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산마을회관 앞에 있는 홍남순 생가. 홍남순 변호사는 지금도 마을주민의 자랑이고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이돈삼
민주화운동 투신한 홍남순 인권변호사 아십니까
재야 민주화 운동의 대부였던 홍남순(1912~2006)도 마을의 자랑이다. 모산마을에서 태어난 홍남순은 판사와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70년대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1980년 5월엔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맞선 시민대표의 '죽음의 행진'에도 함께했다. 홍남순은 서슬 퍼런 신군부의 협박과 고문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군사법정에서도 계엄군을 꾸짖으며 광주항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홍남순은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양심수를 무료 변론하며 인권변호사로 큰 자취를 남겼다. 1973년 전남대학생 박석무와 김남주 등이 유신독재 비판 유인물을 뿌리다가 구속된 '함성지' 사건,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기념미사를 빌미로 재야인사를 구속시킨 '3·1구국선언' 사건의 변호를 맡았다.
1978년 송기숙 등 전남대교수 11명이 국민교육헌장에 맞서 발표한 '우리교육지표' 사건 등 수십 건을 변호하며 '긴급조치 전문 변호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사법살인'이 일상이던 참혹한 시절, 홍남순은 독재에 맞선 양심수들의 바람막이를 자청하며 '법정의 투사'로 살았다.

▲ 홍남순 변호사의 동상. 생가 앞마당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 모산마을회관 앞에 있는 홍남순 생가. 홍남순은 양심수를 무료 변론하며 인권변호사로 큰 자취를 남겼다.
이돈삼
모산마을회관 앞에는 홍남순 생가가 복원돼 있다. 그의 동상과 함께 '時窮節乃見'(시궁절내견) 현판이 눈길을 끈다. 궁할 때, 그 사람의 절제된 삶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남송시대 시인 문천상의 '정기가'에 나온 구절로, 홍남순이 좌우명으로 삼았던 글귀다.
'못 살더라도 항상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죽음에 이를 때에도 아무런 부끄럼이 없이, 역사 앞에 발을 뻗을 수 있다.'
'불의에 항거하고 올바르게 산 청년들이 무슨 죄가 있냐. 다 석방해야 한다. 나는 법조인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생가 벽면에 새겨진 그의 어록도 발걸음을 붙잡는다.

▲ 모산마을 풍경.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유엔세계관광기구의 최우수 관광마을로 선정됐다.
이돈삼

▲ 모산마을의 한옥 풍경. 모산마을은 유엔세계관광기구의 최우수 관광마을로 선정됐다.
이돈삼
모산마을과 인근 지역은 2014년 국가지질공원, 2018년엔 무등산권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됐다. 광주와 담양·화순에 걸쳐있는 무등산은 중생대 백악기에 세 번의 화산폭발로 생성됐다고 알려져 있다. 무등산권 세계지질공원은 총면적 1051㎢에 20개소의 지질명소, 4개의 예비 지질명소, 42개의 역사문화 명소를 품고 있다.
모산마을 주민들은 도랑 살리기 프로젝트도 추진, 마을 하천을 생태하천으로 만들었다. 정기적으로 울력을 통해 하천도 정비한다. 하천에선 천연기념물 수달이 발견됐다.
마을 뒤 묘산 기슭에 자리한 삼지재(三芝齋)의 역사도 깊다. 제주양씨 문중의 옛 서당인 삼지재는 학포 양팽손(1488~1545) 등이 학문을 배우고 익힌 곳이다. 마을사람들은 삼지재가 자리한 골짜기를 '서당골'이라 부른다. 삼지재는 '월곡의숙'을 거쳐 지금의 도곡중앙초등학교로 이어진다.
지척에 학재고택과 양참사댁도 있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고택은 문화체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접근성이 좋은 것도 모산마을의 장점이다. 4차선 국도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고속철도가 서는 송정역에선 29㎞, 광주공항에선 27㎞ 떨어져 있다.

▲ 모산마을에서 만나는 담장벽화. 고인돌과 홍남순을 주제로 그려져 있다.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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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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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구도 반한 화순 고인돌 마을, 이유 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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