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독립운동가

조선을 위한 뜨거운 삶... '후세 다쓰지'와 '가네코 후미코'

등록 2023.08.14 13:55수정 2023.08.16 09:00
0
원고료로 응원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현재까지도 일본 정부는 우리의 영토인 독도에 대하여 일방적 주장을 거듭하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 시절 위안부, 강제징용 등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최근에는 핵 오염수 방류 문제가 양국 간의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태도와는 달리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나 시민운동가들은 자국의 엄청난 비난과 협박을 받으면서도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지 않고 용기 있게 나서 정의와 양심을 실천하고 있다. 단순히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의 개념을 넘어서 화해와 연대를 실천하고 있는 '양심적 일본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 '인권과 정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반기를 들고 핍박받던 한국인을 도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뜨거운 삶을 살다 간 일본인들이 있었다.

국가보훈부의 자료에 따르면 2023년 5월 기준 약 1만 7800여 명의 독립유공자가 있다. 이 중에서 외국인 유공자는 75명으로 약 0.4%에 해당한다. 이들을 국적별로 살펴보면 보면 중국인이 가장 많고 미국, 영국, 캐나다 순이다.

국가보훈부에서는 1992년부터 매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금년 5월에는 일본인 두 명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을 그것도 일본인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건 처음 있는 일로 매우 이례적이다.

정의와 양심에 따라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애족장과 애국장을 받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79~1953)'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가 그들이다.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
 
a

변호사 시절의 후세 다쓰지 ⓒ KBS

 
일본 제국주의의 광기가 극에 달하던 1923년 9월.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재판이 열린다. 이른바 '일본 천왕 암살 미수 사건'이다. 이 재판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 당국이 악의적 유언비어를 퍼트려 조선인 6000여 명을 학살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피고인들이 '천왕을 암살하려 했다'라는 '대역사건'으로 조작한 재판이었다.

피고인은 조선의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과 일본 여인 가네코 후미코(1903~1926)였다.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박열은 조선의 관료복장인 사모관대를 착용했고 가네코 후미코는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다.
   
박열과 후미코는 일본어 대신 조선말로 일본 제국주의를 성토하며 법정을 조롱했다. 이 모든 것은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전략이었다. 후세 다쓰지는 이 재판에 변호인 자격으로 참석해 일제의 만행과 야만을 전 세계에 폭로했다.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일본인을 대표해 사죄의 글을 신문에 실었다.

박열과 후미코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옥중 결혼한다. 이후 후미코는 교도소 감방에서 죽음으로 발견됐고 박열은 22년을 복역한 후 1945년 석방된다.

이보다 앞선 1919년 2월 8일. 조선인 유학생 600여 명이 일본제국주의 심장 도쿄에 모여 '조선청년독립단'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의지를 밝힌 '2·8 독립선언'이 일어났다. 주동자 30여 명이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1심에서 빠르게 유죄가 인정되었으나 항소심 변호를 맡은 후세 다쓰지는 "조선 독립운동가에게 경의를 표한다"라며 수임료 한 푼 받지 않고 조선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이들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뿐만 아니었다. 1924년 일본 천왕이 사는 황궁에 폭탄을 투척한 조선의열단원 김지섭과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기 위해 국내로 폭탄 밀반입을 시도한 김시현 등을 맡아 변호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후세 다쓰지는 1923년 8월 조선땅에 첫발을 내딛는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경성역 앞에서 그를 반겼다. 후세는 총독부의 눈을 피해 전국을 돌며 총독부의 폭압정치를 비판하며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926년 후세는 나주 궁삼면 토지 분쟁의 변호를 맡기 위해 두 번째 조선을 찾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농업에 적합한 기후와 교통조건을 갖춘 욱곡, 지죽, 상곡면 일대의 토지를 강제로 매수하자 농민들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일제의 불법적인 토지 매수 과정을 철저하게 조사한 후세는 소송에서 화해를 이끌어내 농민들의 요구를 대폭적으로 수용하게 했다.

