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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 '허스키 보이스의 시대' 연 한영애의 명반

[명반, 다시 읽기] 한영애의 <바라본다>

23.09.04 10:37최종업데이트23.09.0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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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및 시대를 아우르는 과거 명반을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오늘날 명반이 가지는 의의를 되짚고자 합니다.[편집자말]
1986년 '건널 수 없는 강'에서 발아된 씨앗은 그로부터 2년 후 <바라본다>(1988)로 하여금 완전한 탄생을 맞이하게 된다. 불세출의 명반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것은 한영애라는 입지적 인물을 대표하는 시대 불변의 초상화요, 한국 음악사에 새로운 유형의 여성 보컬을 아로새긴 사건이다.
 
1976년 이미 포크 그룹 해바라기의 초기 멤버로 가수 활동을 시작한 한영애지만, 위세에 힘입어 계속 음악계에 전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소리를 내는 것뿐 아니라 폭발적인 외침에 대한 열망을 늘 품고 있던 그는 잠시 품을 떠나 극단 생활의 길을 걷는다. 가수의 신분으로 다시 복귀해 앨범을 발매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10년. 따스한 정경의 '여울목'과 쓸쓸한 색소폰이 여울지는 '도시의 밤' 등이 수록된 1집 <한영애>(1986)가 그 주역이었다.
 
글의 초두에서 말했듯 이 앨범을 2집의 실마리로 본 것은 '건널 수 없는 강'이라는 훌륭한 재목의 존재였다. 강한 의지는 어떻게든 결국 발현된다고 했던가. 울부짖는 이정선의 블루지한 기타 사이로 특유의 허스키한 창법을 마음껏 펼치며 그간 꿈꿔왔던 '외침'에 대한 열망을 해소했기 때문. 심지어 다년간 여러 분야를 거치며 더욱 성숙해진 가창에는, 어딘가 아련하면서도 희망을 머금은 동시다발적 삶의 터울마저 담겨 있었다. 한영애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대중에 이름을 알린 중요한 순간이다.
 

한영애의 2집 <바라본다>의 음반 커버 이미지 ⓒ 동아기획


탄력적 구름판을 밟고 힘차게 도약한 <바라본다>는 그 4분의 세계를 넓게 펴 바른 이상세계와 같다. 정통 블루스 뮤지션 윤명운이 만든 세기의 명곡 '누구없소?'부터 남달랐다. 실존에 대해 덧없이 회의하며 몸부림치는 가사 가운데 처절하게 수놓이는 한영애의 목소리. 이는 마치 한대수가 건넨 '물 좀 주소'의 포효만큼이나 당시 음악계에 커다란 충격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두고 블루스의 여왕 제니스 조플린에 비견한 것은 단지 창법의 유사성보다도 한을 씻어내는 듯한 전인미답의 카리스마가 자아내는 통렬함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앨범의 진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명 참여진이 빚어낸 유수의 수록곡은 물론, 한영애라는 강한 중력장이 촘촘히 묶어낸 견고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 <바라본다>가 어떤 앨범인가 묻는다면 '한영애 그 자체'라고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이유다.
 
<사랑하기 때문에>의 유재하가 선물한 모던 발라드 '비애'는 비바람에 적신 듯 사무치는 피아노에 더욱 깊게 파고드는 감정선을 선보이며 배경이 지닌 감상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뒤이어 화려한 기타 플레이와 함께 화두를 띄우는 '달'에 이르러는 경쾌한 분위기에 맞춰 금세 들썩거리는 화법으로 전환해 위로를 건네는 위치로 둔갑한다. 이정선의 손길이 닿은 '여인 #3'에서는 건조한 질감에 녹아들어 신비주의를 고수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어떠한 환경에도 카멜레온같이 색을 흡수해 주도권을 놓지 않는 어마어마한 소화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당시 앨범에 참여한 코러스진. 전인권, 한영애, 김현식 등의 이름이 보인다. ⓒ 동아기획


또한 한영애는 직접 앨범 작업 및 작사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음악에 대한 주인의식을 불태우기도 했는데, 신촌블루스 엄인호의 능란한 블루스 연주가 돋보인 '루씰'과 작품의 타이틀이자 김수철의 수려한 강약 조절이 두드러진 '바라본다'에서는 그가 소유한 걸출한 작문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전자가 기타를 인간에 빗대 새침하고도 순수한 면을 담았다면, 후자는 성숙한 표현을 탁월하게 병치하며 삶의 이치를 달관한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루씰 수줍은 듯 너의 모습은 / 때론 토라지게 때론 다소곳하여 / 그의 작은 손짓에도 온몸을 떠는 / … / 나도 너처럼 소리를 갖고 싶어" – '루씰' 중
"화려한 하루를 남기고 이미 불타버린 / 저 하늘 구탱이에 녹처럼 매달렸던 / 마음의 구속들, 바라본다…" - '바라본다' 중

 
'한국의 블루스 명반'을 거론할 때 늘 손꼽히는 <바라본다>지만, 이러한 장르의 특수성 너머 높은 완성도와 정돈된 곡간 균형은 '한국의 명반'으로 평가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위치에 놓인다. 그런 의미에서 수많은 아티스트의 음반 제작으로 유명한 사랑과 평화 소속 송홍섭의 프로듀싱 작업은 앨범의 가치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여러 작곡진의 개성 넘치는 수식을 한영애라는 중추에 대입시킨 편곡은 플레이어의 정체성을 돋보이게 한 주역으로 자리잡는다.
 
오늘날 들어도 손색없는 불변의 명반이다. 강한 화력으로 힘차게 전진하는 '코뿔소'와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따뜻하게 감싸 안는 '호호호'까지. 이것은 한영애가 걸어온 무수히 많은 궤적이자, 한국 블루스 신의 영토를 만든 점선이다.
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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