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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놓인 단 하나의 지휘봉

[넘버링 무비 282] 영화 <마에스트로>

23.08.15 09:58최종업데이트23.08.15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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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에스트로> 스틸컷 ⓒ (주)티캐스트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저한테 아버지가 있어요?"

부자지간(父子之間)의 사이는 생각보다 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언제나 그랬다. 오죽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일까. 아들이 동성인 아버지에게는 적대감을 갖고 이성인 어머니에게는 호의성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한다. 아버지의 욕망을 아들이 그대로 모방하게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정신 발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동종의 업계를 함께 나아가게 되는 부자(父子) 관계에서는 그 간극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아버지의 자리가 쉽게 넘어설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고 권위적일 때, 또 아들의 성장과 성취가 보통의 경우보다 빠르고 거셀 때 그렇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일종의 질투와 경쟁심 같은 것들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여기에도 그런 뻣뻣한 사이의 부자(父子)가 있다.

지휘자 드니 뒤마르(이반 아탈 분)는 권위적인 빅투아르 클래식 음악상을 방금 막 수상하며 차세대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수상 후 단상 위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위트 있게 소감을 이어가던 그는 어머니 곁에 비어 있는 자리를 바라보며 또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한다. 같은 지휘자이자 음악계의 거장으로 이미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뒤마르(피에르 아르디티 분)다. 아들의 지난 업적이 인정되고 창창한 미래가 보장될 이 순간에도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 그런 아들의 모습을 집에서 TV로 보고 있던 프랑수아는 그 장면마저 모두 지켜보지 않고 이내 꺼버리고 만다.

음악을 배우기는 했으나 이렇게 영광스러운 날 문자나 전화는커녕 어떤 변명조차 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마음과 아들이 같은 분야에서 자신에 이어 성공하는 모습을 축하하기는커녕 그의 음악조차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아버지의 마음. 시작부터 두 인물의 불편한 관계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이 영화 <마에스트로>는 그런 두 마음의 거리 사이에 묘하게 자리하고 있는 어떤 경쟁심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복잡한 내면은 이제 세계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펼쳐 나가게 될 이와 훌륭한 업적을 뒤로하고 모두의 박수 속에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내리막길을 마주하게 될 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02.
두 사람의 문제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라 스칼라 극장의 지휘자 자리로 인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계적인 극장의 무대에 설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로 지휘자라면 누구나 생애 한 번쯤 욕심을 낼만한 자리다. 그 제안을 처음 받게 되는 것은 아버지 프랑수아다. 다른 모든 업적을 달성한 그에게도 이는 평생을 기다려온 기회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평생을 미뤄온 프러포즈를 아내(미우 미우 분)에게 할 정도로 환희에 휩싸인 그의 모습. 문제는 라 스칼라 극장의 비서인 카를라(발렌티나 반델리 분)의 실수로 원래대로라면 아들인 드니에게 가야 했던 제안이 아버지 프랑수아에게 가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성이 같은 뒤마르라는 이유로, 극장이 원래 원했던 지휘자는 생동감 넘치고 힘 있는 연주가 가능한 젊은 지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극장 측에서 제대로 된 절차에 따라 소위 교통정리라는 것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지만, 영화는 이 지점에서 두 남자의 불편한 상황을 십분 이용하며 이야기를 더 높이 쌓아가기 시작한다. 이 불편하고도 당혹스러운 상황을 당사자이자 아버지인 프랑수아가 아니라, 아들인 드니에게 처음으로 알리고 직접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극장 측의 모습을 통해서다. 물론 극장의 지휘자 자리에 대한 제안도 함께다. 멀리 돌아온 만큼 제안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고, 그렇다고 평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그대로 놓칠 수도 없는 드니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 아버지에게도 이 사실을 직접 말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놓인다.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숨을 죽이고 있던 갈등의 도화선에 불이 막 붙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부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들이 하나씩 던져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영화는 두 사람의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데려와 활용하기 시작한다. 핵심 사건 주변에 놓여 있는 위성 사건들의 이야기를 통해 클라이맥스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식이다. 그 첫 번째 인물은 바로 드니의 현재 여자친구인 비르지니(카롤린 앙그라드 분)다.
 

영화 <마에스트로> 스틸컷 ⓒ (주)티캐스트


03.
비르지니는 아직 라 스칼라 극장의 지휘자 자리를 수락하기 이전에 드니가 맡고 있던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다. 전처인 잔느(파스칼 아르비요 분)와의 이혼 후 아들 마티유(닐스 오테닌 지라르 분)와 함께 살고 있는 드니의 곁에서 그를 지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단 한 가지, 그녀가 안고 있는 결함이 있는데 연주자로서의 실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드니는 그녀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응원을 아끼지 않고 있지만, 업계에서 오래 지내온 인물이자 이혼 후에도 여전히 드니의 매니저를 자처하는 잔느는 그의 그런 모습에 대해 비겁하다고 일갈한다. 비르지니의 실력이 오케스트라의 제1연주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헛된 꿈이나 꾸게 만든다고 말이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드니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내면 깊은 곳의 약점을 스크린 위로 건져 올린다. 라 스칼라 극장의 지휘자 자리와 관련한 문제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인 프랑수아에게 연락하지 못하는 것 역시 어쩌면 그래서인지 모른다(아버지가 그 제안으로 얼마나 환희에 차 있으며 하루라도 빨리 이탈리아로 떠나기를 고대하고 있는지를 옆에서 직접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그는 끝내 입을 다문다).

