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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고픈 한 남자의 절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새천년이 시작되는 날 개봉한 영화 <박하사탕>

23.08.12 10:35최종업데이트23.08.1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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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송강호는 2000년 2월에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을 통해 단독주연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송강호는 이미 1997년 <넘버3>의 불사파 두목 조필 역으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김지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 <조용한 가족>에서도 산장 집안의 장남을 연기하며 코믹한 매력을 뽐낸 바 있다(물론 <쉬리>라는 '흑역사'도 있었지만 이는 송강호와 이장길 캐릭터의 불협화음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김윤석은 지난 2008년 나홍진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추격자>에서 형사 출신의 윤락업소 사장 엄중호 역을 통해 주연으로 데뷔했다. 김윤석은 <추격자>의 500만 관객을 견인하며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대한민국 영화대상의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김윤석 역시 <추격자>에 나오기 2년 전 최동훈 감독의 <타짜>에서 아귀 역을 맡아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며 관객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는 '준비된 배우'였다.

송강호나 김윤석처럼 주연 데뷔작을 통해 뛰어난 연기로 관객들을 휘어잡는 배우들은 이미 과거 여러 작품에서 이미 자신의 연기내공을 뽐냈던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미도>와 <해운대>로 두 편의 천만 영화를 보유하고 있는 배우 설경구는 영화계에서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가 곧바로 주연으로 데뷔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1월 1일에 개봉했던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었다.
 

<박하사탕>은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1월1일에 개봉해 서울에서 29만 관객을 동원했다. ⓒ CGV아트하우스

 
새천년을 전후로 개봉했던 한국 영화들

사실 1999년 12월 31일과 2000년 1월 1일은 단 하루 차이이기 때문에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변하진 않는다. 하지만 새천년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꿈을 꾸고 다짐을 하면서 평소와 다른 마음가짐으로 2000년 1월 1일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 IMF의 관리를 받던 힘든 기간이었지만 1999년 말과 2000년 초에 걸쳐 많은 영화들이 개봉하면서 극장가는 제법 활기를 띄고 있었다.

1999년 12월 11일에는 훗날 <사랑니>와 <은교> <침묵> <유열의 음악앨범> 등을 연출하는 정지우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 <해피엔드>가 개봉했다. 무엇보다 <해피엔드>는 데뷔 후 처음으로 파격적인 노출연기에 도전한 전도연의 변신이 큰 화제가 됐다. 같은 해 <내 마음의 풍금>에서 순수한 17세 소녀를 연기했던 전도연이 불과 몇 개월 후 남편을 두고 옛 애인과 바람을 피는 주부를 연기한 것은 관객들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해피엔드>가 개봉했던 날에는 1997년 <넘버3>를 통해 충격적인 데뷔를 하며 '천재감독'으로 극찬을 받았던 송능한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세기말>도 함께 개봉했다. 4개의 장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 <세기말>은 전작 <넘버3>와 달리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전개되면서 서울관객 3만9000명으로 흥행에 실패했다. 송능한 감독은 <세기말>을 끝으로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면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지금은 '탕웨이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김태용 감독과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만든 민규동 감독이 공동 연출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20세기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했다. '여고 내의 동성애'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서울 14만 관객에 그쳤지만 김태용과 민규동이라는 좋은 감독을 두 명이나 배출했고 공효진과 김규리,박예진 등 전편에 이어 좋은 신인 배우들도 많이 배출했다.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원작으로 2000년 1월 8일에 개봉한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은 2000년대 초반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로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작품이다. 중년의 기혼남과 여고생이 벌이는 파격적인 장면들 때문에 등급보류 판정을 받았지만 서울에서만 30만 관객을 동원했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리고 <거짓말>을 연출한 장선우 감독은 2년 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라는 '진짜 문제작'을 선보였다.

설경구의 신들린 연기가 돋보이는 걸작
 

설경구는 <박하사탕>에서 신들린 연기로 순수한 청년 김영호가 타락하는 과정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 CGV아트하우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는 시간순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물론 회상장면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박하사탕>은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명대사가 등장하는 엔딩이 먼저 나온 후 주인공 김영호(설경구 분)가 타락하는 과정을 시간의 역순으로 보여주는 독특한 전개방식을 취하고 있다. 설경구의 절규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은 시그니처 대사가 초반에 나온 것을 보고 적잖게 당황하기도 했다.