일본 정부 내 반체재 인사로 낙인찍힌 후세는 1932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변호사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아들 후세 모리오는 옥사한다. 일제 패망 후 변호사직을 회복한 후세는 조선인의 인권과 선거권을 위해 노력했다.

현재도 후세의 정신을 계승한 2000여 명의 일본 자유법조단 변호사들은 역사왜곡 반대와 인권과 평화 헌법 수호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2004년 일본인 최초로 후세 다쓰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후세의 고향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 있는 그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는 비문이 그의 뜨거웠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조선 독립운동가를 사랑한 '가네코 후미코'
 
a

영화 박열에 나오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 영화 박열 스틸컷 ⓒ 메가박스(주)프러스엠

 
1903년 1월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일본에서 자라지 못한 가네코 후미코(1903~1926)는 9살 때 할머니와 함께 충청북도 청주군 부강면에 있던 고모부 집에 맡겨진다.

16살이 되던 1919년 우연히 3·1 만세운동을 목격한 후미코는 서슬 퍼런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당당히 맞서 만세를 외치며 독립을 부르짖는 조선인들에게 깊은 공감을 느끼며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과 약자에 대한 연대감을 갖게 된다.

조선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고모집에서 쫓겨나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후미코는 1920년 동경으로 상경하여 신문팔이와 노점상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이때 후미코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를 시작하며 영향을 받았다.

이 무렵 국내에서도 3·1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주동학생들이 검거되고 투옥됐다. 이때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해, 만주, 연해주, 미주, 일본 동경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고향을 떠나 동경 유학길에 오른 박열(1902~1974)은 동경 간다(神田)에 있는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신문배달,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등 온갖 밑바닥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여러 유학생 단체에 가입하며 학업을 이어 나간다. 이때 일본 내 무정부주의자들과 접촉한다.

박열은 20살이 되던 1922년 2월 스끼야바시(數崎屋橋) 근처에 있는 오뎅집에서 평생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후미코를 만나게 된다. 이곳은 후미코가 일하는 집으로 이와사키(岩崎)라는 사회주의자가 경영하는 오뎅집이었다. 주로 지식인들과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의 집합장소로 이용되는 곳이었다.

이즈음 후미코는 <조선청년>이라는 잡지에 박열이 쓴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깊은 감화를 받는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서로의 강열함에 이끌린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간다. 후미코를 만난 박열은 아나키즘단체인 흑도회와 흑우회 등에 참여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23년 박열과 후미코는 항일 운동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그해 9월 관동 대지진이 발생했고 이를 구실로 일제는 한국인들과 일본 내 사회주의자들을 체포 구금하였다. 이때 후미코와 박열도 대역죄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박열은 풀려났지만 후미코는 1926년 7월 옥중에서 사망했다. 일제는 후미코가 여죄수 감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타살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네코는 유언을 통해 유골을 남편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묻어달라고 했다. 유골은 헌병들의 호위 속에 아무도 찾지 못하는 선산 중턱에 묻혔고 철저히 통제됐다.

이후 박열은 김구 선생의 부탁을 받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등 3인의 유해를 모셔 와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하게 했다. 1949년 4월에 영구 귀국했으나 6·25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가 1974년 북에서 눈을 감았다. 1989년 3·1절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2003년 경북 문경에 박열의사 기념관이 조성되었고 가네코 후미코의 묘는 깊은 산속에서 박열 기념공원 경내로 이장되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식민지 조선을 사랑했던 가네코 후미코.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조선의 독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했다. 일본인으로는 후세 다쓰지 변호사 이후 두 번째 사례이다.
#후세 다쓰지 #가네코 후미코 #일본인 독립운동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박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일본 국보가 된 '백제의 칼'

AD

AD

AD

인기기사

  1. 1 영국 뒤집은 한국발 보도, 기자는 망명... 미국은 극비로 묻었다
  2. 2 [10분 뉴스정복] 동아일보 폭발 "김건희는 관저 떠나 근신해야"
  3. 3 [단독] 이정섭 검사 처남 마약 고발장에 김앤장 변호사 '공범' 적시
  4. 4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힘이 빠지고 있다
  5. 5 "400만 달라" LH직원 요구 거절하자 임대료 4배로 폭등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