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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사라진 비행기, 비극을 기적으로 바꾼 사람들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3.07.07 15:52최종업데이트23.07.0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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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만분의 1' 사람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정도로 가능성이 희박한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하고도 사람이 살아남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불운과 행운,비극과 희극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찰나의 차이로 우리의 삶을 찾아온다. 그리고 최악의 절망속에서 놓지 않았던 한 가닥의 희망이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7월 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응답하라733 - 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 편을 통하여 최악의 항공기 사고를 기적으로 바꾸어놓은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사라진 비행기
 

7월 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응답하라733 - 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 편. ⓒ SBS

 
1993년 7월, 인천에 거주하던 신준영-신나라 남매와 엄마 양미화씨는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비행기를 타고 친가와 외가가 모두 있는 목포로 내려가기로 했다. 남매의 아빠 신경재씨는 회사 일이 너무 바빠 함께 가지 못하는 대신, 가족들을 편하게 고향에 보내주기 위하여 통큰 선물로 비행기 티켓을 준비한 것.
 
신남매와 엄마 미화씨가 탈 비행기는 아시아나 항공 733편이었다. 경재씨는 가족들을 위하여 앞쪽 자리를 예매했다고 했으나, 착오가 생겼는지 막상 비행기에 탑승한 미화씨가 확인한 좌석은 제일 뒤쪽에서 네번째줄인 21열이었다. 가족들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일단 자리에 착석했다. 하지만 이 꼬여버린 이 좌석 배치가, 그들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게될 줄은 당시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당시 비행기 안에는 미화씨네처럼 가족단위 승객들도 북적거렸다. 오후 2시 37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목적지 목포에는 3시 30분경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후 5시 반 경이 되어 회사가 있던 남매의 아빠 경재씨는 형수님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뉴스를 확인한 뒤 소스라치게 놀란다. 뉴스에서는 속보로 '김포발 목포행천에 거주하던 신준영-신나라 남매와 엄마 양미화씨는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비행기를 타고 친가와 외가가 모두 있는 목포로 내려가
 
그 무렵, 목포와 가까운 전라남도 해남군 시골에 위치한 마천마을에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마철이라 우중충한 날씨속에서 오후가 되어 밭으로 향하던 한 마을 주민은, 돌연 뿌연 안갯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절뚝거리며 걸어오던 한 젊은 남자와 마주친다.
 
남자는 자신이 추락한 비행기에서 살아나왔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상황에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다들 피했다. 남자는 마을로 내려와 인근 산에 비행기가 추락했고, 자신은 구사일생으로 산을 헤치고 몇시간 만에 내려왔다며, 주민들에게 구조신호를 보내달라고 재차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는 바로 직장 상사 대신 출장자 목포행 733편 비행기에 올랐던 승객 김현식씨였다.
 
낮에 다수의 마을주민들이 천둥소리라고 생각했던 굉음은 바로 비행가가 운거산에 추락하는 소리였던 것. 마천마을 주민들은 곧바로 당국에 신고했지만 지역 자체가 워낙 외진 곳인 데다 기후도 좋지 않아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주민들은 구조대가 오기 전에 먼저 직접 구조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비행기가 추락한 마천마을의 운거산은 높이 320m 정도로 고도 자체는 높지 않지만 길이 없고 숲이 우거져서 가파른 곳이었다. 비행기의 정확한 추락 지점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폭발 위험도 존재했다. 자칫하면 구하러 간 사람들도 위험해 질 수 있었지만, 인명을 구하기 위하여 마천마을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구조작업에 참여했던 장수익씨는 "우리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가서 구출만 그것만 신경 썼지. 사람이 다쳤다는데 누가 가서 안 쳐다보고 뭘 안 하려고 하겠어요? 다 너 나 할 것 없이 다 사람이 어디서든지 인지상정이지 그것이"라고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주민들은 30분쯤 산을 올라가다가 비행기에서 샌 연료 냄새를 맡고 733편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들이 목격한 광경은 너무도 참혹했다. 비행기 동체는 세 동강이 나있었고, 곳곳에서는 추락 당시 비행기에서 튕겨나온 시신들과 부상자들이 쓰러져있었다. 그중에는 아기를 꼭 안겨서 사망한 엄마들, 조종실에서 숨진 기장과 부기장도 발견됐다.
 
주민들은 현장을 둘러보다가, "살려주세요. 저희 아이들 좀 구해주세요"라는 생존자의 절박한 구조 요청을 들었다. 바로 나라-준영 남매의 엄마인 양미화씨였다. 불행중 다행으로 여기저기 목숨을 건진 생존자들이 남아있었다.
 
