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성지순례길은 아니지만, 나만의 순례길을 걷습니다.

아침 산책으로 내 안의 나와 친해집니다.

검토 완료

이유미(yumi05)등록 2023.07.24 17:44
 

산책길에 마주한 새벽의 어슴푸레한 풍광 ⓒ 이유미

   긴 장마로 인해 일주일만에 재개된 아침 산책. 주말이기도 하거니와 열려진 문틈새로 스며들어온 빛한줄기에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다. 침대에서 빠져나오는 바스락소리에 행여나 아이들이 깰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왔다. 컴퓨터 책상 팔걸이에 대충 걸쳐놓은 아이다스 레깅스와 긴 티셔츠에 몸을 욱여넣고 현관에 아무렇게나 놓인 흰 운동화에 발을 구겨넣고 가볍게 현관문을 나서본다.
 나오자마자 전날밤 내린 비에 축축히 젖은 풀냄새가 코끝으로 훅 들어오고, 간간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살갗에 닿이고, 새들의 청량한 지저귐이 기분좋게 귀를 간질인다. 나오자마자 나는 낮게 "아 좋다"라고 탄식을 연발하며 힘껏 발을 굴러 앞으로 나아갔다.발에 닿는 지면의 감촉조차도 기분좋게 느껴졌다. 두 발로 땅을 밀며 힘껏 걷다보면 새삼 튼튼한 두다리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집에서 15분정도 걸어나가면 구봉산 둘레길과 선유공원이 있는데 나의 목적지는 선유공원 정자이다. 쭉 걷다보면 중년이나 노년의 어르신들을 많이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비교적 젊은 나를 흘끗 보며 지나간다. 그 눈빛은 "쟤는 산책의 묘미를 빨리 알아버렸네"하는 것 같아 흐뭇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걸으며 그들의 주름진 얼굴에 핀 웃음꽃을 보고 있노라면, 몇십년 후 저렇게 걷고 있을 내 모습을 그분들에 비추어보며 나이드는게 슬프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옆을 스쳐지나간다.
 문득 이어폰을 두고 왔다는 생각에 아쉬운 탄성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어폰이 없음으로 주변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최신음악대신 새들의 지저귐과 풀과 나무들이 바람에 사라락 흔들리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으며 걷다보면 세로토닌이 샘솟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내 안의 소리에도 좀 더 귀기울이게 된다. 이어폰을 챙기지 않은 나를 그제서야 칭찬해본다.
 요즘 나의 고민거리들과 방학을 앞두고 벌어진 이런저런 일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돌덩어리들을 걷는 길에 하나씩 내려놓는다. 그런 고민덩어리들을 부서뜨러자는 심정으로 땅을 더 세게 팍팍 밟아본다. 이상하게 속이 시원해진다.
 지금 고민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때문에 걷다보면 그런 것들이 사소하게 느껴진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 내 앞에 놓인 길을 힘껏 밟아나가며 주변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길가에 핀 파스텔 톤의 꽃들을 감상하는게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이기 때문이다.
 길가에 핀 들꽃들이 꼭 자신을 한번 쳐다봐달라고 말하는 것 같아 걸음을 멈추고 가만가만 바라본다. 아빠가 늘 산책 후 이런 꽃들을 사진찍어 보내주었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숨어있던 존재들을 내눈으로 발견해낸 기쁨 때문일 것이다.
 어느덧 7시, 산책에 푹빠져있던 나는 불현듯 주말이면 어김없이 이시간에 기상하는 아이들을 떠올린다. 분명 엄마가 없어졌단 사실에 울고불고 하고 있겠지? 라는 걱정에 살짝 눈앞이 깜깜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한달음에 달려갈수는 없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다시 마음에 평정심이 생겼고 그냥 이 순간을 더 느긋하게 즐기기로 마음 먹었다.
 평소 안가본 길도 걸어가보며 오늘 아침 첫 발자국을 남기고, 낯선 풍경을 마주하다보면 머릿 속에 새로운 생각들도 번뜩인다. 그리고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의욕도 마음 속에서 타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30분쯤 걸었을까? 조금 숨이 차오르는 차에 눈앞에 보이는 나무벤치가 어서 와서 쉬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집에서 나오며 챙겨나온 책을 잠시들여다본다. 방송인 손미나씨가 스페인 산티아고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쓴 이야기. 산책을 하는 내게 딱 맞는 내용들이다. "이 길 끝엔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거야" 에서 마침 이런 구절이 나온다.
 걷기를 하면 모든 외부적 요인은 차단되고 오롯이 내 안의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어 내안의 나와 친해진 느낌이라고. 평소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소리를 듣느라 잘 듣지 못했던 내 안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고. 그 문장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나도 그렇게 내 안의 나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내가 요즘 겪는 문제가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지 곱씹어보면서 힘껏 구른 발에 그 문제들을 내려놓으며 산책 전에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 길끝엔 무엇이 있을까? 라는 궁금증에 더더 앞으로 걸어가고 싶지만 9시 반 아들의 병원예약으로 인해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오는 길에 양 옆길에 핀 파스텔톤 보라빛 꽃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가는 기분이라 더없이 좋다. 
 늘 정신없고 외부 소음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어지럽혀진 내 마음을 마주하고 충분히 대화하기. 지금 이순간에만 집중하기. 산책이 내게 준 선물꾸러미이다. 매일 할 수는 없지만 새벽녘에 눈이 떠질때면 또 지금 이순간. 나와의 대화를 하며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산책을 자주 해야겠다. 
 산티아고는 아니지만, 그렇게 매일 나만의 성지순례길을 걸으며 지금 이순간, 내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하고 대화하며 매일을 살아갈 힘을 얻어야겠다. 
덧붙이는 글 작가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립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