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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 깨고 '음란소설' 쓴 조선 최고 문장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김민정의 커리어 최고 흥행영화 <음란서생>

23.07.21 10:04최종업데이트23.07.2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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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병원이나 옛날건물에 가면 3층 다음 곧바로 5층으로 넘어가는 곳을 종종 볼 수 있다. 4층을 표기하는 경우에도 숫자 4가 아닌 영어 FOUR의 약자 'F'로 표기하는 곳이 적지 않다.

반면에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양권 나라에서는 숫자 13을 금기시한다. 최후의 만찬 때 자리에 있었던 인원이 예수를 포함해 13명이었고 예수를 배신한 제자 유다가 13번째로 들어왔다는 것이 유례가 됐다. 실제로 서양의 아파트나 호텔 등에는 13호가 없는 경우가 적지 않고 동양권의 4처럼 13층을 생략하거나 '12B'등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옛날로 거슬로 올라가 보면 금기시되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 조선시대 궁인들이나 사대부로 불리는 양반들은 철저하게 통제된 생활을 강요 받았다. 현대사회에서 '야설'로 불리는 음란소설들이 철저하게 금기시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사람은 자고로 하지 말라는 일에 더 호기심이 생기는 법. 김대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한석규, 이범수, 김민정 주연의 <음란서생>은 음란소설 창작에 빠진 사대부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음란서생>은 연기경력에 비해 영화 출연작이 그리 많지 않은 김민정의 커리어 최고 흥행영화다. ⓒ CJ ENM

 
아역배우에서 성인연기자로 '정변'한 모범사례

물론 안성기와 고 강수연 같은 예외도 있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연예계에서는 "아역배우로 성공하면 성인배우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일종의 징크스가 있었다.

하지만 김민정은 이 같은 징크스를 잘 극복하고 성인 연기자로도 크게 성공한 아주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1990년 연기자로 데뷔한 김민정은 90년대 초반 많은 광고와 드라마에 출연했던 최고의 어린이 배우이자 모델로 활동했다. 1993년에는 훗날 <왕의 남자>와 <라디오 스타>,<동주>,<박열> 등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의 어린이 영화 <키드캅>에 출연했다.

청소년기에도 이렇다 할 공백기 없이 연기활동을 이어가던 김민정은 갓 스물을 넘긴 2002년 영화 <버스, 정류장>을 통해 성인연기자로 변신을 시도했다. 2004년에는 지오디 출신 윤계상의 영화 데뷔작이었던 변영주 감독의 <발레교습소>에 출연했다. 물론 김민정은 이미 <아일랜드>, <패션 70's> 등의 드라마를 통해 성공한 성인연기자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그리고 김민정은 2006년 비슷한 시기에 연기자로 데뷔한 한석규, 이범수와 함께 영화 <음란서생>에 출연했다. 김민정이 궁에서 우연히 만난 사대부와 금지된 치정을 나누는 후궁 정빈을 연기한 <음란서생>은 2006년 2월에 개봉해 전국 257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07년 의학드라마 <뉴하트>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은 김민정은 2009년 고 박용하의 유작이 된 범죄스릴러 영화 <작전>에 출연했다.

2015년 <밤의 여왕> 이후 영화 활동이 뜸한 김민정은 2018년 <미스터 션샤인>, 2019년 <국민 여러분>, 2021년 <악마판사> 등을 통해 여전히 좋은 연기를 선보이면서 많은 아역배우 출신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점잖은 사헌부 장령의 은밀한 이중생활
 

18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김민정(왼쪽)과 한석규는 같은 해(1990년)에 연기자로 데뷔했다. ⓒ CJ ENM

 
<음란서생>을 연출한 김대우 감독은 이재용 감독의 <정사>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 등의 각본을 쓰면서 시나리오 작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스캔들> 이후 장편영화 데뷔를 준비하던 김대우 감독은 '점잖은 선비가 음란하면 어떨까'라는 한 문장의 발칙한 상상을 토대로 시나리오로 완성했고 3년이 넘는 제작기간 끝에 2006년 2월 드디어 자신의 연출 데뷔작 <음란서생>을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가 음지에서 음란소설작가로 활동한다'는 <음란서생>의 설정은 대단히 신선하다. 하지만 초·중반에 코미디 요소를 집중시켜 관객들을 몰입시킨 후 후반에 이야기가 급격히 심각해지면서 인물들이 비극으로 치닫는 <음란서생>의 서사는 2000년대 많은 인기를 끌던 한국영화의 일반적인 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관객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음란서생>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관객들마다 달랐지만 조선 최고의 문장가이자 사헌부 장령 김윤서 역을 맡은 한석규의 연기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관객들은 거의 없었다. 사실 2000년대 중반은 한석규가 90년대 중·후반의 최전성기를 지나 잠시 주춤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음란서생>은 아쉬운 흥행성적을 기록한 영화들이 많았던 한석규의 2000년대 필모그라피 중에서 몇 안 되는 흥행작이자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다.

주·조연 할 것 없이 30-40대 이상의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 <음란서생>에서 20대 중반에 접어들던 김민정은 실질적인 막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김민정은 연기경력 20년이 넘는 베테랑 배우(?)답게 영화 속에서 고혹미와 순수함을 오가는 정빈의 복합적인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 특히 말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이는 형벌을 의미하는 '육시'를 설명하며 궁녀를 추궁하는 장면에서는 젊지만 노련한 김민정의 내공을 볼 수 있었다.

<음란서생>은 퓨전사극을 표방하는 영화답게 사극이라는 장르적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와 배경을 초월하는 현대적인 요소를 많이 집어 넣었다. 특히 음란소설을 함께 완성하는 김윤서와 광헌(이범수 분)은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를, 복사본을 대량 생산해 독자들에게 홍보하고 판매하는 황가(오달수 분)는 영화의 '배급사'를 연상시킨다. 이 밖에도 독자들이 책 뒤에 '댓글'을 적어 자신의 감상을 표현하는 장면도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최고 명대사 가져간 안내상의 존재감
 

안내상은 기대 이상의 열연을 통해 자칫 평범한 조연으로 전락할 수 있었던 조선왕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 CJ ENM

 
올해 <범죄도시3>를 통해 데뷔 33년 만에 천만 배우가 된 이범수는 <싱글즈>와 <오!브라더스>,<슈퍼스타 감사용> 등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2006년 <음란서생>을 통해 첫 사극에 도전했다. 이범수가 연기한 광헌은 '의금부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무시무시한 고문 전문가지만 취미로 그린 그림이 김윤서의 눈에 띄면서 김윤서가 쓴 음란소설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광헌의 삽화는 곧 모든 비극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영화 초반만 해도 조·단역으로 큰 의미 없이 등장하는 듯 했던 조선의 왕은 영화 후반 이야기가 심각해지면서 주연급 캐릭터로 비중이 커진다. 왕 캐릭터에 대해서는 관객들의 호불호가 있었는데 2007~8년 <조강지처클럽>으로 크게 유명해지기 전의 안내상이 열연을 통해 관객들을 이야기에 몰입시킨다.

2005년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과 조직 내 서열 2위를 다투는 악역 문석을 연기했던 배우 김뢰하는 <음란서생>에서 조내관을 연기했다. 후궁인 정빈을 남몰래 좋아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영원히 정빈 곁에 남기 위해 '남자'를 포기한 기구한 사연을 가진 인물이다. 사실 정빈을 향한 조내관의 애틋한 마음은 주인공 김윤서를 능가했지만 조연 캐릭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부하의 무기에 찔려 생을 마감한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음란서생 김대우 감독 김민정 한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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