주민들은 힘을 합쳐 어린 아이들부터 한 사람씩 먼저 구해냈다. 하지만 생존자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일이 시급했다. 추락 지점은 운거산의 7부능선이라 구급차량이 접근할수 없었고, 생존자들도 출혈이 심하거나 장시간 비를 맞아 저체온증이 우려되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긴박한 순간에 주민들은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긴 장대를 만들고, 옷을 벗어 장대 사이에 끼워 묶고 임시로 들것을 만드는 기지를 발휘했다. 주민들은 산의 길목마다 배치되어 릴레이 형식으로 들것을 내려보내며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부상이 심하지 않거나 몸이 가벼운 아이들은 아주머니들이 업고 내려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구조대도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밤이 찾아온 사고 현장에서 끝내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사람들도 있었다. 눈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서도 마천마을 사람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119 구조대가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생존자 구출은 거의 끝난 상태였다고 한다. 위험에 망설이거나 조금이라도 지체됐었더라면 놓칠 뻔 했던 '골든타임'에서 마천마을 주민들의 용기와 헌신으로 무려 44명의 값진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목포로 향했던 경재 씨는 생존자 명단에 두 자녀와 아내의 이름이 포함된 것을 알고 긴장이 풀린 나머지 잠시 혼절했다. 미화씨는 사고 직후를 떠올리며 기억을 잃고 산에 누워있었는데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올라오는 소리에 의식을 찾았다고 한다. 미화씨는 "제가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말 한마디가 있다. 주민들이 '라이터 켜지마라'고 하고 올라오는 그 소리에 제가 정신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도움을 요청했던 미화씨는 아이들이 먼저 구조되는 것을 보고나서야 다시 정신을 잃었다.
 
부상자들은 인근 10개 병원으로 나뉘어 이송됐다. 경재씨의 아내와 두 자녀도 각각 다른 병원에 실려간 상태였다. 경재는 병원을 돌아다니며 무사하다는 것만 확인하고 다시 이동해야 했다. 경재씨는 딸 나라 양을 찾아갔을때 당시 6살이던 딸이 '엄마는? 오빠는?' 그러고 묻더라"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733편 탑승자중에는 당시 3살이던 민구네 가족도 있었다. 다행히 민구는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고 민구 엄마 김미정씨(가명) 역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구조 과정에서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당시 부상이 심하여 군인과 마을 사람이 미정씨를 로프에 단단히 고정시켜서 헬기로 이송해야 했다. 하지만 구조 장비가 없었고 로프만 있었는데, 목과 허리를 단단히 고정하지 않는 바람에 척추신경이 손상되며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은 것. 물론 추락으로 인한 충격이 1차적 원인이긴 했지만, 조금 더 전문적으로 구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었다. 구조에 나선 마을 주민들도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많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한편에서는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아픈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여름 휴가철이라 가족단위 탑승객이 유난히 많았다. 무려 9명의 가족들이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6명이 숨진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다.
 
비행기에서 미화씨네의 바로 앞줄에 앉았던 승아네 세 가족도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엄마와 6살 아들은 꼭 안은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지만 4살 승아는 생존자 명단에서도 사망자 명단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행방이 묘연했다.
 
승아 아빠는 딸을 찾기 위하여 사고현장과 병원들을 헤매다가 마지막으로 중환자들이 주로 입원해 있던 전남대 병원을 찾았다. 승아 아빠는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한 아이를 보고 왠지 승아와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병상옆 이름표에는 '임보경'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고 간호중인 다른 아빠도 옆에 있었다.
 
발길을 돌리려고 했던 승아 아빠는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아이의 신원을 다시 확인했다. 마침 보경이네도 비행기를 탔다가 안타깝게 엄마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보경이의 아빠는 그나마 아이가 살았다는 사실에 위안하여 간신히 아픔을 버텨내고 있었다. 보경 아빠 입장에서는 황망한 상황에 다친 아이가 자신의 딸 같다는 사람까지 나타난 것이다. 보경 아빠는 그럼에도 일단 승아 아빠의 부탁을 들어줬다.
 
중환자실에 있던 아이는, 사실 보경이가 아니라 승아였다. 진짜 보경이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로 근처 다른 병원에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로 누워있었다. 두 아이가 나이, 체구, 얼굴까지 비슷한 데다, 크게 다쳐서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 잘 구분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보경이 아빠는 뒤늦게 딸의 시신을 확인하고 통곡했다. 가족을 잃은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아는 승아 아빠는, 보경이 아빠의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했다.

