니까 시누들이 네명 있는디 신랑이 독자여. 그래서 외로우니까 애기들을 많이 낳자고 6남매를 난 것이여. 그란디 애기들이 머를 알기나 한 듯 즈그 엄마가 바쁜 줄 알고 다 순하디 순하게 큰 것이여. 젖만 주먼 울들 안해. 그것이 지금까지도 참 고맙당께.


우리 친정은 그래도 농사가 좀 있어서 밥은 잘 먹었는데 여그는 농사가 쬐금 있어 가지고 식량이 달랑달랑 해. 그래서 내가 물질해서 논도 사고 밭도 사고 했는디 우리 시할머니가 꼬라지가 겁나 사납당께. 아조 동내서 알아줬어. 매느리한테는 암 말도 안해. 그란디 손지 매느리한테는 징하게 성가시게 굴어.

논 밭에서 일하다 애기 젖 먹이로 간다고 하먼 못가게 해. 그라먼 오매 할머니 목이 말라 죽어 불 것 당께요함서 집으로 막 달려와 부러 그라먼 애기들이 잠자고 있어 얼렁 깨서 젖주고 또 밭으로 달려가고...    

우리 시어머니는 밭에 가서도 술마시고 자부러. 그러먼 시할머니는 나한테만 성질을 냈제.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부러. 그랑께 지금까지 살었제. 그놈 다 듣고 가슴에 담었다먼 진작에 죽어부렀제.

여그 남쪽에 가먼 재넘어라고 있어. 거그가 물이 좋아서 다랑치 논이 좀 있거든. 그란디 갈라먼 야트막한 재를 넘어서 오솔길로 가야해. 그랑께 나락을 심으먼 거그서 홀테로 홀타서 머리에 이고 오고, 보리를 갈라먼 거름을 머리에 이고 재를 넘어 댕기고 그랬어.

그란디 우리 시할머니가 점심밥을 싸 가지고 가먼 꼭 서서 밥을 먹어. 그라고 나도 서서 빨리 먹고 일하라고 그래. 그라먼 성질난께 밥을 안 먹어부러. 그래도 걱정을 안 해 오후가 되믄 배가 고파 죽것는디 오기로 참고 일을 했어. 그란디 그런 시할머니도 미움스로도 정이 들었는가 돌아가신께 눈물이 많이 나오듬마.″  

우리 아저씨는 동네 일(마을 이장)을 14년간이나 봤어. 그때는 마을에서 당제를 모셨거든. 그라먼 당제를 준비하는 것이 징하게 어려운 일이여. 온갖 나물과 과일, 떡, 술, 고기 등 몇 일간 고생을 해야된디. 그래도 그때는 젊어서 다 이겨냈당께."


인생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배(여객선)가 없어 친정에를 10번도 못 다녀 온 것이다.    ″결혼하고 여기서 보면 청산도가 훤히 보여 그란디 객선이 없은 게 노 젓고 갖다 와야 한디 애기 낳고 어찌고 하다 보니 친정에 갈 시간이 없었어. 또 친정 오빠가 읍리에서 살고 있었는디 부모님이 환갑을 막 지내고 돌아가셨어. 그러니까 더 친정에 갈 일이 없더라고.″

이제는 6남매 모두 출가시키고 홀로 지내는 양 해녀는 작은 아들이 같은 마을에서 전복을 많이 키우고 있다. 

″둘째 아들이 며느리하고 손지하고 여그 살고, 딸 한나는 경기도 살고, 너이는 광주서 살고 있어 인자 야든이 넘었는디 뭐 하것어 그저 식구들 모두 건강했으먼 쓰것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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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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