소설가로 활동하다가 1997년 <초록물고기>를 연출하며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든 이창동 감독은 소설가 출신답게 자신의 영화에 문학적 장치나 은유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속도감 있는 전개보다는 완만하고 정적인 전개를 추구하는 편이다. <박하사탕>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러 역사적인 사건에 휘말리는 소시민이 타락하는 과정을 정적이고 현실감 있게 보여주는 이창동 감독의 색깔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영화 <박하사탕>은 뭐니뭐니해도 설경구라는 걸출한 배우를 발굴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연극배우 시절 뮤지컬 <지하철1호선>을 상징하는 배우였던 설경구는 1996년 <꽃잎>으로 영화에 데뷔해 몇 작품에 출연했지만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그러던 1999년 <박하사탕>에 캐스팅된 설경구는 <박하사탕>을 통해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했고 청룡영화상과 춘사영화제에서는 신인상을 건너뛰고 곧바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실제로 설경구는 <박하사탕>에서 40대에서부터 20대로 거슬러 올라가 점점 순수함을 잃고 타락해가는 김영호를 완벽하게 표현하며 단숨에 최고의 배우로 떠올랐다. 특히 신참형사였던 김영호가 학생을 고문한 후 선배들의 회식장소에서 군대 제식구호를 외치며 행패 부리는 연기, 그리고 계엄군이 된 김영호가 1980년 광주에서 여고생을 총으로 쏴 죽인 후 절규하는 연기는 설경구의 신들린 연기를 볼 수 있는 <박하사탕>을 대표하는 명장면이다.

지난 2001년 YB는 자신들의 5번째 정규앨범에 <박하사탕>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타이틀곡으로 싣기도 했다. YB의 드러머 김진원이 영화 <박하사탕>을 보고 영감을 얻어 가사를 쓰고 윤도현이 곡을 붙인 노래 <박하사탕>은 YB의 보컬 윤도현이 YB 노래 중 가장 아끼는 곡으로 6집과 7집에도 다른 버전으로 편곡돼 수록됐다. 노래 <박하사탕>은 훗날 정동하와 박정현, 스윙스, 한동근 등 후배가수들에 의해 다시 불리며 재조명 받았다.

무존재감 여주인공? 문소리 '한 방'은 2년 후에
 

<박하사탕>에서 존재감이 작았던 여주인공 문소리는 2년 후 <오아시스>를 통해 세계가 주목하는 여성배우로 떠올랐다. ⓒ CGV아트하우스

 
영화 <박하사탕>에서 설경구 다음으로 두 번째로 엔딩 크래딧에 이름을 올린 배우는 김영호의 첫사랑 윤순임을 연기했던 문소리였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문소리의 목소리는 영화가 시작된 후 1시간 31분이 지나서야 들을 수 있다. 물론 윤순임은 영화 초반 병원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그 때는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박하사탕>은 문소리의 영화 데뷔작이었고 <박하사탕>에서 문소리를 인상 깊게 기억한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 <박하사탕>을 연출한 이창동 감독은 신인배우 문소리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문소리를 차기작 <오아시스>의 주인공 한공주 역에 캐스팅했다. 그리고 문소리는 <오아시스>를 통해 베니스 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하며 설경구보다 2년 늦게 한국영화 최고의 여성 배우 중 한 명으로 급부상했다.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를 함께 한 설경구와 문소리는 그로부터 11년 후 코미디 영화 <스파이>를 통해 부부로 재회했다.

중·장년의 시청자들에게는 <대장금>의 의녀 장덕과 <이산>의 정순황후, 젊은 시청자들에게는 <이태원 클라쓰>의 조이서 엄마, <빈센조>의 최명희 변호사로 잘 알려진 김여진은 <박하사탕>에서 김영호의 전부인 양홍자 역을 맡았다. 홍자는 짝사랑하던 김영호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지만 운전교습강사와 바람 피우는 현장을 김영호에게 들킨 후 이혼을 한다. 이혼 후에는 모든 것을 잃고 집으로 찾아온 김영호를 차갑게 문전박대 한다.

<박하사탕>에는 3명의 주연급 배우들 외에도 관객들에게 익숙한 배우들이 조·단역으로 많이 등장했다. 김인권은 순임이 면회 온 위병소의 초소병장, 공형진과 <올드보이>에서 오대수 친구, <해바라기>에서 '병진이 형'으로 나왔던 지대한은 김영호의 동료형사로 출연했다. 그리고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 살인사건과 유재하 노래 <우울한 편지>의 연관성을 찾아낸 권귀옥 형사 역의 고서희는 <박하사탕>에서 군산의 술집 접대부로 출연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박하사탕 이창동 감독 설경구 문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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