 수거된 블랙박스, 그리고 진실
 

7월 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응답하라733 - 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 편. ⓒ SBS

 
목포로 향하던 아시아나 733편은 왜 추락했을까. 수거된 블랙박스와 조종실 음성기록 장치에 남은 조종사들의 대화를 통하여 진실이 밝혀졌다. 사고 당일 목포 지역에는 초당 1mm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비구름 속에 시야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착륙을 시도하던 기장은, 비행기가 이미 운거산을 넘어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고도를 낮추다가 산에 충돌한 것이다.
 
기장은 "오 맙(소사)"라는 비명을 지르며 급히 출력을 최대치로 올리고 이륙하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비행기는 상승하다가 산 정상을 넘지 못하고 1차 충돌했고, 그 후 봉우리를 따라 넘으면서 2차 충돌, 마지막으로 굴러 내려가면서 기체가 세 동강이 나고 완전히 파손됐다.
 
그나마 나무들이 완충작용을 해준 덕에, 생존자가 나올수 있었다. 가장 먼저 먼저 충돌한 앞좌석 승객들이 많이 사망했고, 상대적으로 뒷좌석 승객들의 절반 정도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원래는 앞자리를 요청했지만, 항공사의 차고로 뒷자리를 배정받은 미화씨네 세 가족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극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다.
 
55일간 이뤄진 사고 조사의 최종 결과는 '지정된 고도를 지키지 않은 채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한 조종사의 실수로 인한 사고'로 판명됐다. 그런데 기장은 8000시간 비행 경력의 베테랑이었고, 단순히 악천후 때문에 이런 실수를 했다기에는 석연치않았다.
 
목포공항은 원래 해군 군공항으로 쓰다가, 민항기 운항을 시작한지 1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목포 공항은 애초에 민간 항공기가 이착륙하기에는 지나치게 규모가 작았고, 심지어 항공기의 이착륙을 도와주는 ILS(Instrument Landing 1System) 장치도 없었다.
 
악천후에 공항 상황도 안 좋으면 다른 곳으로 회항을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왜 기장은 무리해서 세 번이나 착륙하려고 했을까. 공교롭게도, 사고 직전에 날이 서서히 개고 있었다. 만약 회항을 했다면 승객들의 원성이 자자했을 것이고, 항공사 입장에선 경비 보상 문제가 생기니까 달가울리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 항공사들은, '정시운항률' 경쟁을 벌이는 분위기 속에서 기장들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정시 착륙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결국 733편 참사는 당시 국내 항공계의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와 불운이 겹쳐서 만들어진 비극이었던 것이다.
 
733편 참사 이후에야 한국 항공계는 항공 안전 시스템을 대폭 개선하고 운영 조직을 재구성하는 많은 변화가 이루어진다. 목포 공항은 더 이상 민간용으로는 쓰지않고 군 전용 비행장으로만 사용하기로 결정됐다. 많은 사람들의 아픔 위에 안전을 위한 돌탑들이 하나씩 쌓인 것이다.
 
사고가 난지 어느덧 30년이 흘렀지만 많은 이들은 아직도 그날의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생존자인 미화씨네 가족은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해야했다. 미화 씨는 한때 하반신을 못 쓸 수 있다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완치가 됐다고 한다. 그들에게 7월 26일은 끔찍한 악몽의 날이기도 하지만, 제2의 인생이 다시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미화씨는 "저희들이 사람이 그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공항에서 '다녀올게요' 하고 웃으면서 헤어졌는데, 영원히 못 볼 수도 있었지 않나. 남편이 출근할 때 절대로 싫은 소리 해서 내보내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헤어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게 저한테 엄청 두려움이고 트라우마였다"고 회상했다.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된 신나라씨와 신준영씨도 그날 이후 "새롭게 받은 인생인만큼 함부로 살면 안되고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되새기며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또한 비행기 사고에서는 이례적으로 44명이나 되는 기적같은 생존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망설임 없이 구조를 위해서 나서준 마천마을 사람들의 용기 덕분이었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 위를 걸어다니는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기적이라는 것은 곧 마천마을 주민이나 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30년의 시간이 흐르고 운거산은 이제 당시 사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시 푸르러졌다. 상처 위에 새롭게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면서 상처를 치유한 것이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이란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억에 대한 의미가 바뀌는 과정이라고 한다. 너무나 끔찍한 경험에도 누군가는 살아 남았고, 잘 견뎌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우리사회가 트라우마를 극복해가면서 더 나은 세상으로 진화해가는 과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꼬꼬무 1993년 아시아나추락사고 마천마을 항공기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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