물론 그가 아버지가 최대한 상처를 덜 받는 쪽의 방법을 찾으려고 애를 쓴 건 사실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처음 전달받는 자리에서도 자신이 아버지보다 경력이 훨씬 짧고 미천한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고, 밤새 머리를 싸매며 편지를 쓰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여전히 아버지인 프랑수아가 알지 못하는 수면 아래에서 이뤄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이 문제는 라 칼라스 극장의 수석 연주자의 공연에서 훨씬 더 불편하고 어려운 방법으로 전달되고 만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아들과 자신이 배제된 것을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만남이다. 언제까지 유예하려고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아들의 우유부단함과 비겁함이 만든 또 하나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마에스트로> 스틸컷 ⓒ (주)티캐스트


04.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질투와 복잡한 감정으로 어리석고 덧없는 길을 헤매는 동안 영화는 그들 곁에 머물고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본다. 지휘자라는 직업 때문에 평생을 집 밖으로 나돌던 프랑수아를 평생 곁에서 지켜봤던 엘렌과 직업적 성취를 얻기는 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은 드니를 사랑해 온 비르지니다. 엘렌은 극장의 제안을 받은 직후의 프랑수아가 환희에 찬 모습으로 프러포즈를 해 오자, 자신은 그의 직업적 성공과 상관없이 항상 자랑스러웠다고 말한다. 비르지니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와의 일로 힘겨워하는 드니에게 그녀는 자신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된 것만으로도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응원의 말을 더한다.

두 여인이 가진 삶의 태도가 두 남자가 가진 태도와는 정확히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니와 프랑수아가 부자(父子)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분명 수직적 시각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누르고 일어서는 것이야말로 성취의 증명과도 같다고 여기는 시각.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고, 역시 아버지는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수직적인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엘렌과 비르지니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자랑이 되는 것은 성취나 성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성공의 척도가 반드시 사회적이고 직업적인 측면에만 놓여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격자를 두 사람이 완전히 비틀어 놓는다.

05.
"아비로서 가장 큰 모욕이 아들에게 동정받는 거야."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의, 상부가 뾰족한 원뿔형 형태의 탑 모양은 처음 누가 생각해 냈을까. 그리고 사회의 경쟁 구조는 왜 하필 그런 모양을 닮아가게 된 걸까. 이제껏 모든 영광을 누려왔을 프랑수아에게 이 사건은 큰 충격을 주고 만다. 어쩌면 자신의 염원과는 무관하게 하나의 단상을 타인에게 빼앗겼다는 사실만큼이나 이제 자신이 내리막을 향해 걸을 때가 되었다는, 더 이상의 노력으로는 자신의 노력과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는 사건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아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아버지 프랑수아는 왜 알고도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아들 드니다. 두려움이 문제냐고, 여전히 이 머리가 백발인 노인이 그렇게 두려워하느냐고 재차 묻는 아버지. 역시 아들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업계 최고로 알려져 있는 아버지를 핑계 대며 세계 최고의 무대에 서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냐고 프랑수아는 강하게 채근하지만, 이번에도 아들은 어떤 대답도 내지 못한다.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아버지가 이미 상처를 받았을 이 상황을 물릴 수도 없을 것이고, 또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기분에 맞춘 대답도 이제 와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니의 생각과 달리 프랑수아는 생각보다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실망했고 허탈함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포기해야 하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아는 연륜이고, 경력이 되었다. 전날 밤 아들을 강하게 밀어붙였던 것은 그가 어설픈 마음으로 이 업계를, 또 자신을, 세계 최고의 자리를 대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 뿐이다. 지금은 환희가 앞에 놓여있다고 해도, 언제 다시 그 불꽃이 약해지고 세상의 관심과 환호가 사그라들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영화 <마에스트로> 스틸컷 ⓒ (주)티캐스트


06.
영화는 후반부의 끝자락에 이르러 두 사람이 화해에 닿는 모습을 극적이고 영화적인 장치를 통해 보여준다. 실제로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란 어려운 장면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균형과 화합의 측면에서, 또 성공과 경쟁의 자리에서 꽤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오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노력하고 서로 맞춰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또한 그와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상 위에서 지휘자가 해야 하는 일이 무대 위 오케스트라의 모든 것을 조절하는 데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 역시 제 삶의 균형을 맞추고 타인과 화합을 맞춰가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이제 아들은 자신이 돌보지 못한 관계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한다. 아버지와 가까워지려고 음악을 시작했다는 드니나, 그런 드니와는 달리 자신은 결코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아들의 아들 마티유처럼 타인의 선택까지 자신이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상대의 몫을 제외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애를 쓰는 것뿐이다. 자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상대의 걸음만 재촉하는 것으로 거리를 좁힐 수는 없다. 지휘자가 지휘를 시작하지 않은 채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시작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마에스트로 프랑스영화 이반아탈 피에르아르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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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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